▲계양산 자락에 자리잡은 해인교회는 해방 인간, 해방 인천을 내걸고 문을 연 뒤 투쟁하는 교회에서 나누는 교회로 성장해갔다. ⓒ뉴스앤조이 주재일
인천 계산역에서 내려 계양산 쪽으로 올라가는 골목길 안쪽에 가정폭력상담소가 있고, 그 옆길로 가면 해인지역아동센터가 나온다. 아파트 단지 틈새 빌라촌 한쪽에는 노숙인 쉼터가 있다. 계양산 길을 걸어가다 보면 내일을여는집(이준모 대표)과 해인교회(김영선 목사인천시 계양구 계양산로 91)가 산자락에 자리 잡고 있다. 조금 더 가면 계양산 맞은편에 계양시니어클럽이 들어선 큰 건물이 보인다. 내일을여는집 마당엔 푸드 뱅크 냉동 탑차가 보인다. 이곳에서 계산동 삼거리 방향으로 10분쯤 걸어가면 노숙인들이 운영하는 재활용 센터와 도농살림이라는 사회적 기업이 있다.

 
해인교회가 지역사회를 위해 펼치는 사업의 거점들은 계양산 자락 계산동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다. '여기에는 뭐가 있고, 또 저 골목에는 뭐가 있고.' 마치 여행안내 지도를 들고 답사하듯이 해인교회의 활동을 살펴보며 오르막길을 올라 내일을여는집이 있는 곳까지 걸었다. 오르막길을 걷느라 가쁘고, 해인교회가 펼치는 활동을 체크하느라 숨이 찼다.
 
노숙인 긴급 구호부터 복지까지
 
해인교회는 노숙인의 자활을 돕는 과정을 완벽하게 마련해 놓고 있다.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위한 원스톱 시스템을 구축한 것이다. 밤이 되면 내일을여는집 사회복지사들이 길거리 노숙인을 만나러 다닌다. 지하철역이나 터미널, 공원 등을 돌며 노숙인들이 모이는 곳에 가서 거리 노숙인들을 돌보면서 그들을 위해 쉼터로 들어올 것을 권한다. 동거자나 가족들이 있어 쉼터로 들어오는 것을 꺼리는 이들에겐 3개월간 월세방을 얻어 주고 생필품도 사 준다. 3개월간 지원해 주면서 자활을 시도해 보라는 권유다. 쉼터로 들어오는 이들에게는 잠자리와 먹을거리를 제공하고, 일자리도 알선해 준다. 공동생활을 하는 쉼터에는 생활을 돕는 활동가들이 따로 있다. 때로 쉼터에서 생활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끼니를 때울 수 없는 이들이라면 해인교회 3층에서 매일 무료 급식을 지원받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푸드 뱅크를 통해 식품류나 생필품을 지원받을 수도 있다.
 
잠자리와 끼니를 해결한 뒤에는 취업을 돕는 다양한 교육 강좌를 들을 수 있고, 일자리 정보도 제공받는다. 내일을여는집 안에는 도농살림, 재활용 센터, 밥집까지 다양한 일터가 있어 원하면 함께 일할 수도 있다. 성실히 일을 하며 다시 가정을 꾸릴 수 있는 마음을 회복한 이들을 위해서는 따로 살 수 있는 주거 공간도 제공한다.
 
노숙인뿐 아니라 가정 폭력에 시달리는 이들을 위해서는 상담소가 별도로 마련되어 있고, 꼭 가정 폭력이 아니더라도 언제든지 다양한 주제로 상담을 할 수 있는 활동가들도 여러 명이 있다. 자녀들은 지역아동센터에서 보육을 맡아주고, 시니어클럽은 노인들의 경제 활동과 여가 활동을 돕는다. 긴급 구조에서 자립하여 독립에 이르기까지, 보육부터 노후 문제 해결까지 전 단계에 걸쳐 사회 안전망이 탄탄하게 짜여 있다.
 
활동가 30여 명이 상근하며 1998IMF 이후 15년 동안 2500명이 넘는 노숙인과 가정 폭력 피해자의 생활보호를 해 왔으며, 날마다 200여 명에게 무료 급식을 제공하고 있다. 쉼터에서 생활하고 있는 노숙인들은 연평균 97%가 취업했고, 지역의 노인 980여 명에게 일자리를 제공했다. 국무총리상, 장관상, 시장상 등 내일을여는집이 받은 상도 수십 개에 이르고, 상담소 등에 대한 정부와 지자체 평가에서 항상 수위를 유지했다. 수치로 드러나지 않는 상담과 교육 활동은 더 활발하게 펼쳐지고 있다. 인천을 넘어 전국에서 대표적인 노숙인 자활 센터로 자리 잡은 것이다.
 
이 정도 규모의 활동을 뒷받침하려면 해인교회도 상당한 규모일 것이라 예상하기 쉽지만, 해인교회는 출석 교인이 150명 정도 되는 작은 교회다. 활동가들과 노숙인을 빼고 마을에서 오는 교인들은 100명을 밑돈다. 어떻게 보면 해인교회보다 내일을여는집의 몸집이 훨씬 크고, 활동도 왕성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해인교회 마당에서 푸드뱅크에서 지원하는 생필품을 받고 있는 지역 주민들. (사진제공 해인교회)
이 목사는 컴퓨터 박사
 
시작은 초라했다. 아니, 절망과 좌절부터 겪었다. 해인교회는 1986'해방 인천', '해방 인간'을 꿈꾸는 노동자들이 만든 교회였다. 흔히 민중 교회라 불렀다. 창립 10년을 바라보던 1993년 말 해인교회 교인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1987년 민주화 바람이 불면서 그동안 교회의 울타리 안에 모여 생존과 인권의 문제를 풀어가던 노동자들이 공장으로 돌아갔고, 한 시대의 역사적 책임을 다한 민중 교회는 휘청거리고 있었다. 해인교회도 그 여파의 직격탄을 맞고, 교회의 정체성에 대한 지난한 토론의 끝자락에 내몰리고 있었다. 1994년 끔찍이 무더웠던 여름에 이준모김영선 목사 부부가 해인교회에 부임했다. 기존 교인들은 다 떠나고 허름한 전세 건물과 교회 이름만을 남겨준 것이다. 한동안 비어 있던 예배당을 청소하고, 끊어진 수도와 전기를 다시 잇고, 대학 선교 단체 활동을 하면서 알게 된 학생들을 교인으로 초대했다. 이준모 목사가 대학 시절에 CCC 활동과 KSCF 활동을 한 까닭에 후배 대학생들이 쉽게 연결되었다.
 
먼저 청년 대학생 20여 명과 함께 새로운 신앙 공동체를 이뤄 가며, 교회의 본질과 기능에 대한 열렬한 토론 과정을 걸쳐 신앙 공동체, 교육 공동체, 생활 공동체라는 세 개의 축을 교회의 기둥으로 삼았다. 그리고 교회는 지역 교회이어야 한다는 전제 아래 지역 전도에 나섰다. 주부나 지역 주민들을 대상으로 환경을 살리는 모임이나 무료 컴퓨터 교실 등을 개설했다. 강사로 나선 이 목사는 집집마다 컴퓨터를 직접 고쳐 주는 일까지 도맡았다. 이렇게 3년을 보내니 교인 구성도 많이 바뀌었다. 청년 일부는 직장이나 결혼을 하면서 다른 지역으로 떠났지만, 지역에 사는 이들이 교인으로 등록했다.
 
교인은 두 배로 늘었지만, 첫 번째 시련이 찾아왔다. 마을 주민들 대신 직접 서울 용산까지 가서 컴퓨터 부품을 사 와 조립해 주고, 언제든지 수리를 부탁하면 달려가는 생활을 반복했다. 생활비를 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전도에 큰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지만, 이 목사는 마을에 컴퓨터 박사로 소문나기 시작했다. 이 목사는 더 바빠졌다. 인지도는 올랐지만 이 목사에게는 회의가 들었다.
 
"그날도 아침 9시부터 해 질 녘까지 가가호호 컴퓨터 수리를 했습니다. 노을이 깔리는 언덕길을 올라오는데 내가 뭐하고 있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에게 '내가 목사인가요, 아니면 수리공인가요?' 하고 하소연도 했습니다. 원래 꿈이었던 독일로 유학할 생각도 스멀스멀 올라왔습니다."
 
그렇지만 고민은 길게 가지 않았다. 바로 IMF 사태가 터졌기 때문이다. 교인의 1/3가량이 실직했다. 교회 분위기는 급격히 침체되고, 어떻게 해서든 대책을 마련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유학의 꿈은 하늘로 날려 보내야 했다.
 
1998년이 되자마자 수요 예배를 실직자를 위한 특별 기도회로 전환했다. 이 목사는 물론 교인들 전체가 길을 열어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낮에는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부지런히 취업 정보를 물어 왔다. 교인들 이력서를 직접 손봐서 회사에 제출하는 일도 이 목사 몫으로 떨어질 때가 많았다. 기적이 일어났다. 기도회를 연 지 3개월이 지나면서 한두 명씩 취업하기 시작하더니, 해를 넘기기 전에 한 가정 빼고 모두가 직장을 구하게 된 것이다.
 
이 때다 싶어 오지랖 넓은 교인이 나섰다. 우리만 은혜를 받으면 되겠느냐, 교회 밖에도 실직자가 셀 수 없이 많은데, 그들을 위해서 일을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둘러보니 정말 실직자가 많았다. 교회 뒤 계양산 약수터와 공원마다 텐트 치고 자는 사람, 노숙하는 사람이 많았다. 마을에서 제법 넓은 공원 같은 곳들은 일터를 잃고 방황하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가까운 대학에서 열리는 실직자 대상 교육 프로그램에도 사람들이 넘쳐났다.
 
▲이준모 목사는 한때 '넥타이 멘 거지 목사'로 통했다. 가난한 교회가 노숙인들에게 식사를 제공하기 위해 마을을 돌며 후원을 요청했기 때문이다. (사진제공 해인교회)
노숙인 친구, '넥타이 멘 거지 목사'
 
40평짜리 작은 상가 3층에 있는 교회가 실직자를 위한 모임터를 차렸다. 오래된 컴퓨터지만 취업 정보를 검색할 수 있는 사무실도 만들고, '내일을여는집'이라는 간판도 달았다. 이 목사는 이 목사대로 다양한 취업 정보를 제공해 주었다. 사람들이 모여들어 곧 북새통을 이뤘다. 문제는 밥 때가 되어도 사람들이 밥을 사먹을 형편이 안 된다는 것. 그래서 실직자를 위한 무료 급식소를 시작하게 됐다.
 
이 목사 부부는 집에서 있는 그릇 없는 그릇 다 꺼내서 밥을 짓고 김장 김치를 가져와 김치찌개라도 해서 그들을 먹였다. 가난한 교회 살림으로는 턱없이 부족해 이 목사는 부모님과 친척들에게도 손을 벌렸다. 여기저기 알 만한 곳에서 빌린 돈도 얼마 안 가서 바닥났다.
 
"별 수 있습니까. 돈이 없으면 몸으로 때워야지요. 마을 떡집, 야채 가게 등을 돌며 팔다 남은 것들을 얻어 왔습니다. 중국집에서도 팔다 남은 음식을 얻어다 조달했습니다. 그때 제 별명이 '넥타이 맨 거지'였습니다."
 
같은 교단의 주변 목사들에게도 꾸지람이 날아왔다. 어느 선배 목사가 그랬단다. "목회 못 하는 것들이 꼭 저런 짓 벌인다." 후원을 받을 수 있다면 이런 핀잔 정도는 웃어넘겨야 했다. '별 짓 다 하는' 이 목사가 갑갑했던지 남신도회 회장이 사업 계획서를 만들어 정부에 지원을 요청하자고 제안했다. 겨우 두세 달 해 보고 정부나 기업에 돈 달라고 하는 게 웃기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회장 닦달에 못 이겨 사업 계획서를 만들고 어찌하여 보건복지부를 거쳐 다시 인천 시청까지 내려왔다. 어느 날 시청에서 이 목사를 불렀다. 아니 불려갔다.
 
당시 시청은 '우리 구에는 노숙인이 없다'는 보고를 올린 뒤였는데 이런 문건이 중앙 정부를 거쳐 내려오니 발칵 뒤집힌 것이다. 취조하는 태도로 정말 노숙인이 있느냐고 물었단다. 평소 만나는 노숙인 한 명 한 명 신상과 현실을 읊었다. 이 목사 설명을 들은 구청 담당자는 8000만 원을 지원할 테니 제대로 해 보라고 제안했다. 연 예산이 겨우 1800만 원이던 해인교회로서는 큰돈이었다. 150인분 밥을 지을 수 있는 주방 시설을 갖추고 그릇부터 장만했다. 한 동안 굶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내일을여는집 활동가들. 30여 명의 활동가들이 노숙인들을 위해 뛰고 있다. 이 목사는 요즘 이들이 번아웃되지 않도록 지원하는 일에 힘을 쏟는다고 했다. (사진제공 해인교회)
꼬리에 꼬리를 물고 만든 사역들
 
걱정거리 하나를 해결하니 또 다른 난관에 봉착했다. 배를 채운 사람들이 자리를 뜨지 않는 것이다. 딱히 갈 곳도 없으니 그럴 만했다. 개중에는 집이 없는 사람도 많았다. 쉼터를 만들기로 마음먹고 가까운 곳에서 목회하는 같은 교단 목사님에게 교육관 일부를 빌리자고 도움을 청했다. 30명이 살 수 있는 노숙인 쉼터는 개소 한 달 만에 정원이 넘쳤다.
 
이제는 노숙인 부부가 문제였다. 남자 노숙인 쉼터에 여성이 함께 살기는 어려웠다. 쉼터에 온 한 노숙인 부부의 경우 부인은 지적 장애가 있었고 아이들까지 딸려 있었다. 하는 수 없이 부인과 아이들이 지낼 수 있는 여성 노숙인 쉼터를 마련해야 했다. 신협에서 2100만 원을 빌려 전셋집을 마련하고, 이불 가지 등은 이번에도 이 목사 집에서 내왔다. 이렇게 시작한 여성 노숙인 쉼터도 한 달 만에 정원이 다 찼다.
 
이듬해에는 노숙인 가정 아이들을 돌볼 탁아방을 만들었다. 이렇게 시작한 탁아방은 지금 해인지역아동센터로 발전했다. 처음에는 노숙인 자녀를 위한 돌봄과 교육 공간이었지만, 지금은 지역의 어려운 아이들도 함께 어울리는 곳으로 성장했다. 이 목사는 노숙인 가정이나 일반 가정 아이들이 더불어 어울려 지내는 것이 모두에게 유익하다고 말한다.
 
여성 노숙인들을 만나면서 자연스럽게 가정 폭력에 관한 상담을 하게 되었고, 뒤이어 가정폭력상담소(지금의 가족상담소)를 개소했다. 김영선 목사가 소장을 맡았다. 상담소는 쉼터 가족(쉼터에서 생활하는 노숙인을 가족이라 부른다)은 물론 일반 가정 내 폭력 문제로도 상담을 펼쳤다. 김 목사는 "이혼 등 극단적인 상황까지 가서야 상담소 문을 두드리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그래도 상담을 하면서 다시 새롭게 가정을 꾸려가기로 마음먹는 부부들이 제법 많다"고 했다.
 
쉼터 가족들은 먹을 걱정, 잠자리 걱정을 해소하고 나면 자연스럽게 직장 문제로 고민한다. 이번에도 이 목사의 수완이 필요했다. 해인교회 교인들의 일자리를 해결한 업적(?)까지 있어 주변에서도 기대하는 눈치였다.
 
우선 남자들은 일용직 막노동판에 나갔고, 여성들은 정부에서 마련한 공공 근로 일자리를 찾아갔다. 하지만 이런 일에는 한계가 분명했다. 막노동판은 비가 많이 오는 여름이나 한 겨울에는 쉬니까 일하는 사람들이 늘 불안해했다. 공공 근로를 나간 여성들은 쉼터 출신이라는 것이 알려지면 눈총을 받기도 하고 "얼굴은 반반한데 어쩌다가 그렇게 되었느냐"는 걱정 섞인 언어폭력까지 당할 때도 있었다.
 
이들에게 안정적인 일자리를 직접 만들어 보자 싶었다. 그래서 구청의 협조를 얻어 재활용 센터를 만들었다. 남들이 쓰다 버린 가구나 가전제품을 수리해서 되파는 가게다. 이외에도 피자 가게, 떡볶이 포장마차, 붕어빵 장사 등 웬만한 일거리는 다 만들었다. 그때마다 이 목사는 붕어빵 등 식재료를 배달했고, 교회들마다 돌며 가전제품 등 재활용 용품을 모아 왔다. 기본적인 거래처를 확보해야 했고, 재활용품을 수리할 수 있는 부품을 어디서 구입해야 하는지 정도는 꿰고 있어야 일이 돌아간다.
 
2005년에는 도시의 소비와 농촌의 생산을 연결해서 일자리를 창출하는 도농직거래상생사업단을 꾸렸다. 시골 교회 등에서 태양초 고추나 유기농 감자 등 팔아 달라는 선후배 목회자들의 부탁을 받고 노숙자들이 그 판매를 담당하는 사업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렇게 시작한 도농직거래상생사업단은 망할 뻔한 위기도 겪었지만, 지금은 사회적 기업 도농살림으로 전환하여 기적을 만들어 내고 있다.
 
실패가 더 자연스러웠던 길
 
끊임없이 일을 만들어 내고 노숙인들의 쉼터와 일터를 마련하느라 10여 년이 흘렀다. 사람들은 지금도 노숙인이 있느냐는 눈빛으로 이 목사의 활동을 바라본다. IMF 직후 공감해 주던 이들도 지금은 관심이 많이 줄었다는 것을 체감한다고 한다.
 
2011년에는 도농살림의 사회적 일자리에 지원하던 정부 지원이 기한이 되어 끊기게 되었다. 함께 일하는 일꾼 30명의 생존을 놓고 길고 긴 토론을 벌였다. 쉼터 식구들 중에 지원이 없어도 남겠다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고 한다. 이 목사는 도농사업단을 살리는 일뿐만 아니라 쉼터 식구들의 취직을 위해 이중으로 고군분투해야 했고, 쉼터 식구들은 대부분 다른 일자리를 찾아 떠났다.
 
노숙인들의 취업을 돕기 위해 취업 센터가 문을 열었다. "함께 일할 때는 80~90만 원 정도를 받았는데, 새로 들어간 직장에서는 더 많은 월급을 받고 일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위기였지만 노숙인들에게는 기쁜 일이었습니다. 저희 노숙인 취업 센터는 연 평균 97%의 취업률을 자랑합니다."
 
그렇지만 한 청년이 마음에 걸렸다. 가벼운 지적 장애가 있었다. 일상생활에 지장은 없지만 일자리 구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지금까지도 도농살림에서 잔심부름을 하며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도농살림이 없어지면 이 청년의 일자리도 잃게 되는 것이었다. 이번에는 내일을여는집 복지사들이 나섰다. 자신들의 급여에서 3% 정도씩 떼서 부족한 급여를 채우기로 하고 도농살림을 유지하기로 한 것이다. 사실 도농살림에는 이 친구 외에도 관리직, 배달직까지 최소 2명이 필요했다. 그렇게 한 해 한 해 버티면서 새로 판매 전략을 짜고 영업을 펼쳤다. 그리고, 2013년 올해는 설 특별 판매에서 17000만 원어치를 팔아 목표한 매출액보다 두 배가 넘는 성과를 올렸다.
 
▲해인교회 교인들과 내일을여는집 활동가들이 인천 만석동 쪽방촌에 연탄을 배달하고 있다. (사진제공 해인교회)
가족 되려면 술 끊으세요
 
지금도 내일을여는집 남성 쉼터에는 35, 여성 쉼터에는 10명이 생활하고 있다. 남성 쉼터는 4, 여성 쉼터는 3명의 활동가가 함께 생활하며 가족들을 돕는다. 쉼터는 아침 6시부터 북적거리기 시작한다. 이 많은 사람이 아침에 씻고 밥을 먹으려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삶의 나락에 빠지면 나태해지기 쉬운데, 그러지 않기 위해서라도 아침부터 부지런할 필요가 있었다.
 
또 쉼터 생활을 하면 술을 먹어선 안 된다. 이 목사는 술을 먹는 게 죄라고 여기는 종교적인 이유 때문에 금주 원칙을 세운 건 아니라고 말했다. 고단한 삶을 술에 의지하면서 자기 관리 능력을 쉽게 상실하는 위험을 방지하려는 것이다. 다른 조건에 있는 이들보다 훨씬 민감한 상황이라서 엄격한 규율을 적용했다. 또 한 사람이 술을 먹고 삶이 흐트러지면 전체 30여 명에 미치는 영향이 크기 때문에라도 금주는 처음부터 엄격하게 지키고 있다.
 
쉼터에서 안정적으로 생활하면서 자기 삶의 기틀을 마련한 사람들에게는 구청과 함께하는 심사를 거쳐 따로 보금자리를 마련해 준다. 주택공사의 지원을 받아 원룸형 아파트 18채를 확보했다. 일터에서 꾸준히 일하면서 300만 원 정도를 저금하고 있으면 입주 기준을 통과할 수 있다. 심사를 통과해 17가정이 새 보금자리에서 새 삶을 열어가고 있다.
 
"당신이 도운 게 아니라 우리가 당신을 키웠다"
 
내일을여는집이 펼치는 일이 항상 성공의 길만 달려온 것은 아니다. 도농살림은 한동안 적자에 허덕였고, 여성 노숙인들이 운영하는 식당도 6년 전 문을 연 뒤 세 번이나 개업과 폐업을 반복했다. 정부나 기업의 도움으로 커 가다가도 아직 자립하지 못했을 때 지원이 끊기면 낭패를 보기도 한다. 무엇보다 불안한 노숙인들의 정황 때문에 어려움도 여러 차례 겪었다. 비교적 잘 지내다가도 술을 입에 대기 시작하면서 다시 나락으로 떨어진 가족도 있었고, 애면글면 적금한 돈을 하룻밤에 다 탕진한 사람도 있었다.
 
그렇지만 이 목사는 주저앉아 탄식할 시간조차 아깝다고 했다. 이 목사는 해인교회에 부임했을 때부터 20년간 일중독에 빠진 것처럼 뛰어다녔다. 지금도 또 무슨 활동을 펼칠 궁리를 하는 중이다. 그동안 내일을여는집에서 펼쳤던 사업들을 사회적 기업으로 전환하는 일도 이 목사 몫이다.
 
전세로 이집 저집 옮겨 다닌 시설들에 계약 문제가 생기면 이 목사가 나서서 풀어야 한다. 처음에는 좋은 일이니 편하게 쓰시라고 말했던 집주인도 자기 사정이 달라지면 당장 다음 달에 방을 빼라고 나오는 일도 여러 번 겪었다. 수십 명이나 되는 가족들이 살 집을 그것도 한 달 안에 구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설령 그런 집이 있다손 치더라도 노숙인이 모여 산다고 하면 쉽게 방을 내주려 하지 않는다. 그때마다 이 목사는 어떻게든 안 되는 일도 되게 하는 뭔가를 보여 주었다. 이 목사는 하나님의 발길에 채여 여기까지 왔다고 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요, 섭리였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해인교회의 선교 활동이 교단에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이 목사는 2004년 교단의 사회 선교 그룹의 추천으로 교단에 들어가 사회복지 분야의 실무 책임자가 되었다. 교회법상 불가피하게 해인교회의 담임목사 자리를 놓아야 했다. 공동 사역을 해 온 아내 김 목사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 목사 부부는 활동 초기부터 협동 목회를 하고, 활동도 나눠서 펼쳐 왔다. 첫 사역 때부터 교회 안에서 사모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았다. 시민사회연대나 대외 협력의 분야와 더불어 노숙인 쉼터 전체 살림을 이 목사가 맡으면, 김 목사는 교육과 상담을 중심으로 여성 쉼터와 가정폭력상담소를 운영하는 식이었다. 그러다가 이 목사가 교단 일까지 맡게 되면서부터 아예 김 목사가 해인교회 담임이 되어 목회 전반을 책임졌다. 이 목사가 교회 조직이나 내일을여는집 등의 재정 모금와 직원 관리 등을 책임졌다면, 김 목사는 심방과 제자 훈련이나 사역 훈련 등 내적인 체계를 강화해 냈다. 이 목사는 자신이 목회할 때보다 훨씬 따뜻하고 건강한 교회, 그리고 성장하는 교회로 변모했다고 추어올렸다.
 
▲해인교회와 내일을여는집이 왕성한 활동을 펼칠 수 있었던 근간에는 김영선, 이준모 목사 부부가 협력 목회를 해왔기 때문이다. 이러한 활동 덕분에 이 부부는 인천시로부터 '양성 평등한 사회 조성 모범 부부'로 표창을 받았다. 사진은 두 목사가 주일 예배를 집례하는 모습. (사진제공 해인교회)
이러한 활동 덕분에 이 부부는 10년 전 인천시로부터 '양성 평등한 사회 조성 모범 부부'로 표창까지 받았다. 부부만 양성 평등한 삶을 추구하는 게 아니라 노숙인 교육에도 반드시 양성 평등에 관한 내용을 넣는다. 여성 노숙인 쉼터 시설장인 이금옥 장로, 쪽방삼담소 소장인 박종숙 집사, 가족상담소 소장인 김보라 집사, 시니어클럽 관장인 엄경아 집사, 여성 쉼터 시설장인 김영숙 전도사를 비롯해 주요 활동가들은 여성이 더 많은 비율을 차지한다. 해인교회의 수석 장로도 여성이고, 각 기관장 대다수도 여성이 맡고 있다. 이 목사는 "양성 평등을 넘어 오히려 남성의 적극적인 참여를 독려해야 하는 상황이다"고 말했다. 이 목사는 모두 "여성들이 교회 안팎의 사역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양성이 평등한 삶을 지향하는 덕택에 교회도 내일을여는집도 안정적으로 사역을 펼칠 수 있다"고 말한다.
 
최근 몇 년 전부터 김이 목사는 '영성'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노숙인 쉼터에서 생활하던 식구들이 자립해 나갔다가 또 다시 음주 문제나 자기관리 실패로 거리에서 한뎃잠을 자거나 쉼터로 다시 돌아오는 예가 심심치 않게 벌어진다. 함께 일하는 일꾼들도 '번 아웃'되는 예가 왕왕 생겼다. 비록 쉼터에서 어느 정도 수련을 받았지만, 세상에 다시 적응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또 활동가들이 소명 의식을 품고 일을 해도 노숙인들과 꾸준히 만나가는 일은 거칠고 어려운 일이다. 노숙인들이 쉼터 밖에서도 제대로 사회에 적응하고, 함께 일하는 활동가들이 힘을 소진하지 않고 꾸준히 활동하는 방안을 고민하면서 영성으로 눈을 돌렸다.
 
일상에서 쉽게 흔들리지 않는 신앙인이 되도록 꾸준히 경견 생활을 하며 깊게 성찰하는 삶을 살도록 수련하고, 또 일하는 이들이 함께 품을 비전을 세워나가는 일을 시급한 과제로 품었다. 우선 수요 예배를 찬양 예배로, 목요 기도회를 치유를 중심으로 한 기도회로 이끌어 나가고 있다. 이 목사는 교회와 내일을여는집의 공동 비전을 짜고, 사업 내용을 좀 더 영성적 공동체로 만들어 나가는 일에 집중하고 있다. 김 목사가 제자 훈련과 사역 훈련 등을 비롯한 상담과 교육을 통해 일꾼을 세워 나가고 치유 목회를 강화해 나가고 있다.
 
해인교회와 내일을여는집 이야기를 들으면 '아낌없이 주는 나무' 같다는 생각이 든다. 뭔가를 늘 베푸는 위치에 있는 사람, 선하고 멋있는 사람이기에 그는 위험한 사람이다. 이 목사는 자만에 빠지지 않게 해 주는 가슴 아픈 만남이 있다고 했다. 내일을여는집 초기부터 함께했던 노숙인. 그의 변화와 성숙, 활동이 내일을여는집의 자랑이었다. 이렇게 바뀔 수 있다고 내세우는 성공 케이스였다. 그런 그가 어느 날 술에 가득 취해 이 목사를 찾아왔다. "당신이 우리를 도와준 거라 착각하지 마라. 우리가 당신을 유명하게 만들어 줬다." 그는 술기운을 빌려 이 말을 남기고 떠났다. 이 목사는 그의 말이 꼭 틀린 이야기는 아니라고 했다. 자신을 겸손하게, 교만하지 않게 해 주는 하나님 말씀으로 받는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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