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회를 돌며 바른 정치와 법률제정을 위해 기도하시는 목사님들. ⓒ이준모

한국교회가 개혁의 대상이 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종교개혁'이라는 말이 역사의 큰 획을 긋고 있는 것만큼, 교회는 역사 속에서 늘 개혁의 대상이 되어 왔다. 최근 교회의 재정유용으로 빚어진 교회분란이나 세습문제 등 그동안 수면에 드러나지 않았던 교회 내부의 문제가 사회적으로 드러나면서 일반 방송에서조차 교회에 대한 심각한 문제를 다룰 정도로 교회는 지탄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이미 사회는 '개혁의 거대한 흐름'을 일궈내면서 역대 정권의 권력찬탈, 부정과 비리, 권력에 의해 저질러진 인권문제 등 피부로 느낄 수 있는 개혁의 흐름을 타고 있지만, 교회는 오히려 그 흐름에 거슬러가니 개혁의 대상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인 듯하다. 그럼에도 소위 대형교회라고 일컬어지는 교회들은 역사의 흐름을 거슬러 다시 반공 이데올로기와 숭미주의로 교인들을 도심지 한 가운데로 내몰고 있다. 정말 볼썽사납게 극우적인 논리로 가득 찬 일부 극우 단체들과 손잡고, 교인들을 동원하여 정치집회를 일삼고 있는 것이다.

요즘 보수권의 교회를 보면, 다시 1980년대 이전의 교회들로 돌아가고 있는 듯하다. 당시 유신정권하에서 많은 목회자들이 유신정권을 지지하고, 반공이데올로기를 전파하는 선봉장이 되기도 했다. 특히 공장에서 밤늦도록 일했지만 최저 임금을 받지 못했던 노동자들이 임금인상을 요구할 때도 교회는 북한의 지령을 받은 불순분자들에 의해 조정당하는 것인양 선전하기에 바빴다.

지금 북한에서 생존의 위험을 무릅쓰고 탈출하는 사람들이 연일 신문에 보도되고 있는 이 현실에서도, 과거에 냉전이데올로기와 이념공세로 한몫했던 대형교회들이 마치 북한을 찬양하는 불순분자들이 광화문 네거리에 인공기라도 들고 나타나 나라를 들어 먹을 수 있다고 선전한다. 어처구니없는 일이 다시 재연되고 있다.

이렇게 과거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의 반동은 총 공세적이다. 그러나 대형교회가 역사적으로 헌정을 중단시키고 들어선 전두환 정권에 봉사하고, 그들의 이념적 편향성을 대변해 준 일로 교회가 사회로부터 외면을 당했는데, 왜 대형교회들은 과거를 반성하기는커녕 자꾸 정치집회를 하고 있는 것인지 답답하고 부끄럽다. 적어도 교회는 하나님의 창조섭리에 따라 역사창조운동의 일꾼들을 키워내고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회를 만들어 가야하지 않을까 ?

'교회가 이래서는 안 되는데' 할 때, 우리 사회의 변혁을 꿈꾸며 대안교회로 들어선 일단의 교회운동이 '민중교회운동'이었다. 민중교회는 분명히 대형교회의 냉전이데올로기와 반공이데올로기, 그리고 이 땅의 가난한 이웃들을 외면한 채 물량주의로 세속화되던 역사 속에 등장한 교회였다.

▲ 시대의 예언자인 문익환 목사님이 해인교회에서 강연하시던 모습. ⓒ이준모

해인교회가 설립될 때 설립 취지문에는 "교회개척의 목적은 선교를 위한 것이고, 가장 중요하게 선교해야 할 사람은 우리 주변에 있는 민중(노동자)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해인교회는 민중과 함께하는 교회, 민중의 교회라고 하는 점을 분명히 했다. 교회개척이라는 이면에는 "이렇게 교회가 많은데 왜 교회를 또 세우는가"라는 물음이 있었는데, 그 답이 되는 취지문에 밝힌 내용을 보면 교회가 당시 노동자들이나 약자들을 외면하고 있었다는 역사적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교회는 지금도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을 별로 갖고 있지 않다. 노숙자들이 즐비한 서울역이나 을지로 주변에 있는 대형교회들이 운영하고 있는 노숙인 쉼터가 있는가? 없다. 어쩌다 노숙인에게 식사 한 끼를 대접하고 이로써 기독인 역할을 다 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예수의 주변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늘 즐비했다. 예수가 등장하는 무대에서는 항상 가난한 사람이 등장하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다. 저명한 신약신학자 안병무 박사는 "예수는 오클로스(민중)와 별개로 만날 수 있는 그런 분이 결코 아니다"고 말한다. 예수가 있는 곳에는 늘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있었는데,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는 교회는 가난한 사람들을 외면하고, 저들을 위한 정책은 좌파정책이고 친북정책이라고 하니 참으로 안타까운 노릇이다.

교회를 병들게 하는 이데올로기 망령이 다시 살아나는 듯하다. 그렇다면 다시 예언자적인 사명을 감당하는 교회들이 좀더 강하게 일어날 때가 되지 않았을까? 늘 역사가 말해 주듯이 말이다. 교회운동이 다시 제자리를 찾아야 한다. 교회운동은 다시 성서와 초대교회로 돌아가야 한다.

많은 교인들이 시청 앞에서 열린 교회의 대형집회를 두고 부끄러워한다. 가뜩이나 나라가 혼란스럽고 경제적으로 어려운데, 교회들마저 우익단체들과 손잡고 정치집회를 해대니 '기독교인'이라는 것이 부끄럽다고 한다. 교인들이 직장에서 사회적인 이슈들이 나올라치면 슬금슬금 자리를 물러나거나 교회에 다니는 것을 숨길 수밖에 없다고 한다. 우리 교회는 안 그렇다고 항변도 해보고, 우리 교회의 사회복지선교 프로그램을 소개해 보기도 하지만 직장 동료들이 기독교에 대해, 종교에 대해, 날로 부정적이고 경멸하기까지 한다는 것이다.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다시 교인들이 기독교인 된 것에 자부심을 가질 수 있도록 기독운동의 지평을 열어주어야 할 것 같다. 80년대 초반에 민중교회가 연대운동을 통해 사회변혁운동에 기여했듯이, 생명평화운동의 지평을 통해 안정적인 변혁을 일궈야 할 것 같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성서연구를 통해 예언자적인 성서적 전통을 다시 깨닫도록 교육할 수 있는 성경공부 모임과 기도모임을 활성화해야 한다. 80년대 초반의 성서연구는 역사의식을 높여주고 이론으로 무장하는 기여를 하기는 했지만, 뜨겁게 이 역사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는 모임으로 발전하지는 못했다.

최근 우리 교회가 구역을 나누고 구역에서 성경공부를 시작했다. 교회가 개혁의 대상이 되고, 심지어는 교회가 또 다시 역사발전에 반동을 일으키고 있는 이때에 가장 시급하게 느껴지는 것은 성서공부를 통해 예언자적인 교회의 역할을 회복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있어 우리의 골수까지도 쪼개고 남음이 있듯이, 우리를 변화시키고 우리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며, 예언자적인 말씀을 살아 운동력 있게 하는 일이다.

교회가 교회의 자정능력을 상실한 것처럼, 자기개혁을 하기는 너무나 힘들고 어렵다. 사회가 급변하고 있고, 교회가 하고 있는 프로그램이 많을수록 원칙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늘 가져보지만 때로 실천하지 못할 때가 너무 많다. 성경공부의 중요성이나 기도모임의 중요성을 늘 강조하고 있지만, 강조하는 것만큼 하지 못함은 자기개혁에 철저하지 못한 데 있다.

교회는 예언자적인 목소리를 잃지 않고 교인 한 개인의 내면을 향하여, 교회 자신을 향하여, 사회를 향하여 준엄하게 나아갈 때 교회가 건강해진다. 때로 교인들의 개개인의 잘못과 왜곡된 품성을 보면서도, 목사가 지나치게 개인의 문제를 들여다보는 것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행여 목사가 강하게 권면했다가 교회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을까 고민하기도 한다.

교회의 연대활동을 하면서도 과거처럼 동지에 대한 책임적인 존재가 되려고 노력하기보다는 '좋은 게 좋은거지' 하며 그저 좋은 관계로 족할 때가 있다. 더군다나 지연, 학연, 과거 활동에서의 관계 등을 고려하다 보니 말 못하고 지나칠 때가 너무 많다. 어쩌면 내 자신의 내면적인 문제나 교회의 내부적인 부분에서 눈을 돌려, 우리 사회의 거대담론에만 예언자적인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뒤돌아보게 한다.

이제 교회연대운동에서 교회개혁의 깃발을 다시 들어야 한다. 교회개혁의 주제를 잠시 비켜가는 동안 우리는 예언자적인 목소리를 잃어가고 있었고, 교회가 사회복지선교 프로그램 등으로 지역사회 프로그램에 매몰되는 동안 한국교회를 향한 예언자적인 목소리를 잃었다. 내 교회의 프로그램을 넘어 한국교회가 책임적이고 의로운 한국사회의 주체가 될 수 있도록 교회개혁의 화두는 우리 교회에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다. 진정 교회가 예언자적인 목소리를 잃으면 건강한 교회가 될 수 없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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