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전 미문 앞의 기적 이야기. 모두 다 오늘 본문의 사건을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들이 이 이야기를 너무 많이 들었기 때문에 성전 미문에서 일어났던, 전대미문의 사건이 이제 너무 많이 들어서 질릴 정도가 되어서 읽어도 아무런 감흥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맞습니다, 맞고요. 그런 생각 하나도 그른 데가 없습니다. 그 정도로 우리는 이 본문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 한번 본문을 살펴볼까요? 6절입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개역 개정)."

이 말속에 궁금한 점이 하나 있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라는 말을 베드로는 왜 했을까요? 왜 굳이 그런 말을 했을까요, 은과 금이 없는 것이 뭐 그리 자랑이라고!

굳이 그런 말을 할 필요 없이 그냥 바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걸어라, 할 수도 있을 텐데 왜 그 말을 먼저 했을까요?

그런데 이 의문의 해답은 너무 간단합니다. 베드로가 그 말을 하지 않을 수밖에 없던 이유가 무엇이냐? 3절로부터 5절을 봅시다.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 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베드로가 요한으로 더불어 주목하여 가로되 우리를 보라 하니 그가 저희에게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표준새번역에 보면 더 확실하게 나타납니다.

"그는,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으로 들어가려는 것을 보고, 구걸을 하였다. 그 못 걷는 사람은 무엇을 얻으려니 하고, 두 사람을 빤히 쳐다보았다."

바로 그 걸인이 은과 금 즉 돈을 얻기 원했기 때문입니다. 그 걸인이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 성경은 기록하기를 '무엇을 얻으려니', '무엇을 얻을까 하여'라고 표현합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무엇'은 바로 금과 은입니다. 그것을 알고 있는 베드로이기에 당신이 원하는 돈은 나에게 없다고 먼저 말을 한 것입니다.

따라서 베드로가 말하는바, '은과 금은 없거니와'라는 말 앞에 이런 말이 들어가야 합니다. '(당신이 원하는) 은과 금은 없지만.' 그런데 여기에서 베드로와 요한이 자기들에게 은과 금이 없다고 말한 것은 사실일까요? 아니면 예수님의 이름을 금은과 대비하여 더욱 돋보이게 하려고 하는 수사적 표현일까요?

베드로가 한 말, 은과 금은 내게 없다는 말은 다른 말로 바꾸면 돈이 없다는 말입니다. 나는 돈은 없다, 돈은 한 푼도 없다. 다시 말하면 요즈음 흔히 쓰는 말로 돈은 한 번 보고 죽으려도 없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사실입니다. 베드로는 돈이 없었습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사셨고 또한 제자들에게도 그렇게 살 것을 강조하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잠깐 다른 상상을 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 그때 베드로와 요한에게 돈이 있었더라면 어떻게 했을까요? 그때 정말로 돈이 없었으니까 돈을 못 주고 그 대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어쩌고 한 것은 아닐까요?

돈이 있었더라면, 베드로는 걸인에게 가지고 있던 돈을 주었을까요? 저는 그렇지 않았으리라 생각합니다. 설령 수중에 돈이 있다 할지라도 그는 돈 대신에 '예수님'을 주었을 것입니다. 베드로가 그렇게 했으리라 생각하는 데 이유가 있습니다.

1절부터 다시 한 번 읽어 볼까요.

"제 구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 새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 가려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베드로가 요한으로 더불어 주목하여 가로되 우리를 보라 하니."

성전으로 들어가려던 요한과 베드로는 문 앞에 앉아 있는 걸인을 만나게 됩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오후 세 시 기도 시간에 성전으로 올라갑니다. 유대인들의 경건한 풍습은 하루 세 번씩 기도하는 것이었는데, 시편 55편 17절과 다니엘 6장 10절을 보면, 다윗과 다니엘이 하루에 세 번, 저녁과 아침과 정오에 기도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 2절에 보면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게 하려고"라고 기록한 것을 보아 그 시간에 많은 사람이 성전에 가서 기도했던 모양으로, 성전은 걸인에게 아주 목이 좋은 영업 장소였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베드로와 요한은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냥 스쳐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가로되"라고 표현해 놓아 그 걸인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지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특별한 관심을 가지려면, 먼저 베드로와 요한이 거기에 걸인이 앉아 있다는 것을 알아채야 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길을 가는 중에 걸인 등 불쌍한 사람이 눈에 띄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도 그런 사람에게 말을 붙이는 경우가 흔하지 않거든요. 설령 그러한 사람들이 우리 바로 앞에, 보이는 곳에 있다 하더라도 아무런 생각 없이 무심하게 지나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걸인 앞을 아무런 생각 없이 지나가며 전혀 주목하지 않는 사람과는 달리 베드로와 요한은 그 사람을 주목하여 보았다는 말입니다. 그날 그 시간에 성전 미문을 많은 사람이 지나갔지만 그 걸인에게 관심을 가지고 주목을 한 사람도 몇 안 되었겠고 더군다나 말을 붙인 사람은 몇 명 되지 않을 것입니다. 요한과 베드로가 바로 그런 몇 안 되는 사람들 중에 속합니다. 주목하여 본 다음에 그 걸인에게 '우리를 보시오'라고 말을 건넵니다.

이상이 베드로와 요한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외형적인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베드로가 보여 준 외형적 행동은 그렇다 하고, 그의 속마음은 어떨까요? 사람이 밖으로 어떤 행동을 하는 것은 그냥 저절로 되는 게 아닙니다. 사람이 밖으로 어떤 행동을 하기 위해서는 물론 무의식적인 행동도 있긴 하지만, 그런 일을 하게끔 만드는 어떤 마음이 필요합니다.

우리 모두 다 마찬가지이니 하는 말이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에게는 어디 말 한마디 따뜻하게 합니까? 그저 형식적으로 지나가는 말이나 몇 마디 하고 그냥 스쳐 지나가지 않습니까? 더구나 상대방이 나보다 못한 사람, 별 볼일 없는 사람이라면 굳이 말을 건네고 주고받고 할 필요가 없지요. 어떤 사람에게 따뜻한 말을 건네기 위해서는 분명 따뜻한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더군다나 그 상대방이 걸인인 경우에는 더 특별한 마음이 필요합니다.

'아유! 이렇게 성전 앞에 누가 걸인을 데려다 놓았지? 기도하러 오는 사람들에게 혐오감을 주잖아! 사람들이 싫어할 텐데' 하는 생각을 많은 사람들이 했을 것이고 아니면 그냥 돈만 몇 푼 던져 주고는 곧바로 성전 안으로 들어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의 마음속에 들어간 생각은 보통 사람들과는 달랐습니다.

그 걸인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불쌍하다며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들었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에게서 불쌍한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시는 마음을 배웠습니다.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막 6:34)."

그러한 예수님의 마음이 가득하니, 예수님의 마음으로 행동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사실 하나는, 베드로에게 이 미문 앞에서의 사건은 그저 남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자선을 베풀어 준 사건으로 끝나는 일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성전 미문에서 일어나 사건은 물론 앉아 구걸하던 걸인에게도 큰 사건이었겠지만, 베드로에게도 일생일대의 큰 사건이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그가 예수님을 만나고 그래서 그의 인생이 변한 것을 비로소 걸인을 보고 그는 확인할 수 있었고 또한, 그것을 밖으로 내보임으로서 기적이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럼,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나고 그래서 그의 인생이 변한 것을 살펴볼까요? 그의 생각보다는 그가 무엇을 가지고 있는가를 기준으로 해서 그의 변한 모습을 살펴봅시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날 때 그는 어부였습니다(마 5:18~20, 막 1:16~18). 그런데 누가복음 5장 3절에 보면 이렇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여기에서 말하는 시몬이 바로 베드로입니다. 그러니 베드로는 배를 하나 가지고 있었으니 배를 가지고 있던 선주입니다. 또한, 그의 배는 조그만 배가 아니라 제법 큰 배였는데 그것을 알 수 있는 힌트는 누가복음 5장 4절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시기를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베드로가 가진 배는 얕은 물가에서만 고기를 잡을 수 있는 조그만 배가 아니라, 깊은 데까지 가서 고기를 잡을 수 있는 큰 배였던 것입니다.

또한, 그가 고용 어부가 아니라는 사실은 누가복음 5장 10절에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라는 말이 있는 것으로 보아 고용되어 남의 배에서 일하는 일꾼 어부가 아니라 자기 일을 하는 어부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그렇게 아주 가난뱅이는 아니라는 결론입니다. 물론 그 지역 갈릴리 지역이 못사는 계층이 사는 곳이기는 하지만, 베드로는 자기 배를 가질 정도의 재산을 가지고 세상의 것을 위하여 열심히 일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그를 불러 사람 낚는 어부가 되라고 하셨을 때 그는 제법 가진 것이 있는, 다시 말하면 버리기에는 아까운 재산이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세상 재물을 두고, 버리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그런 결과 그는 어떻게 되었는가? 그래서 베드로와 요한은 오늘 본문에서 사건이 일어나는 미문 앞에 섰을 때 정말 돈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 과정을 아주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성경 구절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19장 23절 이하에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부자는 천국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말씀하시면서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말씀을 듣던 베드로가 묻습니다.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마 19:27)."

이 말속에 나타난 것처럼, 베드로는 세상에서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버린 대신, 예수님으로부터 무언가를 얻으려고 애를 쓰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베드로는 이 세상 그 무엇과는 다른 무언가 예수님으로부터 얻으려고 애를 썼는데 그 결과, 지금은 무엇을 가지고 있느냐? 그 대답이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걸인에게 한 말 속에 들어 있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내 안에 있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이라고 그는 큰소리 높여 예수님이 자기 마음속에 있다고 간증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베드로는 사람이 바뀐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미문 앞에서 걸인을 만남으로 해서 그는 그의 인생에서 가장 우선적으로 가져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 어떤 것보다도 예수의 이름이 더 소중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저는 그게 바로 사람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큰 기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런 기적을 내부적으로 경험한 베드로이니 지금 눈앞에서, 무언가 돈을 얻기를 갈구하는 그 사람의 모습을 보고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저런 없어질 은과 금을 추구하면서 살아가던 모습이 바로 나의 모습이 아니었던가?'

그래서 그는 성전 미문 앞에 앉아 있는 그 걸인이 찾고 바라는 그 무엇을 자기가 예수님에게 질문한 바로 그것,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에 대한 해답으로 얻은 것, 나에게 있는 것, 바로 예수의 이름, 그 이름을 걸인에게 주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설령 돈이 있었다 할지라도 돈 대신에, 아니 백 보 양보하더라도 돈과 함께 예수의 이름을 주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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