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1:4-9)

수양대군의 금부도사 왕방연은 조선조 역사에서 가장 애절한 사람 중 한 사람입니다. 어린 단종 임금을 유배지인 영월까지 안치(安置)시키고 돌아오는 길은 황망하기 그지없어 가슴은 구멍이 뚫린 것 같았습니다. 흐르는 냇물 소리마저 슬피 우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천만 리 머나먼 길에 고운 님 여의옵고/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안자이다/저 물도 내 안갓도다 울어 밤길 녜놋다."라고 읊었습니다.   

고운 님, 단종 임금을 이별하고 텅 빈 가슴을 메울 길 없어 냇가에 주저앉아 통곡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흐르는 냇물도 자기 마음같이 우는 것 같아 정말 그때의 심정은 님은 가고 빈터에서 고독한 밤길을 울면서 돌아왔을  것입니다.

가정에 있어서 대들보 같은 어른을 여읠 때, 그 어른의 빈자리 때문에 그 자손들은 허전하기 그지없어 합니다. 생전에는 몰랐다가 떠나신 후에 그 자리가 그렇게 귀중하고 중요한 자리인 것을 알게 됩니다. 한 공동체나 한 국가 사회도 정신적 지주를 잃고 나면, 사회나 국민들 가슴의 공동(空洞)이 정신적으로 가슴에 구멍이 뚫어지기 마련입니다. 우리는 해방 뒤 혼란기에 白凡 金九 선생님과 海公 申翼熙 선생님을 잃어 가슴에 공동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성경 말씀을 상고해 보면 주님의 제자들은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잡이로 그럭저럭 호구지책(糊口之策)으로 살던 어부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갈릴리에서 배와 그물을 버리고 주님의 뒤를 따르던 제자들은 주님에 의해서 일약 예수님의 12사도 반열에 올랐습니다. 로마식민지로부터 해방을 받는 정치적 야망의 꿈을 꾸면서, 지상국가 건설의 아롱진 무지개를 수놓았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로 가는 길을 제자들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골고다의 길은 성공의 길이 아니라, 여지없는 실패자의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겁에 질려 자기 갈 길로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오직 여제자(女弟子)라고 할 수 있는 막달라 마리아, 작은 야고보와 마리아, 살로메 등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주님을 멀리서 바라보며 눈물 짓는 무리들만 있을 뿐이었습니다.(막15:40)

부활한 주님은 흩어진 제자들을 다시 모아서 새 힘을 불어넣을 필요성을 느끼셨습니다.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이에 던졌더니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요21:5-) 이것은 주님의 초인적인 능력을 다시 제자들에게 확인시켜 주신 것이고, 새로운 사명을 부여하는 의미에서 "내 양을 치라"(먹이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부활한 주님이 지난 3년간의 삶이 재현되는 것인가 했으나, 승천하는 주님을 멍하게 바라보고만 있을 제자들이라는 것을 주님은 너무나 잘 알고 계셨습니다.

또 십자가 사건 당시에 흩어진 제자들의 정황을 잘 알고 있는 주님인지라 이번엔 그냥 가시지 않고 본문에서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명령(He gave them this order:)하시고 동시에 제자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주었습니다(He charged them not to depart from Jerusalem). 그러나 제자들은 어디까지나 로마로부터 해방을 받아 이스라엘의 자주독립에만 주된 관심을 쏟고 있었습니다.

"주께서 이스라엘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라는 질문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주님의 답변은 "때와 기한은 하나님 아버지의 권한에 있다"라고 했을 때 제자들은 허탈감에 빠졌습니다. 제자들은 어디까지나 지상 나라의 독립이었고, 자연인으로서는 현실적인 로마로부터 독립이었습니다. 1948년에 이스라엘이 독립국가가 되었습니다만, 이때는 아직 성령을 받아 전환된 인생관이 아니었습니다(보혜사 주님의 영으로 채워지지 않는 상태). 그러니 이때 주님은 승천하고 난 그들의 상황과 실존은 님은 가고, 갈릴리 제자들의 가슴 속에는 텅 빈 빈자리, 허무와 공동(空洞)만이 뚫어져 있을 것이라는 것을 이미 잘 알고 계셨습니다.

이런 것을 다 예견한 주님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그 빈자리에서 새 출발을 당부하셨던 것입니다. 왜 빈자리냐, 왜 이런 허무의식을 제자들에게 주었느냐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가 갖고 있는 그 무엇에 미련이 있는 한 자기 각성, 철저한 자기 성찰, 새로운 삶의 모색이 불가능합니다. 털끝만한 무엇이라도 주님보다 애지중지하는 한, 소유하고 있는 한, 거기에 집착과 애착을 가지는 법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어허 둥둥, 내 사랑" 하는 이삭을 모리아산 상에서 제물로 바치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또 인간적 집착에 연연하는 한, 밑 빠진 독에 쪽박으로 물 붓기에 불과합니다. 생명 되신 예수께 우리자신을 침잠(沈潛)시키는 방법 외에는 다른 도리가 없었습니다. 오늘날도 인생들은 갈증에 허덕이면서 쪽박으로 해갈하려고 합니다. 가슴에 공동이 생긴 삶일수록 명예, 물질, 권력 등으로 해갈하려고 아우성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갈릴리인의 신분을 잊어버리고, 이젠 예루살렘인(신앙인)이 되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는 왜 이다지도 가슴에 텅 빈 빈자리가 많습니까. 영락교회도, 광성교회도, 대광고등학교도 허전하고 텅 빈 빈자리, 커다란 공동이 보입니다. 지나간 목자의 환상에 젖을 것이 아니라, 직접 주님의 영을 채울 생각은 왜 없는지 묻고 싶습니다. 총회, 노회도 예수님이 계시던 그 가슴에 주님의 영은 어디다 두고 부정투표 시비만 난무합니까.

총회 총대들은 그 가슴에 계셔야 할 주님의 영은 어디서 잃고, 부총회장 선거에서 각 총대 한사람이 110만 원을 받고 찍어 주었으니, 이 한심한 일을 어찌하면 좋겠느냐고 신념 있는 소수 총대들의 땅이 꺼질 듯한 한숨소리는 님이 가버린 빈터에 어떠한 신앙의 꽃을 피울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우리는 텅 빈 가슴, 우리는 옹졸한 사람들이요, 색깔 없는 그림자와 같아졌고 마비된 주의 종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의 영의 사람으로 채워져야 이 험한 세파를 이길 능력도 얻고, 주님의 증인 노릇도 할 텐데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떠난 후의 그 빈자리에 제자들 각자의 고통만이 고일 것을 아신 주님이신지라 흩어지면 더 고통스러울 것이니, 다 함께 모여서 단결하고 주님이 없는 그 텅 빈자리에서 같이 고통하란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고통의 연대를 하란 말입니다. 혼자서 고통하면 견디기 더 어렵고 같이 고통하면 고통을 덜 수가 있는 법입니다. 그래서 고통의 연대를 하란 말씀이었고, 이것은 제자들끼리만의 고통이 아니라, 가신 님인 주님도 주님의 영으로 같이 고통하겠다는 말입니다.

한용운의 '님의 침묵'이란 시는 우리 모두 잘 아는 시입니다.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갔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에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이 됩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이 시의 주제는 '조국을 잃은 슬픔과 광복에 대한 신념'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님은 조국이나 애인, 불타(佛陀)로 해석해 볼 수도 있습니다. 위 인용한 시의 첫째 줄에서 둘째 줄까지는 주권을 잃고, 텅 빈 강산(江山)의 현실을 애달파 그린 애국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굳고 빛나던 옛 맹세 등은 조국을 지키려던 충절을 말함이고, 한숨의 미풍에 조국을 잃은 것을 의미), 둘째 줄 끝에서 5째 줄까지는 애인과 이별을 뜻한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5째 줄 끝에서 7째 줄까지는 불교의 윤회사상(輪廻思想) 같기도 합니다. 님의 의미가 조국이든, 인간사 애인이든, 불교의 윤회사상이든, 차안(此岸)의 세계에 대한 텅 빈 자리를 애절히 읊고 있습니다.

주권을 잃은 조국도 침묵하고, 떠나가 버린 애인도 침묵이고, 인간 욕심에서 죄업을 얻어 삼계육도(三界六道)에 죽어서는 다시 현생에 나고 또 죽고, 생사를 끝없이 반복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인과업보로 모든 번뇌와 무명에서 해탈을 받아 불타가 되기까지는 三界(욕계-색계-무색계)와 六道(지옥도-아귀도-축생도-수라도-인간도-천도)가 끝없이 반복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인간으로 다시 만나기까지는 오랜 시간, 역시 중생이 윤회전생(輪廻轉生)하는 범위에 오랜 침묵이 흐른 것이 아니겠습니까.

'만 왕의 왕'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잃고 난 제자들의 그 가슴의 빈자리, 그 자리는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자리였습니다. 제자들이 몰라서 그렇지 승천하시는 주님 때문에 놀랄 것도, 슬퍼할 것도, 허전해 할 것도, 의지할 정신적 지주(支柱)가 없어졌다고 허탈해 할 것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또 우리들의 그 님은 침묵(沈黙)치 않는 님이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고 말씀하셨기 문입니다.

그 님과 제자들 간의 이별의 기간은 몇 날 뿐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몇 날'(…in a few days=며칠 후, not many days from now=지금부터 몇 날이 못 되어)은 조국의 광복도 36년의 세월을 요했고, 떠난 애인은 기약 없는 세월이니 그것도 길게 잡아 10~20년 될지 모릅니다. 또한 영영 못 만날지도 모릅니다. 불교의 그 님은 영겁(永劫)이 될지 모르는 시간일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의 그 님은 오랜 침묵의 님이 아닙니다. 불과 10일 이내며, 오늘날은 벌써 오셔서 우리의 마음을 비우고, 마음 문만 열면 우리 가슴에 임재하시는 주님의 영, 성령이십니다.

사실 침묵의 시간을 기다린다는 것은 고통 중에 고통이요, 아픔입니다. 주님이 보내신 보혜사 성령의 은혜만이 그 가슴의 공동을 채울 수 있었습니다. 제자들이나 오늘날 우리들이나 그 가슴에 뚫어진 공동을 "주님께서 주님의 영으로 우리 가슴에 찾아오셔서 그것도 오래지 않아 '고통의 연대'로 임재하겠다는데 왜 이리 불안하고 나약하고 초라한 형색들입니까." 

미우라 아야꼬의 수필집에 소개된 '발자국'이란 제목의 서사시(敍事詩)가 있습니다.(4, 5년 전에 미국의 작자 미상의 이 시를 크리스마스카드에 쓴 것인데, 그때 미국 국민들 사이에도 애송됐던 시였습니다.) 그 내용은 인생의 최후가 가까이 온 한 작가가 꿈에서 인생의 가장 고통스런 삶의 장면을 전부 보게 됩니다. 황무지와 같은 빈터에 잡초가 우거진 숲 속을 지나서, 모래사장을 주님과 더불어 에덴동산과 같은 곳을 걸어가는데, 가다가 보니까 모래사장의 처음엔 발자국이 네 개였는데, 가장 힘든 순간에 갈증에 허덕이고 괴로울 때 발자국이 두 개뿐이더란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불렀습니다. "주님. 제가 가장 고통스러울 때 주님은 어디를 가셨습니까?" 그때 주님께서 대답하시기를 "그 발자국 두 개는 네 발자국이 아니라 내 발자국이었느니라."

"네가 고통에 지쳐서 쓰러져 있을 때 내가 너를 어깨에 메고 왔기에 발자국이 두 개뿐이었다"는 꿈이었고, 이 꿈은 나중에 시로 표현했다고 합니다. 너무나 감동적인 시입니다. 주님은 가시고 빈자리에 제자들만 그냥 두시지 않고 제자들과 같이 '고통의 연대' 속에서 아파한다는 말입니다. 지금도 우리가 힘겹고, 고통의 순간에 늘 우리를 홀로 두지 않으시고, 같이 또는 대신 고통을 당하신다는 말입니다.

신앙인의 가장 아픈 고독한 순간에도, 내가 홀로 고독하게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같이 아파하시고 나의 무거운 짐을 대신에 져 주시는 주님입니다. 그러기에 고독은 나 홀로 있는 것이 아니요, 주님과 같이 있기에 그 고독은 달콤한 것입니다. 님은 갔으나 그 님을 그리며 님이 계실 때보다 더 제자들이 결속하고, 기도에 힘썼습니다. 그 결과 주님께서 약속하신 선물인 오순절의 성령강림과 더불어 기독교회의 줄기찬 역사의 거보는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구약시대는 성부시대로 우리 인간을 위한 때였고(God for us), 신약시대는 성자시대로  잠시 제자들과 같이 했던 때요(God with us), 오순절 이후엔 성령시대 즉, 우리 안에 역사(役事)하신 주님이십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 것은 이런 주님의 신앙적 환상(幻像), 환영(幻影), 열망(熱望)을 견지하란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런 신앙적 주님의 환상, 환영과 열망에 이끌려 주님을 따라나셨고, 십자가 사건 이후엔 이런 환상, 환영과 열망을 잃었기에 흩어졌던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계신 주님. 우리도 이 주님의 환상, 환영과 열망을 우리 가슴에 우리 마음의 고향이자 주님의 몸 된 교회에 지금도 성령으로 역사하는 것을 잃지 말고 더욱 기도에 힘써 증인(말투레스, 순교자)이 됩시다.

즉 순교자적 신앙을 견지하여 오늘의 백골처럼 창백한 한국교회에 만연한 잡초를 뽑고, 묵은 땅을 갈고 씨를 뿌려서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합시다. 아픔의 쓴잔을 마신 자도 일어섭시다. 성공 이후에 오는 가슴의 공동에 방황하는 자도 일어나서 새로운 창의적인 일에 몰두합시다. 저마다 사랑하는 님을 잃고 빈터에 주저 않은 모든 자들은 이제 일어섭시다. 이 가을, 우수와 허전에 몸부림치는 자도 주님의 영과 함께 하면 삶의 의욕이 절로 솟아납니다.

우리 주님이 우리들의 아픔을 같이 나누고 있습니다. 이 사실 앞에 우리는 감사합시다. 빈터에 신앙의 아름다운 꽃씨를 심읍시다. 이것이 님을 생각하는 것이요, 님의 유업을 계승하는 것입니다. 그 님을 사랑하는 길입니다. 이 황무지의 빈터에, 빈자리와 같은 오늘의 한국교회에서 님의 능력을 증거하고 님의 노래로 화답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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