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26:31~32)

이번 아테네 올림픽 폐회식에서 오륜기를 중국 베이징 시장에게 이양한 뒤, 전광판에는 'See you in Beijing'이란 글씨가 보였습니다. 평화와 우의와 스포츠정신을 새롭게 다져 대회장에서 '더 발전된 모습으로 서로 겨누어 보자'는 의미입니다. 흔히 영화나 드라마 장면에서는 부부간 서로 사랑이 식어질 때, 신혼 여행지를 다시 찾아가서 거기서 새롭게 첫 사랑을 확인하고 새 출발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마태복음 26장에서는 대제사장과 백성들의 장로들이 가야바 대제사장의 아문에 모여 예수님을 잡아 죽일 모의를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27장엔 빌라도 법정에서 재판을 받아 사형선고를 받으시고, 골고다 언덕 십자가에서 운명하시고, 무덤에 들어가셨다가 3일후 부활하여  제자들을 만나 새로운 사명을 맡긴 장면들이 나옵니다.

사실 갈릴리는 예수님과 베드로를 위시한 제자들이 처음으로 만난 곳입니다. 이를테면 갈릴리 호숫가는 청춘남녀로 말하면, 첫 만남의 장소요, 스승이 제자를 부르는 곳이요, 상봉한 장소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서 (마4:18) 이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 첫 출발이 심복 제자를 선택한 곳입니다. 그들은 어부들로서 갈릴리 호숫가에서 고기잡이로 호구지책을 해결했습니다. 그러나 일개 어부에서 구속사적 의미에서 메시아의 제자로 승진한 감격스런 곳이기도 합니다. 끈끈한 모든 가족과 인간관계를 버리고 스승인 예수님을 따라나선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라 다닌 지난 3년 세월, 스승님의 크신 능력과 기사와 이적을 통해서, '성공의 길'이 훤히 트인다고 생각했습니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요청했습니다.(막10:35~45) 부와 권력과 명예를 얻을 것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자 수련 3년 말기에 스승의 이념은 제자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너무나 차이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나를 따라 오려면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할 것이다. 내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잡혀 죽을 것이다. 한 제자는 배신할 것이고 너희는 전부 나를 부인하고 다시 고기 낚으려고 갈릴리로 갈 것이다. 그리고 부활 후에 주님은 "다시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말씀하십니다. 전연 생각지도 않은 엉뚱한 말씀만 하기 시작했습니다. 갈릴리지방은 비옥한 농토로, 바다 주변의 사람들은 어업으로 생계를 꾸려가는 순수한 서민들이 살던 곳입니다. 

유다가 회계를 맡은 것을 보면, 제자 사이에서 성실성을 예수님과 동료들에게 인정을 받았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유다는 다른 제자보다 남방지역 출신이기에 정치적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민족주의자였고, 로마 속박에서 해방을 간절히 희망했습니다. 그런데 3년 말기에 스승의 사상은 자신의 이상과 현격한 차이가 났습니다. '내 나라는 여기 있지 않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라.' 이런 말씀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도, 납득이 가지도 않을 뿐 아니라 결국에는 이데올로기의 갈등이 생기게 됩니다. 이것이 유다가 스승을 은 30량에 판 근원적 이유라고 합니다.

소명감이 해이해지고, 처음 갈릴리에서 만났던 사랑과 애정이 식어져 그 방향과 방법이 잘못된 것을 아신 주님은, 다시 첫 만남처럼 새롭게 그들의 가슴에 재연시킬 필요가 있어서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말씀한 것입니다. 부활 후 위대한 사명을 다시 일깨워 준 갈릴리 그 바닷가였습니다.

우리들도 처음 은혜 받던 그때 그곳으로, 신앙이 식어질 때마다 처음으로 돌아가 거기서 더 성숙된 출발을 해야겠습니다. 은혜 받던 그 순간, 감격스럽던 교회 생활을 환기해서 그 출발 지점으로 다시 돌아가 새로운 사명을 재확인했으면 합니다.

오늘 한국교회의 현주소는 교회의 권력화, 교회 재정 비리 의혹, 교회성장의 정지 내지 감소 추세, 교회세습, 신앙공동체의 조직폭력화(편가르기), 무질서(무법천지), 총회·노회·당회, 비민주적 운영(거수기 숫자로 불법도 결정), 신학의 빈곤 등 어느 것 하나 자유롭지 못합니다. 한국교회는 이 민족 앞에 희망을 주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한국교회 지도자들은 현재 가는 길을 일단 멈추고, 가는 길이 복음에 바람직한 길인가, 보편적 상식이 통하는 결정인가를 반성해야 합니다. 원인을 철저히 규명해서 다시는 그런 전철을 밟지 않도록 하잔 말입니다. 3·1운동의 33인 중에 16명의 교계지도자들이 참여한 모습처럼 우리도 그러한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이런 정황으로 돌아가야 하겠습니다. 이를테면, 한국의 "갈릴리에서 만나자"는 것입니다. 실패를 뼈저리게 회개하고, 새로운 거룩한 사명을 이어받아야 하겠습니다. 자기 영광과 성공과 부활의 기독교만 좋아할 것이 아니라, 주님을 위한 고난과 우리 민족의 아픔을 부둥켜안고 같이 우는 교회. 십자가의 기독교를 이 민족 앞에 보여주어야 하겠습니다. 다시 이 나라 백성들이 교회를 우러러 보고, 기독교인의 절제와 겸손과 이웃사랑을 보고 우리를 존경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그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해야 하겠습니다.

그 원점에서 새 출발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계시록 2장 1~4에서 에베소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너희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2:4).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교회의 존재의의)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는 경고의 말씀을 명심했으면 합니다.

실패 없이 승승장구하는 것보다 실패에서 재기할 수 있는 것이 더 귀하고 주님의 사랑을 받을 대상이 됩니다. 베드로에게 재기의 기회를 주신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찬연한 새로운 교회 역사의 맥을 계승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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