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35:1~7)

금년도 추수감사 절기를 보내면서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베풀어 주신 그 은혜를 감사하면서 이제 마지막 달력의 한 장을 남겨놓고서 한해를 정리하는 새로운 경계선에 서 있습니다. 우리 신앙의 삶에서 문제가 야기될 때, 위기가 닥쳐올 때마다 어디서 매듭이 맺혀진 것인지 찾아보아야 하겠습니다.

즉,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행위에 있어서 결격사유가 무엇인지 원인 분석을 철저히 해보자는 것입니다. 야곱은 그의 생애에서 위기에 직면했을 때마다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고 하였습니다. 왜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고 했는지 그 이유를 살펴보고, 우리도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 거기서 우리들의 근본 문제를 해결을 보아야 하겠습니다.

야곱은 형 '에서'에게서 장자의 명분을 간교한 속임수로 탈취하고 축복을 가로채었습니다. 여기서부터 아브라함은 축복 정통적 계승권 때문에 야곱과 에서 사이에 숨 막히는 암투와 원한이 문제의 발단이 됩니다. 에서는 축복을 빼앗겨서 비탄에 잠기고, 그래서 야곱을 죽이려고 했고, 야곱은 겁에 질려 망명자일 뿐 아니라, 황야를 유리하는 유랑인이 되고 고달픈 방랑자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된 것은 야곱의 어머니 리브가의 권유로 형 에서의 노기가 풀리기까지, 하란의 외삼촌 라반 집에 가서 잠시 피하라는 것이 20년이란 장구한 세월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야곱은 그의 조부 아브라함의 숭고한 인격자도 아니며, 그의 아버지 이삭처럼 온유한 인내의 인물도 아니었습니다. 다만 교활하고 거짓말로 임기응변하는 많은 단점을 가진 인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행위에 대한 철저한 대가를 지불하면서, 여호와 하나님께 그의 확고한 신앙으로 파란만장한 일생을 보내지만, 끝까지 선민의 조상으로서 승리하는 삶을 보냈습니다.

허나 이런 삶을 위해서 집을 떠나 하란,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피해 가는 중에, 벧엘의 꿈(Vision)을 보게 됩니다(28:10-22). 땅과 하늘을 연결하는 사닥다리가 있었고, 그 위에 하나님의 사자들이 있었으며, 그의 미래를 보장하는 축복을 확약하는 귀중한 하나님의 계시를 받게 됩니다. 이 '사닥다리'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 되시는 그리스도의 그림자로 해석됩니다.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은 하나님과 영교(靈交)하는 것을 말합니다. 야곱에게 내린 축복은 가나안 땅의 약속, 자손의 번영, 그의 자손으로 만민이 복을 받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벧엘의 꿈(Vision)을 꾸고 난 야곱은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고 하였습니다. 거기는 초장도, 오아시스도, 그늘진 골자기도 아닌 자기 마음 같이 적막한 불모의 산꼭대기, 실로 하나님이 나타날 만한 곳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도망꾼이라 기쁨보다 하나님 임재에 대한 두려움이 더 컸습니다. 그가 베개하고 누울 때는 간교한 처세술로 아득한 고향은 그립기만 해 다시 귀향의 가능성이 열릴지 의심스럽기만 했습니다.

'벧엘' 산꼭대기에서 멀리 보이는 광막한 세상과 하늘에서 반짝이는 무수한 별들을 쳐다보고, 보잘것없는 자기 신세를 생각하니 그 초췌한 모습이 가엽기만 했습니다. 그러나 야곱의 가슴에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무엇이 아직도 남아있었습니다.(28:10~15) 그는 받은 유업을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을 위대하게 만든 것은 하나님을 믿고 순종한 조부의 신앙인 줄 알았습니다. 죄 많은 자기도 그런 심정이 부러웠습니다. 이와 같은 경험은 야곱을  평생 지배한 큰 감격의 순간이었으며, 신앙이 독립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야곱은 이제 자신의 하나님을 체험한 큰 감격이 야곱의 일생을 인도했고, 또 승리케 했던 것입니다.

야곱은 하란의 외삼촌 라반 딸들 중 라헬을 사랑했으나(당시 풍습 상 맏딸부터) 레아, 라헬을 위해서 14년 목자 노릇을 했고, 치부키 위해서(품삯) 6년의 세월을 보내고 도합 20년 만에 귀향길에 오릅니다. 야곱이 가나안 땅에 귀향하는데 가장 큰 난제는 형 에서를 만나는 일이었습니다. 에서는 400명을 거느리고(강력한 추장인 것을 과시, 적의를 품고 복수하기 위해서) 마중 나온다는 전갈을 받습니다. 중대한 위기를 맞은 야곱은 자기 부대를 2대로 나누어 전방·후방(일단 유사시엔 도망칠 준비)에 배치를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면서, 형에게 드리는 예물을 준비해서(암 염소=200마리, 수염소=20, 암양=200, 수양=20, 약대, 소, 나귀 등등 선물=이는 형의 원한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그 다음 염소, 양, 약대, 소 등 떼를 지어 일정한 간격을 두고 에서를 향해 보내며, 떼마다 야곱이 ‘에서’에게 보내는 예물이요, 야곱은 뒤따라온다는 것을 말하게끔 했습니다. 그 다음은 여종들과 그 자녀들, 레아와 그 자녀들, 그리고 라헬과 요셉, 야곱 자신 이런 순서로 7번 절하니 에서가 달려와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33:4).

용서를 가로막는 것은 피해자가 용서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보다, 가해자가 용서받을 준비가 못된 데에도 문제가 있다는 교훈을 볼 수 있습니다. 야곱은 얍복강 나루터 밤중의 천사와 씨름했다는 것을(32:22~32) 좀 더 해석을 한다면 야곱이 하나님께 간곡하게 기도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형을 맞는 생의 최대의 위기에 직면한 야곱은 한편으로 인간적인 모든 수단을 강구해 보았지만 불안한 마음을 가눌 길 없어서, 하나님께 기도를 하였던 것입니다.

두려운 에서도 아니요, 사나운 사람도 아닙니다. 전능하신 정의의 하나님이 야곱의 거짓된 삶에 대한 청산을 강요하신 것입니다. 지금까지 야곱의 일생은 성공같이 보입니다. 교활한 수단, 방법으로 형 에서도, 아버지 이삭도, 외삼촌 라반도 속여서 성공적인 삶이라 할  인생길이었습니다. 많은 재산과 많은 처자를 거느린 금의환향, 그의 외관을 보아서는 성공이라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의 양심은 죄로 얼룩진 세계를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천사와 씨름했다는 의미는 야곱의 과거 그릇된 방법으로 살던 자신과의 씨름을 하나님이 시킨 것이었습니다. 기도하면서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존하면서, 자기 마음 자기 삶 자체, 행위, 인생관, 가치관 등의 잘못을 깨달으면서 기도하는 것이 바른 기도의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새로운 삶을 살겠다는 자기 결단이 기도입니다. 그래서 야곱의 씨름은 과거의 삶에서 이탈하겠다는 씨름이었습니다. 새 사람이 되겠다는 자아탄생의 각고의 아픔이었습니다.

환언하면, 야곱의 씨름은 결국 옛 사람의 옷을 벗고, 새 사람의 옷을 입으려는, 자기와의 투쟁이었던 것입니다. 천사가 야곱의 '환도 뼈'를 쳐서 위골(違骨)되었다는 것은 야곱이 믿고 살아본 그의 인간적인 처세술, 지략, 능력을 하나님이 치신 것입니다. 이곳이 ‘벧엘’(하나님의 집)입니다. 외국인이 쓴 본문 해석에 이런 재미나는 이야기를 첨가했습니다. 바닷가 어촌에 사는 오막살이집 주인이 저녁에 집에 돌아오자 부부간 다음과 같은 문답이 벌어졌습니다.

부인: "새로 온 목사님이 찾아와서 대답 못할 말을 묻습디다."
남편: "무어라고?"
부인: "여기 예수님이 사시느냐고요."
남편: "그래, 뭐랬수?"
부인: "뭐랄지 몰라서…."
남편: "왜 우리도 점잖은 사람들이라지!"
부인: "그 말이 아닌걸요."
남편: "우리도 생각나면 예배당에 간다 하지."
부인: "그 말도 아니라니까."
남편: "그럼 우리도 이따금 기도하고 성경 읽는다고 하지."
아내: "글세, 그런 말이 아니라 예수님이 여기 사시느냐 더라니까!"

우리는 예배당에서만 주님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집이 곧 예수님을 모신 곳이어야 하고 내 마음이 거룩한 성전이 되어야 합니다.

야곱이 세겜의 사건을 야기시킨 원인은 '하나님의 집이었던 벧엘'을 망각하고 세겜에서 세상 재미에 빠진 까닭이었습니다. 세겜은 예루살렘 북편 40㎞(100리), 사마리아 동남 쪽 8㎞(20리)지점에 있는 곳인데 현대 말로 하면 문명지역의 요새지였습니다. 세겜의 추장이 야곱의 딸(레아의 소생) 디나를 능욕한 사건과 야곱의 아들들이 복수로 세겜의 남자들을 죽이고, 부녀자와 재물을 약탈하는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이것은 야곱이 형 에서와 화해하고 곧 바로 벧엘로 직행하지 않고, 세겜에서 10년간을 산 것 때문에 문제가 발생한 것이었습니다.

딸 디나는 야곱이 하란에 지체한 지 14년째, 레아에게서 6아들과 딸 디나를 낳았습니다. 야곱은 사랑하는 아내 라헬을 얻기 위해 14년간 목자생활을 하고, 라헬을 아내로 얻었습니다. 디나는 야곱의 첫 부인인 레아의 마지막 고명딸이고, 하란에 산 지 14년째쯤 낳았고, 14년 이후 라헬을 얻어 요셉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외삼촌과 계약을 맺어 야곱이 치부키 위해 6년간 더 목자노릇을 하기로 했습니다. 하란 생활 20년 이후 귀향했으니, 디나의 나이는 그 때 나이가 6~7세였습니다.

그렇다면 디나가 세겜에서 능욕 당할 때는 16세 처녀 정도이었을 것이라고 볼 때, 야곱이 곧장 벧엘로 직행하지 않고, 세겜에서 10년간 살았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어찌되었든 야곱이 에서와 헤어진 뒤, 벧엘로 직행하여 그의 약속(28:10-22)을 이행하였더라면 세겜의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서원한 것, 약속한 것을 지키지 않아서 이런 디나의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을 암시하는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본문은 야곱이 파란만장한 인생 드라마를 연출하였고, 가나안 땅(약속의 땅)에 와서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고 말하고 있습니다. 특히 세겜의 실패가 있은 뒤, 야곱은 벧엘에 두 번째 올라가 이곳에서 꿈에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서원한 대로 단을 쌓았습니다. 옛날 형 에서를 피하여 갈 때 극히 어려운 상황에서 벧엘의 계시를 받습니다(28:10-22). 얍복강 나루에서 형 에서의 습격을 받았을 때 "하나님 신앙이 아니고는 저는 못 삽니다"면서 눈물 뿌려 회개한 고로 그의 위기를 극복했던 것입니다(32:22~32).

그러나 에서의 위기가 무사히 해결되었을 때, 야곱은 정신상태가 해이해져서 세겜에서 지나치게 지체(타성에 젖어)하다가 세겜의 큰 위기를 맞았습니다. 이때 야곱은 이런 위기에서 다시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고 했습니다. 이방 우상 숭배의 신상을 버릴 것, 야곱 자신은 여호와 신앙엔 철저했으나 자식들과 종들 중에서는 하나님께 철저한 신앙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을 정결케 하고(후일 세례 요한의 세례의 예표), 일상생활에서 더러워진 도덕적 부정을 벗을 것을 말합니다(계7:14).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낭패와 실망 당한 뒤 인생살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고 합니다. 지금까지 살아 온 삶을 재검토하고 처음 은혜 받은 그곳, 원점(초심)으로 돌아가는 대 결단. 자기반성과 회개가 하나님의 위로와 평강을 얻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저마다 꿈(Vision)을 먹고 삽니다. 꿈을 먹고 사는 사람일수록, 그의 삶이 때로는 비참할 정도의 고뇌가 따르고 고통의 연속일지 모르나, 고뇌를 통한 신앙의 환희는 무엇이라 형언할 수 없는 감격과 은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 지칠 때마다, 만사가 의욕이 없고 삶의 의욕을 잃었을 때, 세상이 허무할 때, 낙엽과 함께 떨어지는 내 마음속의 우수와 고독을 느낄 때마다 우리는 벧엘(하나님의 집)에 올라가서 하나님과 직면하여(Confrontation)야곱이 경험한 기도를 해야겠습니다. 새롭게 솟아오르는 희망의 새해를 맞이하여야 하겠습니다.

헬라어에 새롭다는 뜻을 나타내는 형용사 두개가 있습니다. '네오스라'는 말과 '카이노스'라는 말이 있습니다. 네오스는 시간적으로 새것, 즉 시간상 새로운 것을 의미합니다. 새해를 맞이했다는 것은 달력상 새해라고 부르고 시간적으로 새롭게 시작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렇지만 카이노스라는 말은 질적으로 또는 본질적으로 따라서 새것이라는 뜻입니다. 질(質)에 있어서 과거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 또 아주 딴 사람이 된 사람의 경우를 말하는 의미입니다. 야곱이 벧엘의 경험처럼 우리도 질적으로 변화된 모습으로 새해를 맞았으면 합니다.

천재화가 반 고호는 거짓의 와중에서 하나의 진실된 새것을 찾기 위해 그의 정신이 미칠 정도로 몸부림쳤고, 베토벤은 점점 귀가 멀어갈 즈음 그의 말년에 거의 귀가 들리지 않는 상태에서 자살 시도 뒤, 전혀 새로운 심포니 제3번 '영웅'이란 것이 탄생했고, 러시아의 대 문호 도스토예프스키는 28세 때에 반역죄로 연루되어 시베리아 영하 50도 선상의 형장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을 때, 황제의 특사령을 받고 살아나서 그 뒤 그때를 생각하며 쓴 그의  고백은, "현재 내 인생이 아무리 고달프고 괴롭더라도 시베리아 50도의 추운 날씨 속에서 형장의 기둥에 매였던 그 때를 생각한다면 지금 살아있는 이 한 가지만으로 감격스럽다는 삶에 대한 새사람으로 탄생했던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 대구 초원교회 양견 목사.

각자의 변경할 수 없는 저마다 다른 운명이, 교활하고 간교한 야곱처럼 잘못된 삶의 스타일이 하나님 앞에서 인생 일대의 자기와의 투쟁에서 새롭게 거듭나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이젠 초동(初冬)의 차가운 바람이 부는군요. 실로 부끄러웠던 그 욕망의 한해를 반성하면서, 후회화면서, 사죄를 빌면서, 저마다 내면의 세계의 개척과 그 확장의 길로 진정한 자유인이 되기 위해 분투, 노력합시다.

양견 목사 / 대구초원교회(homemaker.pck.or.kr/eornchdnj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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