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시아이주노동자회의 기간에 열린 차별철폐대행진에 참석한 회의 참가자들. ⓒ김미선

"비자, 비자, 비자 - 우!"

지난 겨울 장기체류 이주노동자들이 강제추방반대 농성장에서 토해내던 구호다. 그들이 간절히 바라던 것을 집약적으로 표현해낸 이 구호를 지난 9월 열렸던 제9차 아시아이주노동자회의를 준비하는 내내 입속에서 외치고 있었다. 아시아 19개국에서 들어오는 60명의 해외참가자들이 비자를 받아 무사히 입국할 수 있도록 하는 일이 그 무엇보다 힘들고도 어려웠기에 "비자, 비자"를 입에 달고 살았는지 모르겠다.

회의 참가자 대부분 경제사정이 우리보다 좋지 못한 나라들에서 오다보니 이들 모두 잠정적으로 "불법체류 가능성이 있는 외국인"으로 의심부터 받게 된 것이다. 최근의 전쟁과 테러 위협 등으로 특별히 이슬람국가에서 오는 이들은 테러 관련 의심까지 받게 되어 공증 초청장과 신원보증서, 은행잔고 증명서와 납세증명서 등을 빠짐없이 제출해야 했다. 즉 한국에 가서 회의만 하고 돌아올 것이며 절대 불법체류하지 않겠다는 것을 서류상으로 또 인터뷰를 통해 증명해야 한국입국 비자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이쯤 되면 한국인들 미국비자 받기 어렵다고 할 게 아니다.

지난 9월 13일부터 19일까지 서울 감리교여선교회관에서 열린 제9차 아시아이주노동자회의는 10년 전인 지난 94년 대만에서 시작된 회의다. 당시 "아시아에서 이주노동자와 함께 살며 일하기 -국제이주노동에 대한 교회의 응답"이란 주제로 열렸던 아시아 각국의 교회, 사회단체 참가자들은 아시아에서 급증하는 이주노동자들의 문제와 이에 대한 다각적인 응답을 모색하고자 회의 이름을 딴 "아시아이주노동자포럼"이란 네트워크를 결성했다.

▲ 이번 회의는 10년간 아시아에서 이주노동과 관련한 쟁점 되는 사항들을 다루었다는 점에서도 의미 있는 회의가 됐다. ⓒ김미선

▲ 아시아이주노동자회의 개회식 전 참가자들. 아시아 각국 이주노동자들은 그간의 성과와 향후 과제들을 놓고 진지한 토론에 이어 구체적인 행동계획을 세운 후 각자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김미선

대만에서 첫 회의 이후 아시아 각국을 돌며 진행해 온 이 회의는 어느덧 아시아에서 가장 대표적인 이주노동자 관련 회의가 됐다. 서울에서는 지난 96년 사회적으로 이주노동자 문제가 막 관심을 갖게 되던 때 외국인이주노동자대책협의회가 국내 주최를 담당한 데 이어 다시 국내 개최를 담당했다. 

이번 회의는 200여 명이 넘는 국내외 참가자들로 인해 규모면에서도 사상 최대를 기록했으며 지난 10년간 아시아에서 이주노동과 관련한 쟁점 되는 사항들을 다루었다는 점에서도 의미 있는 회의가 됐다. 즉 아시아 각국이 채택하고 있는 개발정책이 어떻게 이주노동자들의 삶에 영향을 주었는가, 특히 늘어나는 여성이주노동자들의 문제를 어떻게 함께 풀어갈 것인가가 주요 관심사였다. 이른바 '이주노동의 여성화'에 대한 각국의 응답과 지속가능한 개발을 위한 논의들이 진행됐다. 그러나 이런 규모와 주제 말고도 특기할 만한 일들은 회의 참가자들의 면면이다.

첫날 가진 환영만찬 시간에 소개된 먼주 타파, 그녀는 95년 1월 한겨울 명동성당 들머리에서 산업기술연수생의 비참한 생활과 문제들을 폭로했던 네팔 연수생 농성자 중의 하나로 이제 고향인 네팔에 돌아가 현지 노조에서 활동하고 있는 중이다. 또 한국에서 자신들의 노동과 인권문제 뿐 아니라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 보탬이 되고자 결성된 버마액션도 회의 기간 내내 아시아 전체의 상황과 자신들의 문제를 연관지어 고민하기도 했다. 홍콩에서는 이제 필리핀 여성들 다음으로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는 인도네시아 가사노동자 노조원들은 아시아 이주노동의 여성화와 과제들을 드러내는데 많은 기여를 했다.

10년 전 회의에서 어떻게 아시아 이주노동자들과 함께 살며 일해 나갈 것인가를 고민하던 아시아 각국의 교회와 시민사회단체들은 그동안 사회 각 영역에서 이를 실천해오려 노력했다. 단지 노동하는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가족을 구성하고 가족과 함께 살 권리를 이야기한다. 더불어 자신들의 귀환을 위한 적극적인 준비와 사회적 재통합의 과제를 놓고 씨름하는 데까지 발전해왔다.

아시아 각국 이주노동자, 지원단체간의 연대와 소통 그리고 축제의 장인 이번 회의에서 참가자들은 그간의 성과와 향후 과제들을 놓고 진지한 토론에 이어 구체적인 행동계획을 세운 후 각자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해외 참가자들의 비자받기가 까다로웠던 만큼(그들이 불법체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해야 했던 만큼) 단체방문 등 개인 일정을 위해 며칠 더 남아있던 회의 참가자는 9월 30일 마지막으로 출국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서야 겨우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때야 비로소 제9차 아시아이주노동자회의가 끝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사무실로 돌아오니 최근 알카에다의 한국 테러위협에 대해 정부의 대테러 종합대책이 발표됐다. 그러나 그 대책이란 것이 엉뚱하게도 모든 미등록이주노동자(불법체류자)를 잠재적 테러리스트로 모는 쪽이어서 이주노동자들과 지원 단체들의 우려를 사고 있다. 테러지원국으로 분류된 국가출신 이주노동자들을 잠재적 테러리스트로 보고, 감시를 강화하거나 합법적으로 체류하는 이들에게 임의동행 형식의 검거를 일삼는 것은 테러방지를 빙자한 불법체류자 단속에 더 힘을 싣는 것이 아닌가하는 씁쓸함을 안겨준다.

이러한 경향은 실은 9·11 테러 이후 급속히 늘어나고 있어 아시아 이주노동자들의 현실은 지속가능한 개발과 경제 영역뿐 아니라 전쟁과 평화의 문제에도 깊숙이 연관되어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그래서인지 "세계평화 건설을 위한 전쟁반대운동 동참과 국제연대와 네트워크 강화"를 표명한 "서울 성명"의 한 대목이 회의를 마치고 발걸음을 재촉해야 하는 우리들의 눈길을 유난히 붙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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