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대에서 시작해 연세대 서울대 이화여대로 확산된 대학 친일청산운동은 언론의 집중적인 관심에도 실질적 성과를 얻지 못하고 있다. 이들 학교 중 고려대만 총학생회가 추진하고, 다른 세 학교는 민주노동당 학생회나 단대학생회에서 이끌고 있어 학내에서 조차도 힘을 받지 못하는 상황이다.

각 학교 친일청산위원회는 김성수(고려대 설립자) 김활란(이대 초대총장) 백낙준(연세대 초대총장) 등을 친일인물로 고발했다. 그러나 학교 당국은 침묵으로 일관하고 학생들의 호응도 기대에 못 미치고 있다. 이들 친일인물의 인맥은 대학뿐 아니라 사회에서도 만만치 않은 기득권을 형성하고 있다. 친일 인사와 관련된 '인적 청산' 없이 명분만으로 친일 청산을 이룩하는 것은 매우 힘겨워 보인다.

또 소수의 학생들이 대학 구성원들 간에 충분한 여론 수렴 없는 언론 플레이 위주의 행보 역시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한 이유다. 하지만 이들 학교보다 먼저 친일청산을 이뤄낸 덕성여대의 사례는 근본적인 대조를 이루고 있다.

덕성여대의 경우 학내 구성원들의 자발적인 힘으로 친일청산을 이뤄냈다. 1990년 이후 10여 년간 진행된 학원민주화 과정은 친일파 송금선의 아들과 손자로 이어지는 이른바 '박씨 일가'를 몰아내는 과정이다. 2000년 '덕성여대 뿌리찾기 대 토론회'를 통해 덕성여대의 설립자가 친일파 송금선이 아닌 민족지도자 차미리사 선생이라는 것을 대학 구성원들 모두가 공감하게 되고 부터 학원민주화 운동은 친일청산작업으로 승화됐다.

▲ 덕성여자대학교는 지금도 학원민주화와 친일청산을 위한 싸움을 계속하고 있다. ⓒ뉴스앤조이 김동언
친일청산과 학원민주화 운동은 '박씨 일가'가 덕성여대를 사유화하고, 이른바 '동토의 왕국'으로 불릴 정도로 전횡과 비리를 일삼아 온 것이 발단이 됐다. 1997년에는 이사장이 △대학행정에 사전지침을 내리거나 사전결재 사후보고를 받는 등 학사간섭을 자행하고 △교원승진시 이사장이 사전에 승진대상자를 결정하여 소수인원만 승진시키고 △결산잔액을 다음연도에 이월 사용하지 않고 대학 특별사업 적립금 명목으로 83년부터 96년까지 312억 원을 조성한 것 등이 감사를 통해 드러나기도 했다.

교수협의회와 총학생회, 동문회, 직장 노조는 재단 측과 오랜 싸움을 벌인 끝에 이사장과 재단 측 인사 퇴진을 이뤄냈다. 그후 관선이사가 교육부에서 파견되어 지금까지 오고 있다. 올 해는 관선이사 임기가 끝나고 정이사체제로 돌아가기 위해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 중이다.

덕성여대의 사례가 반증하듯, 대학 친일청산은 인적청산 없이는 불가능하다. 또 교수와 학생, 동문 등 대학 구성원들의 포괄적 참여는 절실히 필요하다. 최근 '친일청산 운동본부'가 지역별로 결성된 것을 감안하면 대학 친일청산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이들의 노력이 또 다시 좌절로 끝나지 않으려면 대학 구성원들의 지지와 자발적인 참여가 절실하다.

덕성여대 초대 설립자, 차미리사 선생의 민족의식

차미리사(1880~1955) 선생은 1940년 조선총독부의 압력으로 덕성여자실업학교 교장에서 물러나기까지 1920-30년대 여성운동, 교육운동, 민족운동을 이끈 민족지도자였다.

3·1운동 이후 차미리사 선생은 배화여학교 교사직을 그만 두고 '조선여자교육회'를 만들어 종교교회에(후에 새문안교회) '여자야학강습소'를 설치, 여성을 대상으로 문맹퇴치와 계몽운동을 실시했다. 조선여자교육회는 80여 일간 전국순회강연을 돌면서 근대적 교육을 통해 남존여비의 봉건사회를 개조하여 남녀평등의 사회를 실현시키자고 역설했다. 조선여자교육회는 강연에서 모은 성금으로 청진동에 사옥을 마련하고 덕성여대의 전신인 근화학원을 설립했다.

근화라는 이름은 무궁화라는 뜻으로 근화학원은 순수 민족자본으로 세운 유일한 학교였다. 차미리사 선생은 근화학원을 근화여학교, 근화여자실업학교로 확대·발전시키고, 강연회 음학회 연극회 바자회 등을 열어 수익금으로 학교운영비를 마련하였다.

차미리사는 1930년 광주학생운동에 참여한 근화여학교 학생들을 한 명도 처벌하지 않았다. 그는 교정에 무궁화를 심어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교장으로서 일본어를 상용하지 않은 것이 조선총독부를 거스르게 되어 학교명을 덕성여실로 개명하고, 1940년 끝내 친일파 송금선에게 교장직을 물려주게 된다.

그 후 덕성여실은 1950년 덕성여자대학교로 설립인가를 받았다. 이후 송금선의 아들과 손자로 이어지는 이른바 박씨 일가가 족벌운영을 해오다가 1997년 전횡과 비리가 드러나 총학생회·교수협의회·직원노조 등의 반발로 박원국 이사장이 물러나고, 학교는 현재 관선이사체제로 운영되고 있다.

차미리사 선생은 2002년 8월15일 독립유공자로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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