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광야에서 40일 동안의 수행을 마치시고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은 자기가 자라난 갈릴리 나사렛 동네의 회당이었다. 바로 그때가 안식일이었다. 비로소 예수의 사역이 시작된 셈이다. 예수는 회당에 들어서자마자 두루마리에 기록된 이사야 선지자의 글을 읽기 시작했다.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 주고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누가 4:18~19)

예수가 인용한 이사야 61장의 말씀은 대부분 회당에 모인 사람들이 잘 아는 구절이었다. 예수는 이날 밤에 회당에 모인 사람들에게 참신한 아름다움을 느끼게 해 줄 정도로 그 말씀을 멋지게 읽었던 것이다. 성서를 다 읽고 나서 두루마리를 시중들던 사람들에게 되돌려 준 다음, 그는 방금 들은 말씀이 바로 이 자리에서 이루어질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회중들은 예수의 말에 감탄을 한다. 저 훌륭하고 당당한 언변과 몸짓, 명쾌한 논조, 저 낭랑하고 유창한 목소리…. 예수는 이제 30세의 나이에 불과하지 않은가. 사람들은 그 청년이 누구라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란다.

"저 사람은 바로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하며 수근거렸다. 변두리 출신 요셉의 아들이 이제 어른이 되어 저처럼 훌륭한 감명을 주고 있는 것이다. 그의 어머니는 얼마나 자랑스러울까. 회당안의 분위기는 예수의 거침없는 행동으로 고무되기 시작했다.

회당안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예수께 쏠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예수는 엉뚱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닌가? "사실 어떤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누가 4:24) 무엇인가를 암시하는 듯한 이야기가 아닌가. 무엇인가 회중들의 관심과 예수의 관심이 다른 데 있는 듯하다. 그리고 회당안의 분위기는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전개되기 시작한다.

예수는 상황이 자기에게 유리할 때 이야기를 그만두어야 한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과거에 있었던 여러 가지 일들을 설명하기 시작한다. 전술상의 큰 실수였을지도 모른다. 한창 분위기가 고무되어 있는 판에 예수는 초를 치기 시작한 것이다.

예수는 따뜻한 환대에 대해서는 아랑곳하지 않고 엘리야 시대와 엘리사 시대에 있었던 이야기를 소개하기 시작했다. 엘리야 시대에 이스라엘에 가난한 과부가 많이 있었는데, 하느님의 부름 받은 종 엘리야는 자기 동족의 고난을 외면하고 오히려 시돈 땅에 있는 이방인 여인을 축복해 주었다는 것이다. 그 다음 또 엘리사 시대에 이스라엘에 많은 문등병자가 있었는데 하느님의 종 엘리사는 자기 동족의 문둥병은 고쳐주지 않고 수리아 사람 나아만의 병을 고쳐주었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은총이 고대되던 당시에 막상 하느님의 은총은 그것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던 사람들에게는 내리지 않고 이방인들(outsiders)에게 내렸다는 이야기였다. 예수가 이렇게 환영받지 못할 이야기를 계속하자 사람들을 사로잡았던 그의 매력은 곤두박질하고 말았다. 회당 안은 갑자기 썰렁해지기 시작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인가?

교회에 나가지 않고 집에 앉아서 TV나 보고 있는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꼬박꼬박 예배를 보러 교회에 출석하고 있는 우리들보다 하느님께 더 깊은 관심사가 된다고 말하고 있는 이 건방진 풋내기는 어떤 자일까? 바로 이것이 이사야의 저 기억할 만한 말씀이 뜻하는 바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이단이다! 몹쓸 놈이다! 그러자 회당 안의 온도가 갑자기 치솟더니 비등점을 넘어뜨렸다.

이야기는 문자 그대로 모험극(cliffhauger)이 되었다. 이야기를 듣고 화가 난 사람들은 예수를 회당 밖으로 몰아내더니, 그들은 모두가 나사렛 근처에서 가장 높은 산꼭대기로 예수를 끌고 올라갔다. 예수를 죽일 작정이었다. 고향에 돌아와서 어른들을 훈계하려 드는 마을의 젊은 애송이를 단단하게 혼을 내 줄 심산이었다. 그러나 저녁 어둠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모두가 흥분한 상태였는지는 몰라도 예수는 간신히 피신해서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나사렛 회당 안에 있었던 사람들이 예수의 이야기를 듣고 무엇 때문에 그처럼 난폭한 행동을 하기까지 화가 났을까?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부터 선민사상을 갖고 있었다. 하느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하셨고 구원하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른 나라 사람들은 모두 이방인이라고 불렀고 그들은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에서 제외되었다고 믿어왔다. 예수는 이들의 그릇된 선민사상에 정면도전을 하셨던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예수의 진면목을 보게 된다.

예수의 관심은 선교초기부터 하느님의 구원의 행위는 이스라엘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온 인류를 향한 것임을, 다시 말해 복음의 지평(地坪)을 넓히신 것이다. 예수의 생각은 지금 이스라엘 사람들이 착각(잘못 생각하고 있다는)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느님이 이스라엘백성을 택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그들로 하여금 하느님의 선교의 도구로 삼기 위해서, 온 인류를 섬기는 도구로 삼기 위해서다. 그러나 그들은 그릇된 서민사상으로 하여금 하느님의 구원의 행위를 독점하려는 집단적 도그마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나자렛 회당 안에 있었던 유대인들은 평소 하느님에 대하여 잘 안다고 하는 사람들이었다. 성경에 대해서도 잘 아는 사람들이었다. 하느님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군중심리는 입맛에 따라, 금방 생각이나 행동이 달라진다. 듣기 좋은 말을 하면 금방 기분이 으쓱해지고 듣기 안 좋은 말을 하면 금방 표정과 태도가 달라진다. 그리스도인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 큰 장애물이 무엇인가? 바로 자기 자신이다. 그 장애물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가? 신앙의 교만으로 나타난다.

교만한 사람은 대단히 이기적이고 자기주장이 강하다. 개인의 교만이 발전하면 집단적인 독선이 된다. 독선이라는 말은 상대방은 다 틀렸고, 나만, 우리만 옳다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하느님의 이야기만 나오면 독점하려고 한다. 하느님의 사랑에 대하여 전문가처럼 행세한다. 교만 때문에 눈이 멀었는데, 자신의 영적인 상태를 모르고 잘 보인다고 생각한다. 아예 보지 못한다고 말하면 좋을 텐데 잘 보인다고 하닌 그것이 문제이다. 일종의 착각이다.

소설가 김성동 씨는 30년 전에 불가에서 옷을 벗고 나와 소설가로 변신하여 「만다라」라는 소설을 썼다. 그 소설이 영화화되어 크게 히트한 적이 있었다. 그때 주인공으로 등장한 배우가 안성기 씨였다. 만다라에서 파계승(전무송)으로 나오는 사람이 자기를 따라온 제자(안성기)에게 묻는다.

"작은 새가 있었거든. 어떤 사람이 그 작은 새를 유리병에 넣었지. 그리고 매일 새 모이를 죽는 거야. 새는 유리병에서 자라 이제 큰 새가 되었던 거야. 그런데 유리병 주둥이가 작아서 새가 밖으로 나올 수가 없는 거야. 어떻게 하면 새가 유리병 밖으로 나올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새가 유리병에서 나올 수 있을까? 유리병을 깨트리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 하지 않고는 구원이 없다. 희망이 없지 않은가. 지금 한국교회는 유리병에 갇혀 있는데도 갇혀 있는 줄 모른다. 그것이 문제다. 종교적 교만과 독선이 얼마나 무서운지 모르고 있다. 소름끼치는 일이다.

예수가 광야에서 40일 수행을 마치시고 나사렛 회당 안에서 있었던 이야기로 오늘 우리를 보자. 예수의 초발심(初發心)으로 한국교회를 보자는 말이다. 작금의 한국교회는 많은 문제에 직면해 있다. KBS가 말하지 않아도 한국교회는 지금 총체적인 위기이다.

교회의 권력화(대형화), 교회 재정의 불투명, 교회의 성장제일주의, 교회세습, 교파주의, 신학의 빈곤 등…. 어느 것 하나 자유롭지 못하다. 한국교회는 이 사회에 희망을 주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어느 것도 예수가 원하시는 것이 아니다. 예수의 가르침에서 너무 벗어나 있다. 예수가 싫어하고 미워하는 일만 골라서 하는 것 같다. 한국교회는 지금 중병에 걸려있다. 그런데 중병에 걸려 있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것은, 중병에 걸려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어제 저녁 KBS의 ‘선교 120년 한국교회를 말한다’는 프로를 보았다. 텔레비전을 잘 안 보는데 하도 야단법석을 떨어서 도대체 KBS에서 무슨 내용을 담았을까 궁금했다. 조금 싱거운 듯 했지만 비교적 균형감각을 갖고 한국교회의 과거와 현재, 공(功) 과(過)를 다루었다고 생각한다. 한국교회를 전망하면서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교회가 살아남기 위해선 점점 작아지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위해 사회봉사, 구제, 선교에 더욱 치중해야 하며 교회세습은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하나도 틀린 말이 없다.

그런데 한기총 소속 목사들이 수천 명의 교인들을 데리고 KBS로 몰려가서 "KBS가 무슨 자격으로 한국교회를 공격하느냐?"고 거칠게 데모를 했다. 입에 담기조차 어려운 욕설을 퍼부으면서 기도가 아니라 "KBS 사탄 마귀 회개하라!"고 저주를 퍼부었다고 한다. 완전 미치광이 정신병자들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안 믿는 사람들이 이들의 행동을 어떻게 보겠는가?

누가 우리 교회를 비난하고 목사를 욕했다고 치자.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조용하게 왜 우리 교회를 비난하고 목사를 욕했을까 깊이 반성하고, 또 그것이 부당한 것이었다면 그 오해가 풀릴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바른 자세가 아니겠는가?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고 목사가 교인들을 동원해서 그 집 앞까지 쳐들어가서 소리소리 지르고 회개하라고 통성기도 하고 저주를 퍼부었다고 생각해보자. 과연 있을 수 있는 일이겠는가?

예수가 바른 이야기를 했다고 화가 난 회중들이 예수를 산꼭대기로 끌고 가서 밀쳐 죽이려고 했다. 하도 교회가 부패하고 제 구실을 못하니 KBS가 한국교회 정신 차리라고 한 마디 하겠다고 하는 것을 "KBS는 자폭하라!"고 말 할 수 있겠는가? 참으로 유치하기 짝이 없다.

한국교회는 더 매서운 회초리를 맞아야 한다. 따끔하게 회초리를 맞고서라도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회초리가 무서운 모양이다. 어떻게 하든 현장에서 도망치고 끝까지 잘 했다고 저항하고 싶은 모양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 지를 것이다"(누가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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