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가을은 가을철이 없이, 겨울이 성큼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우리네 사람살이는 옛날과 다름없이 겨울 지내기는 어려운 것 같습니다. 월동걱정도 문제지만, 마음으로 이 겨울이 지나면 또 한해의 달력을 넘겨야 한다는 심리적 문제가 더 가슴을 무겁게 하고 있습니다. 신령한 의미에서 사도 바울이 본문 21절에 디모데에게 "겨울 전에 너는 어서 오라"는 말씀을 하였습니다만, 이 말씀이 오늘 우리들에게도 신령한 은혜가 되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유대교에 광신했던 율법주의자로서, 기독교 복음주의자를 박멸하는데 앞장섰던 사람이었습니다. 스데반을 죽이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던 자입니다. 다메색 도상에서 살기가 등등하게 기독교인을 결박하는데 앞장을 섰던 자였습니다. 그러나 다메색 도상에서 그리스도를 만나서 회개하고, 율법주의자가 복음주의자가 되어 평생을 주님을 위해 일편단심 그 마음과 그의 삶을 바친 사람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여생동안 가는 곳마다 만나는 사람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였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갖은 고난을 다 격은 사람이었습니다(고후11:23-33). 그러나 만년에 사도 바울은 로마 옥중에 갇혀서 마지막 날을 보내면서 사랑하는 제자 디모데에게 편지를 쓸 때에 갑자기 걷잡을 수 없는 고독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바울의 최후 재판의 결과가 사형선고로 거의 떨어지자, 평소 바울을 따르던 사람들은 다 자기 고향으로, 세상으로,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세상사의 권력이나 금력의 힘이 있다고 하는 곳에는 문전성시(門前成市)하다가 그것이 무력해지면 흩어지는 것이 인간사인 것 같습니다.

이 성서 본문은 바울을 떠나 데마는 세상을 사랑하여 데살로니갗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갔고, 디도(디도에게 보낸 바울의 편지는 AD. 64-65. 이 딤후는 AD.66-67.)는 달마디아로 갔다고 표현했고(10절), 두기고는 "내가(바울) 두기고를 에베소로 보내었노라"(12절)고 했습니다. 다같이 그레스게와 디도도 바울이 일찍이 전도했던 곳으로 보내어 그곳 교인들의 신앙을 다지는 공적임무로 파송했다는 설이 있고, 두기고 역시 그의 고향인 에베소로 바울이 목회하러 보냈다는 설이 있습니다. 10절의 그레스게와 디도도 "내가 보내었노라"고 표현하지 않고 세상을 사랑하여 떠난 데라를 싸잡아서 "…는…로"라고 표현했고, 두기고는 "내가 보내었노라"라는 표현을 했습니다.

결국 "내가 두기고를 보내었노라"는 표현은 바울이 공무로 파송했다는 것이 설득력이 있습니다. '데마'를 비롯한 세 사람은 주동적으로 스스로 私的理由로 바울 곁을 떠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세 사람이 主語로 됨) 또 11절에 "누가만…" 이 말씀의 "…만…"(only, alone)이 강조를 한 뉘앙스가 바울의 마음을 섭섭하게 느끼는 정서를 읽을 수가 있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위 세 사람은 분명히 사적사유로 고독한 바울을 두고 떠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마지막 골고다 석벽 십자가에 달리셔서 운명하실 그 즈음에 12제자는 겁이 나서 다 제 갈 길을 가고 없을 때, 멀리서 우는 여인들만 있었고, 유사시 제자노릇을 한 아리마데 요셉과 니고데모가 주님의 장례를 치룬 것처럼, 주님의 제자 바울도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 인간적 고적감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여기서 꼭 집고 넘어가야 할 사람은 데마입니다. 데마는 10여 년간 바울의 동역자요, 충실한 조수로서 바울이 옥중서신을 기록할 무렵에는 같이 있었습니다.(골4:14, 몬24) 그런데 어찌하여 세상을 사랑하여 바울만 버린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향한 신앙마저도 버린 배교자가 될 수 있었을까요. 세 가지 동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구원을 받은 자들은 그리스도와 같이 수고와 고생도 해야 되는 것을 그는 망각하고, 일시적인 흥분, 기쁨, 평화, 안식, 축복만을 생각한 사람으로 진단해 봅니다. 둘째는, 그간의 세월 속에서 타성과 이상도 흐려지고 감격도 식었습니다. 셋째는, 예수님의 복음보다 안전을, 십자가의 길보다 쉬운 길, 세상에서 성공을 희구했던 데마였다고 봅니다. 우리는 그에게 정죄보다 연민의 정을 느낍니다.

예수님의 제자의 길에는 영광과 더불어 핍박, 희생, 고독, 투옥, 가난도 감수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는 구약의 그리심과 에발의 양산(兩山)이 이스라엘 민족을 축복하며 저주하던 산이요, 민족의 국부 모세의 율법은 중심적 생명이었고, 그 율법은 동전의 양면처럼 축복과 저주인 것을 데마는 이해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축복에 "아멘" 하는 것은 즐거운 일입니다. 저주에 "아멘" 하는 것은 괴로운 일입니다. 그러나 축복에 "아멘"은 신자의 신령한 특권입니다.(신11:26-29) 

저주에 "아멘" 하는 것은 신자가 따라야 할 의무인 것입니다. 교회의 성민은 축복에는 "아멘 아멘" 하지만 저주에는 "아멘" 대신에 불평과 반항과 반란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마귀의 세계에는 축복만이 있고 저주가 없거나, 저주만 있고 축복이 없는 것입니다. 분명 축복 없는 저주는 가혹할 것입니다. 저주 없는 축복은 기만인 것을 데마는 몰랐다고 봅니다. 우리는 축복에 용기백배해야 하고, 저주에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도 축복만 외치는 자는 거짓된 종의 소리요, 저주만 외치는 것은 거짓된 종입니다. 쓸데없이 절망하는 것은 불신앙이요, 동시에 저주 없는 낙관자도 신앙공동체와 겨레를 망치는 것이 됩니다.(신27:11-26)

바울의 인생 석양 길(거룩한 순교의 길)에 평소 자기를 사랑하던 사람이 여지없는 실패자 인생으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그를 헌신짝처럼 별 쓸모없다고, 늙었다고(패물이 되었다고) 소외시키는 모습은 오늘의 야속한 세태를 방불합니다. 하물며 자식까지도 별 볼일 없으면 부모를 버리는 세상이니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바울 주변에서 그래도 그간 바울의 말 친구도 되고, 가족이 없는 최후의 그를 위해 끝까지 도와드려야 하는 것이 최소한의 휴머니즘이 아니겠습니까.

그것도 옥중에 죄수로서 더욱이 주를 위해 사형선고 받은 그를 위로 격려하며, 그의 숭고한 정신을 이어받아야 할 사람들이, 마지막 바울의 상황을 보고 바울 곁에 있어봐야 별스런 이득이 될 것 없다고 다 떠난 사람들이었습니다. 신앙의 세계도 이런 몰인정하고, 비인도적인 신앙자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 봅니다. 이들은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 인간이 덜 된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마지막 섭섭한 순간에도 바울이 잊을 수 없는 세 친구를 손꼽을 수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다메색 도상에서 만난 주님입니다.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노니"(요15:15-16)라는 말씀에 의지하여, 바울도 예수님을 친구로 생각했다고 봅니다. 두 번째는 누가였습니다. 그는 바울의 전도여행에 늘 같이 순방했고, 그의 약한 건강을 위해서 돌보아 주던 의사였습니다. 마지막 사람은 디모데입니다. 사랑하는 아들이요 제자, 제2차 전도여행 때 만난 디모데가 있습니다.(행16:1-)

바울이 루스트라에서 돌매를 맞고 시궁창에 버림을 받았을 때, 그를 구해준 사람이 디모데였습니다. 피투성이가 된 이 사도를 찾아내 상처를 싸매주고, 먹을 것을 갖다 주고, 집에 모셔다가 그의 건강이 회복될 때까지 돌보아 준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 시점에 수 천리 타향 로마 옥중에서 마지막 처형을 기다리는 순간, 자기가 손꼽는 세 친구 가운데, 디모데만 자기 옆에 있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를 오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디모데야"라고 불렀을 때 혼자 오지 말고 '마가'를 데리고 오라. 바울의 1차 전도여행 때, '바울'과 '바나바’는 다툼을 하며 바울의 2차 전도여행 때에는 바울은 실라와 더불어 수리아 쪽으로 갔고, 바나바와 마가는 '구브로' 쪽으로 떠났습니다.

그런데 이젠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지난날 감정들을 다 회오에 찬 심정으로 마가를 사랑하는 심정으로 다시 데리고 오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인생의 쓴맛 단맛을 다 본 바울이 너그럽고 용서를 구하는 죽음 직전의 생을 정리하는 모습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인생 황혼에 저무는 그리스도인들은 마지막 세상을 떠나기 전에 이런 정리하는 모습을 우리는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마가는 성공적으로 출발한 주의 종입니다. 주님과 더불어 최후의 만찬을 먹을 자기 집 다락방을 제공했고, 주님 없는 초대 예루살렘교회를 지키며, 자기 집에서 120 문도와 더불어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받은 자였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의 기사(행13:13, 15:36-40)는 그의 인생의 중반기인 젊은 시절에 실수하여(전도여행에서 도중에 고난에 대한 인내성 없이 귀향한 것) 이 일로 바울과 불화한 세월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마지막 가는 길 앞에서 아마 깊은 사념에 잠겼을 것입니다. 그를 용서할 뿐만 아니라, 다시 자신의 순교정신을 직접 목도케 하고, 그의 삶을 인상 깊게, 다시 말해서 마가가  주님을 위해 성공적인 길을 가도록 인도하기 위해 배려했습니다. 여기에 오늘날 원로목사와 공로목사들의 인생 석양길에 황혼이 더 진하고 더 붉게 물드는 것처럼, 후배목사나 후임 위임목사를 위한 아름다운 바울의 모습을 본받은 정경을 한국교회에서 찾아보았으면 합니다.

오월의 훈풍처럼 훈훈한 정감의 전통을 우리들 후배들에게 물려주고, 그들도 계승하여 아름다운 전통을 물려주었으면 합니다. 그런데 지금 한국교회 현실은 각 교회마다 원로목사와 위임목사 간의 갈등, 목사와 장로간의 고소사건, 위임목사와 후배목사 간의 두 패로 갈라진 양상입니다. 급성장한 양적 부풀기에만 힘을 빼서 나온 불순물이라고 여겨집니다. 후배목사에게 시기하지 말고, 그가 성공적인 목회를 할 수 있도록, 바울처럼 후배목사들을 키우는 그런 큰 안목의 인생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마가는 베드로의 전언을 듣고, 바울의 장엄한 순교의 정신을 이어 받아 마가복음 쓰고(AD.67-68), 바울의 유지를 받들어 그도 순교했다는 설이 있습니다. 저는 그가 순교의 거룩한 생을 마무리했다고 믿고 싶습니다.

오늘의 석양에 가까운 목사나 장로는 물론, 모든 기독교인은 이런 아름다운 이야기를 남겨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 후손들도 우리의 '감동적인 인상과 이야기'를 그들 공동체에서 '화제꺼리'로 회자되고, 그들도 이런 아름다운 생을 본받는 교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지금 전국에 있는 목사와 장로들의 이야기는 악명 높기만 합니다. 인생의 겨울이 올 것이니, 겸허히 '겨울'이 오기 전에 회개합시다. 우리 중 전 인간 일생을 돌이켜 볼 때, 그간의 부끄럽고 실패적인 인생을 살아온 길도 있을 것입니다만, 적어도 인생 후반기에는 성공적인 생의 최후가 되었으면 합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오는 길에 드로아에 맡겨둔 외투를 가져오라고 부탁한 것을 봐서 로마도 아침저녁으로 찬바람이 불기 시작한 겨울이었던 것 같습니다. 또 디모데에게 책과 가죽에 쓴 두루마리(파피루스)를 가져오라고 한 것으로 봐서, 죽기 전에 디모데에게 꼭 할 말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 겨울 전에 너는 어서 오라고 간곡히 부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왜 겨울 전에 오라고 했을까요. 추워지니까 외투 생각이 나서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자기가 처형당할 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겨울이 되면, 지중해 항해 사정이 어렵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 전 겨울에도 지중해에서 바울 자신이 풍랑을 만나 고생했던 기억이 났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지중해는 10월이 들어서면, 작은 배의 항해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만일 디모데가 겨울이 되어서 출발한다면, 그 이듬해 봄까지는 로마에 가는 배도 없고, 바울 자신도 이듬해 봄까지는 살지 못할 것 같은 예감이 들어서, "겨울 전에 너는 어서 오라"고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 오지 않으면 만나지 못할 것이기에 옥중에서 편지를 써서 보낸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디모데가 이 편지를 받고, 어떻게 했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상상만 해 봅니다. 디모데는 아마 이 편지를 받고, 하루도 지체하지 않고 드로아로 가서 바울의 책과 외투를 찾아 로마를 향해 곧장 떠났을 것입니다.(바울과 디모데의 그간 정의를 봐서) 그래서 로마에 도착하자마자 바울이 갇혀있는 옥중으로 달려가서 그를 기쁨으로 상봉하고, 바울과 더불어 책도 읽고, 마지막 편지도 썼을 것이며, 최후의 순간까지 그의 신앙을 배울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에는 바울과 함께 그의 사형장까지 가서 그리스도를 위해서 자기 목숨까지 버리는 장엄한 순간도 목격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사료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디모데가 겨울 전에 왔으니까 가능했지 하루만 늦어도 바울을 볼 수 없을지 모르겠습니다. 이와 같은 일이 우리들이게도 있을 법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 중에, 봄이 오기 전에 세상을 떠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오늘 이 시점에서 누가 우리 곁을 멀리 떠날지도 모릅니다. 겨울이 오고 또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고, 그 다음에 여름이 옵니다. 그러나 그 겨울이 오고 감에 따라, 우리의 기회도 오고 가고, 우리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분들의 생사도 그럴 것입니다. 이번 주일에 한 친구를 도울 기회가 있었는데, 다음 주일에 그 친구가 세상을 떠났다면, 그 기회도 다시 오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매일의 생활에도 귀담아 듣기만 하면, "너는 겨울 전에 오라"고 목매어 부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겨울이 오기 전에, 이 해가 가기 전에, 진실한 신앙인이 되자. 양심에서 들려오는 소리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 인간부터 먼저 되자"는 소리를  들어야겠습니다. 사람은 계속 죽을 때까지 되어가는 존재(Becoming)라고 미국의 유니온 신학교 L. J. Sherill 박사는 그의 유명한 저서 「영혼의 투쟁」(The Struggle Of The Soul)에서 갈파한 바가 있습니다.

겨울이 오기 전에는 그리스도의 음성입니다. 겨울이 오기 전에 어서 속히 오라. 지금도 우리를 부르시고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얼마나 마음 문이 잠겼는지, 오랫동안 단절되어서 마음의 거미줄이 있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마음이 녹슬어 주님을 문 밖에 세워 두진 않았는지 생각해 보세요. 이 겨울이 오기 전에 깊이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 미국 St. Louis 소재 Eden 신학대학원 학위수여식을 마치고 은사 Dr. Allen O. Miller(조직신학 교수)와 함께.

지금 그리고 여기서(Now and Here) 결단해야 합니다. 생을 다시 정비해야 하겠습니다. 겨울이 오기 전에 말입니다. 데마처럼 주님보다 세상을 사랑하라는 유혹의 소리를 단연코 물리쳐야겠고, 바울이 제자 마가를 용서하고 그의 목회 성공을 위한 배려도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우리에게 인간다운 인간이 되는 양심의 목소리를 들어야 하며, 사랑과 우정의 부르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바울의 아름다운 인생정리의 모습도 새겨야 하겠습니다. 이젠 가장 중요한 예수 그리스도의 새 소명(New Calling)의 소리를 듣고 일어서야 합니다. 미루지 맙시다. 늦기 전에 말입니다. 후회하기 전에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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