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3~5, 요한복음 1: 4~13)

'참 빛'은 그리스도

성경에 '빛'이라는 말처럼 자주 나오는 이름씨는 많지 않습니다. 창세기의 앞머리에서부터 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수백 번에 걸쳐 널리 쓰고 있는 낱말입니다. 그렇지만 이 말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기란 그리 쉽지 않습니다. 널리 쓰고는 있지만 그 뜻이 한 갈래가 아니라 여러 갈래이기 때문입니다.

▲ '참 빛 곧 세상에 온' 빛은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그 빛은 생명의 본체인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정시춘

 오늘 읽은 성경 본문만 해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다"고 했을 때의 빛과,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라고 했을 때의 빛의 뜻이 꼭 같지 않습니다.

하늘과 땅의 창조를 이야기할 때 나오는 '빛'은 당연히 창조 질서와 관계되는 낱말입니다. 우주의 밝음과 어두움을 나누는 첫 구분 짓기를 알리고 있습니다. 빛이 없었다면 우리는 아무 것도 볼 수도 없고 그 어떤 것도 분별하여 알 수 없습니다. 빛 그 자체가 우리로 하여금 식별케 하고, 빛이 있어 비로소 우리가 식별합니다. 누구에게나 주어져 있는 식별 능력의 근거이며 기본입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온' 빛은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그 빛은 생명의 본체인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바로 이 생명의 본체가 사람들을 밝혀주는 빛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그러한 빛입니다. 빛이라는 말이 그리스도에 맞춰져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빛으로 표현했습니다.

여기서 말한 것은 보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밖에도 빛이라는 낱말을 여러 가지 다른 뜻으로 쓰고 있는 경우를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이 낱말의 뜻풀이에 들어가 여러 갈래로 가름하려 하지 않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서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살아야 하는지 '빛'이 주는 뜻을 함께 생각해보면 어떨까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빛으로 오신 '참 빛'과 떼어놓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눈이 본다는 것

고대 서양에서는 물체를 보고 분별하는 것을 오늘과는 다르게 풀이했다고 합니다. 오늘날에는 바깥 어떤 물체가 눈에 비취어 눈이 그것을 받아 보게 된다고 풀이합니다. 다른 말로 바깥 물체에서 나오는 빛이 접시 모양의 투명한 조직 막을 거쳐 눈알의 가장 안쪽에 자리한 거울망 곧, 시신경이 퍼져 있는 망막을 자극하여 빛을 알게 된다고 합니다. 바깥 물체가 주는 빛을 눈이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고대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늘의 광학과는 달리, 눈에서 어떤 빛이 나와 그 빛이 바깥 물체로 전달되어 가는 것이라고 이해했습니다.

눈에 대한 이해의 차이는 곧 인식론의 차이를 뜻합니다. 눈을 어떻게 이해했느냐에 따라 세상을 보고 이해하고 판단하고 분별하는 방식도 다르게 나타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기서 두 가지 인식론을 끌어낼 수 있습니다.

모든 물체가 인간의 눈에 비춰져 이해하게 된다는 근대 광학에 터한 인식론이 그 하나이고, 인간이 자기 눈의 빛을 밖으로 내보내어 바깥 물체를 알게 된다는 근대 이전 고대의 광학에 터한 인식론이 다른 하나입니다. 근대의 생각에 기대어 보면 우리가 무엇을 보고 이해한다는 것은 바깥 물체가 우리 눈에 들어와 비취는 것입니다. 고대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바깥 물체가 우리 눈에 들어와 비취게 되어 그 물체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눈이 바깥 물체로 빛을 보내어 그 물체를 보게 되고 또 이해하게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두 가지의 차이를 더욱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 좀 밀고 나가봅니다. 역설처럼 들리지만 근대의 인식론은 고대의 인식론보다 인간의 수동성을 더 강조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눈은 그저 밖에서 들어오는 물체의 영상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눈 자체가 무엇을 보고 어떻게 볼 것인지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는 이른바 '눈의 주체성'에 대해서는 근대의 광학이 별반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눈의 적극성을 무시하였습니다. 고대의 광학에서는 눈이 활기찬 기능을 행사하고 있었습니다.

절규를 볼 수 있는 '눈길'

그러나 고대와 근대로 나누어 극과 극으로 갈라놓는 것만이 능사는 아닐 듯 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보고 이해하게 되는 것은 '바깥에서 오는 빛 때문이냐, 아니면 안에서 발하는 빛 때문이냐?' 하는 두 갈래 가운데 어느 하나의 선택 문제는 아닐 것입니다. 바깥 물체가 눈으로 들어오는 근대 광학의 인식론을 존중하면서도 여기에 '빛을 안으로부터 밖으로 보낸다'는 고대 광학의 인식론, 이 둘 사이에 오가는 긴장과 교섭의 과정을 지나쳐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눈은 바깥 물체가 주는 영상을 받아들입니다. 이 점에서 모든 사람은 마찬가지입니다. 책상이 있으면 그 책상의 영상이 우리 눈에 비춰 이 물체가 다름 아닌 책상이라고 이해합니다. 두말할 나위도 없이 눈의 건강 상태와 그 책상이 놓여 있는 위치를 따져봐야 하지만, 그 책상은 누구에게나 책상입니다. 이 점에서 바깥에서 들어오는 빛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근대 광학이 일러준 지식입니다.

그러나 어떤 책상이 내 마음에 들거나 또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는 가치와 판단의 문제는 바깥 책상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우리 자신의 가치와 기준에 따라 책상을 각각 달리 평가하고 판단할 수도 있습니다. 바깥에 있는 책상과 책상을 바라보는 내 안의 마음이 맞물리고 엇물리면서 서로 부딪히고 서로 이어집니다.

그리하여 근대와 근대 이전의 고대 광학에서 배울 수 있는 두 인식론이 함께 연결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바깥 물체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도 아니고, 내면의 자아가 결정하는 것도 아닌, 이 둘이 서로 이어져 둘 사이를 오가는 역동의 과정을 존중해야 할 이유입니다.

노르웨이의 수도 오슬로에서 누구도 쉽게 값 매길 수 없다고 하는 유명한 그림을 대낮에 도둑맞았다고 합니다. 에드바르 뭉크의 걸작 '절규'(The Scream)라는 그림이 들어 있었습니다. 저는 이 화가나 작품에 대하여 연구한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 작품의 특출함에 대해서는 제 나름의 관심과 호기심을 지녀왔습니다.

바깥에 자리한 객관의 현실에 모든 사람들이 꼭 같이 느끼고 생각하지 않고, 그 객관의 현실에 대한 자기 내면의 느낌과 생각을 표출하고자 하는 이른바 표현주의를 이야기할 때면 넉넉히 들먹일 수 있는 그림입니다.

북유럽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거칠고 사나운 황혼이 엄습하는데, 어떤 사람이 기다란 두 손으로 얼굴과 귀를 감싸 잡고 다리 위를 걸어오는 모습이 그림 한 가운데 담겨 있습니다. 입을 벌려 비명을 지르고 눈은 휘둥그렇습니다. 다리 저 쪽에는 이제 막 헤어졌거나 옆으로 지나 가버린 듯한 두 사람이 조그맣게 그려져 있습니다.

이 그림에 대해서는 구구한 해석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 그림을 볼 적마다 화가가 '절규'라고 이름 붙인 그대로 한 인간이 오늘의 삶에서 견딜 수 없는 불안과 고뇌를 한꺼번에 겪어야 하는 슬픔 같은 것을 그려보고, 그 인간이 혼자 날카로운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는 인간 실존의 고독 같은 것을 생각하곤 합니다.

황혼이 몰아칠 때 세 사람이 꼭 같은 다리 위를 걸어가고 있지만, 다 절규하지는 않습니다. 사무치도록 슬프고 못 견디게 외로워 절규할 수밖에 없는 그 절규를 모두 절규하지 않습니다. 좀처럼 누구도 포착하지 않고 누구도 포착하지 못하는 이 불안한 인간 실존의 절규를 뭉크는 북유럽의 우울한 황혼과 어디론가 이어져 있어야 할 다리를 배경으로 삼아 그리고자 했습니다. 뭉크 자신의 시선이 그 절규하는 오늘의 인간에게로 갔습니다. 그리고 '절규'라는 이름을 달았습니다. 뭉크가 왜 다른 사람과는 다른 그러한 눈길을 보낼 수 있게 되었는지, 그것이 생각거리로 떠오릅니다.

여기에는 화가 특유의 삶이 걸쳐 있을 것입니다. 그 절규에 초점을 맞추게 된 특별한 삶의 이야기가 깔려 있을 것입니다. 삶의 객관 조건과 내면세계 사이를 오간 몹시도 복잡스러운 삶의 이야기가 이어져 있을 것입니다. 그 결과로 이 화가는 '절규'를 그릴 수 있는 안목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참 빛'과 '거짓 빛'의 갈림길

창세기에서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다"고 한 자연 조건 밑에 모두가 삽니다. 무엇이 밝은 것이며 무엇이 어두운 것인지를 분별해 놓으신 것,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누리는 조건이자 혜택입니다. 빛이 있게 된 바로 그 창조 때부터 모든 인간들에게 드러내 보여주신 빛입니다. 그 빛은 인식의 기본 조건입니다.

우리가 지난 주일 성경 공부 시간에 확인했던 바대로, 자연의 창조 질서를 보고-이 점은 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을 연상케 되는 것인데-'(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성품)'을 알 수 있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주어진 기본 되는 인식의 능력입니다. 창조 질서를 통하여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 보여 주신 이른바 '일반 계시'라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객관의 일반 조건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 특수한 조건이 끼어듭니다. 사람이라고 하여 다 같은 것을 보고 다 같은 생각을 하고 다 같은 것을 느끼지는 않습니다. 같을 것을 바라보고 같은 대상에 집착하고 같은 대상을 생각하도록 밀어붙이는 거센 바깥 압력이 있고, 또 그렇게 바깥 흐름을 좇아가지 않으면 뒤쳐지는 것 같아 불안한 '다수 추종'의 순응 지향성 때문에 이제 모든 것이 획일화의 길로 몰려가고 있기는 합니다.

그렇다 해도 세밀히 따져보면 개인마다, 집집마다 꼭 같은 가치와 꼭 같은 기준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절규'하지 않으나 어떤 사람은 '절규'합니다. 꼭 같은 북유럽의 황혼 길 다리 위에서도 그러합니다. 다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절규'하는 인간의 절박함을 비춰볼 수 있는 안목과 시선을 가지고 있지만, 어떤 사람은 비명을 내지르는 인간의 슬픔을 인지하지 못합니다.

여기서 깊이 새겨야 할 것이 있습니다. 어떻게 한 사람은 이러한 시선을 보내는데 다른 사람은 이러한 시선을 보내지 않고 못 보내는가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섬세한 시선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데, 왜 어떤 사람은 그러한 시선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하는 문제입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라고 했을 때의 빛, 그 빛을 마음에 담아 그 빛으로 세상을 비추며 살 것인가, 아니면 그 빛과 아무 상관없는 '거짓 빛'에 내 눈을 맡겨 그 빛으로 세상을 비추며 살 것인가 하는 갈림길의 문제입니다.

요한복음은 그리스도를 가리켜 '세상에 온' '참 빛'이라 적고 있습니다. 그 빛이 모든 사람을 비춘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바로 그 빛, 그 참 빛으로 비춤을 받아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받은 축복이요 은총입니다. 그 빛을 내 마음에 담아, 그 빛을 내 눈에 담아 그 빛으로 밖을 내다봐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특권이자 사명입니다. 그 빛으로 사물을 생각하고 느끼고 판별해야 합니다. 아니, 그 빛으로 봐야 할 대상도 선별해야 합니다.

섬세한 눈길을 되찾아  

▲ 박영신 목사 / 예람교회

오늘날 그리스도인이라 하면서 이 참 빛 되신 그리스의 빛을 받아 그 빛으로 세상을 보고, 이 빛으로 비추고 있는지, 그 빛으로 보아야 할 것을 보며 살아가고 있는지 우리는 묻습니다.

세상의 흐름에 뒤섞여 남들이 황홀한 빛이라 하여 거기에 휩쓸려 들어, 그리스도의 참 빛을 숫제 잃고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는 묻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비추시고자 했던 그 눈길을 거역하며 거짓된 빛 따라 무가치한 것들에 눈길을 주며 엉뚱한 것을 뒤따라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묻습니다.

절규를 절규하는 한 외로운 인간의 불안과 고뇌를 비춰볼 수 있는 섬세한 눈길을 잊은 채 교회를 들락날락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묻고 또 묻습니다. 오늘 참 빛 되신 그리스도의 빛을 우리 모두 다시 한 번 깊이 새김질 할 수 있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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