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뉴스앤조이 신철민
우리의 영성은 하나님의 하나님됨(속성)의 되비춤이며, 하나님의 영의 드리워짐(임재)에서 출발한다. 그래서 우리의 영성은 한정지을 수 없는 무한하신 '하나님의 하나님됨'을 부분이라도 드러내는 중요한 통로다. 우리 영성의 궁극적인 지향점은 하나님의 하나님됨을 가장 충만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하나님의 하나님됨의 모습 중의 하나가 바로 자비다. 하나님은 자비의 하나님이시다. 자비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가장 소중한 은총인 동시에 하나님 자신의 가장 근원적인 속성이다.

"나는 야훼다, 야훼다. 자비와 은총의 신이다. 좀처럼 화를 내지 아니하고 사랑과 진실이 넘치는 신이다."(출33:6)

"그러나 주님은 자비로우시고 너그러우시어 좀처럼 화를 내지 아니하시니 참되신 주의 사랑 그지없으십니다."(시86:15)

자비는 하나님 사랑의 가장 우선적인 표출

자비의 영성은 바로 하나님의 가장 우선적인 속성인 자비를 되비추고 실현해가는 영성이다. 하나님의 자비는 하나님 편에서 일방적으로 내려오는 자비이며, 하나님 사랑의 가장 우선적인 표출이다. "하나님을 자비의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이 타자의 고통에 괴로워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말이다. 하나님은 괴로워한다. 하나님은 고통을 겪는다. 그렇다면 인간의 자비는 인간의 고통을 덜어주는 것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고통을 덜어주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매튜 폭스, 「영성, 자비의 힘」)

하나님의 자비가 없다면 인간의 구원도 없었을 것이고 앞으로의 구원도 없을 것이다. 지금도 우리를 자비의 울타리 안에서 노닐게 하시는 하나님의 선택이 없다면 인간은 구원의 환희를 맛보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은 자비와 긍휼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비의 자궁으로 우리를 품고 계시고 우리는 그 안에서 쉼을 얻으며 자라난다.

이러한 하나님의 모습을 애틋하게 보여주는 이야기가 바로 탕자의 비유에 나타난 자비로운 아버지의 모습이다. 비유에서 탕자의 아버지는 그의 행위 자체를 따지기 전에 돌아온 탕자를 아들로서 무조건 받아들인다(눅15:11∼32). 이때 아버지는 돌아오는 아들을 멀리서 보고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고 표현한다. 아버지의 자비와 긍휼은 그 아들이 한 행위에 따라 그 정도와 강도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로서 자신을 드러내는 것 그 자체다. 자비는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사람과 자연과의 사이에서 화해와 일치를 일으킨다.

신약성서에서 자비를 나타내는 단어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엘레에오(elleo), 다른 하나는 스플랑크니조마이(splanchnizomai)다. '엘레에오'는 주로 예수 주변에서 병이나 다른 고통을 당할 때 사람들이 절박한 심정으로 예수를 부르짖을 때 사용한다(마9:27, 15:22, 17:15, 막5:19, 9:22, 10:47).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소서'라는 말로 자신의 고통을 해결해줄 수 있는 어떤 신적인 능력을 희망할 때 사용되었다는 것은 치유사건은 하나님의 자비를 통해서만이 가능하다는 믿음이 담겨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두 번째로 사용한 단어 '스플랑크니조마이'는 예수께서 사람들의 상황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고 측은히 여기실 때 사용한 단어다(마9:36, 15:32, 20:34). 곧 하나님 혹은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의 구원사건을 일으키시는 그 마음의 상태를 묘사한다. 하나님과 예수의 자비는 인간을 바라보시는 눈길이자 동시에 인간을 온전하게 치유하게 하시는 동인(動因)이다.

성서에 기록된 예수는 불쌍하고 측은한 마음으로 애가 끓었다. 예수를 예수되게 하는, 하나님의 아들로 사람들에게 인정받게 되는 계기도 바로 자비를 베풀었을 때였다. "예수는 자비로운 분이었고, 자비를 구하던 사람들이 정확히 그런 이유로 예수를 찾았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복음서의 저자들은 이러한 예수의 자비와 그분 안에 나타난 신적인 속성을 동일시했다."(매튜 폭스)

자비의 빈곤 속에 피폐해진 이 사회

오늘 자비의 하나님 앞에 선 인간의 삶 속에서 자비가 있는가? 매튜 폭스는 현대에서 자비는 유배되고, 망각되고, 억압되고 있음을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우주 안에 살고 있는 모든 피조물이 그렇듯이, 우리도 고통과 기쁨을 함께 나누는 피조물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자비의 유배를 묵인함으로써 풍성한 자연과 인간 본성을 잃어가고 있다. 모든 개인은 적어도 잠재적으로는 자비를 지니고 있다. 오늘날 우리 모두가 공유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유배된 자비의 희생자라는 사실이다. 개인과 집단을 막론하고 모두가 희생자다. 우리는 모두 희생자이며 자비가 없어서 죽어가고 있다."

이 사회에 자비가 흐르지 않음으로써 인간과 인간의 관계는 삭막해져간다. 자비가 종교적 언어로 치부되는 동안 일상에서 자비를 필요로 하는 존재들은 자비의 빈곤 속에서 점점 피폐해지고 있는 것이다. 자비의 부재로 인해 고통과 슬픔은 가중되고, 기쁨과 즐거움은 금세 사그라들고 있다. 자비로운 인간이 점점 사라짐으로써 자비로운 하나님도 점점 낯설어지고 있다. 개인이든, 사회든, 아니면 국가간이든 자비는 더 이상 현실적인 삶의 대안이 아니라 되도록 빨리 버려야 할 옛 덕목이 되어버린 것이다. 자비를 말하는 사람 또한 바보 취급당하기 일쑤이고 자비로운 사람을 찾아보기 어렵다. 자비의 영성은 고갈되고 있다.

자비의 유배나 망각만큼이나 더 위험한 것이 자비에 대한 오해다. 자비는 단순히 다른 존재에게 베푸는 감상적인 동정이나 값싼 시혜가 아니다. 자비에 대한 매튜 폭스의 설명에서 그 명제만을 서술해도 자비의 본질을 느낄 수 있다. 그는 자비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자비는 연민이 아니라 축제이며
자비는 감상이 아니라 정의를 구현하고 긍휼을 실천하는 것이며
자비는 사적이고 이기적이고 자기 도취적인 것이 아니라 공적인 것이며
자비는 인간미 넘치는 인격주의인 것만이 아니라
넓이로는 우주적인 것이며 에너지 관점에서는 신적이다.
또한 자비는 금욕적인 초탈이나 추상적인 명상이 아니라
열정적인 관심이며
자비는 지성을 반대하지 않고
만물의 상호연결을 알고 이해하려고 하며
자비는 도덕적인 계명이 아니라
가장 충만한 인간 에너지와 신적인 에너지의 흐름이자 흘러 넘침이며
자비는 이타주의가 아니라
자기-사랑과 타자-사랑이 하나된 것이다.
자비는 종교가 아니라 삶의 길, 즉 영성이다.


나의 나됨을 아시기에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

▲ 팔복의 영성
자비의 영성은 어떤 위계 질서 속에서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보여주는 동정이 아니다. 자비는 다른 사람의 '참 나(眞我)'를 보지 못하고는 일으킬 수 없는 신적인 행위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자비를 입었다고 고백한다면, 그것은 나의 '참 나'를 나보다 더 온전히 아시는 이로서의 하나님을 믿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나의 나됨을 아시기에 자비를 베푸신다.

우리 또한 남에게 자비를 베풀 때, 남이 그것을 값싼 호의나 동정이 아닌 참 자비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그들의 '참 나'를 직시해야 한다. 그들이 이미 하나님의 자비를 입는 사람들임을 알 때 우리 또한 자비를 베풀 수 있다. 또한 그들에게 베푸는 자비는 결국 나의 참 나, 곧 하나님의 형상으로 발산되는 하나님의 자비임을 인정하고 고백해야 한다.

자비한 사람 곧 인간과의 관계에서 자비함을 자기 존재의 형식으로 갖는 사람이 하나님의 자비를 받게 된다. 우리는 자비를 베풀 수 있는 사람이고 또 자비를 베풀어야 할 사람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더 큰 자비를 입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자비를 베풀지 못하는 이유는 자신이 자비를 입은 사람임을 망각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자신의 존재가 지금의 모습으로 가능하게 된 이유, 존재의 이유와 토대를 망각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는 이러한 무자비한 자의 모습을 비유로 적나라하게 표현하셨다. 그것은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로 일만 달란트를 탕감 받은 종이 백 달란트 빚진 자를 감옥에 가두는 무자비한 행동을 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왕은 그 종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렇다면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할 것이 아니냐?"(마18:33)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향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와는 정반대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다. 어떤 젊은이가 자신이 근무하는 회사에서 수백 달러를 몰래 빼돌렸다. 현금이 부족하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그의 상관이 그를 불렀다.

그 젊은이는 곧바로 자신이 해고당하고 또 감옥에 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상관이 정죄 받을 것을 두려워하고 있는 젊은이에게 물었을 때 그는 자신이 돈을 빼돌렸다는 사실을 순순히 자백했다. 상관은 그의 자백에 매우 놀라며 물었다. "만약 너의 잘못을 묵인해주고 현재의 자리를 지키게 해준다면 미래에도 내가 너를 신뢰할 수 있게 될까?" "예, 물론입니다. 저는 이번에 배운 것이 많습니다."

그 상관은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는 그의 신실함에 감명을 받았다. "나는 자네의 잘못을 묻지 않겠네. 자네는 계속 자네의 일을 책임 있게 할 수 있을 것이네." 그러고는 이렇게 덧붙였다. "그러나 자네가 알아두어야 할 것이 하나 있네. 그것은 자네가 그 유혹에 빠진 두 번째 사람이라는 것을…. 첫 번째 사람은 바로 나였네. 자네가 지금 받은 자비는 바로 내가 이전에 받았던 자비라네. 그것은 우리를 지켜주는 하나님의 은총이지…."

자비로운 존재가 되는 길은 자비를 베푸는 것

자비로운 마음을 갖는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아픔과 고통을 자신의 아픔과 고통으로 여기는 감수성을 지닌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자신의 아픔이 자비를 통해 치유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의 아들로 용납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아버지의 자비를 느낀다.

하나님의 자비를 체험한 사람은 자신이 자비로운 존재가 되는 여정을 시작한 것이다. 자비로운 존재가 되어 이웃에게 자비를 베푸는 자는 다시 하나님의 자비를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비를 수용하지도, 체험하지도 못한 사람은 그 자신 또한 자비로운 사람이 되지 못할 것이고 그 사람은 남에게 자비를 베풀지도 못할 것이다. 그래서 자비로운 사람은 더욱 자비롭게 되고, 자비롭지 못한 사람은 더욱더 자비롭지 못하게 된다.

▲ 김진 목사. ⓒ뉴스앤조이 신철민
우리가 자비로운 존재가 되는 길은 자비를 베푸는 것이다. 우리가 자비를 베풀 수 있는 이유는 우리 자신이 자비를 입은 사람이기 때문이며 우리가 자비를 베풀어야 될 이유는 우리 또한 여전히 자비를 받아야 할 사람이기 때문이다.

자비의 영성은 어떤 사람이나 일에 대해 일회적으로 불쌍한 마음을 갖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존재가 변하여 자비의 존재, 자비의 화신(化身)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존재가 자비로울 때 자비가 필요로 하는 곳에서 기꺼이 자비로울 수 있고, 또 자비롭지 못한 사람에게조차 자비로울 수 있다.

엔크리스토출판사에서 출간한 '김진의 영성이야기' 중 「팔복의 영성」을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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