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를 건물로 보고 건물을 성전으로 생각하여 그 성전을 신성시했던 때가 있었다. 바로 구약시절 성전이다. 그런데 문제는 아직도 이 패러다임에 머무는 교회관을 갖고 있는 교회와 성도가 많은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땅의 성전을 허무시고 3일 만에 새로운 개념의 성전을 다시 일으키셨으니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요 그의 피로 만들어진 주의 백성의 몸이 바로 성전이라고 정의하셨다. 그래서 지금의 조직신학에서는 교회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무리들의 모임이라고 규정한다. 그렇다면 주님은 당신을 믿는 지체들이 모여서 무엇을 하길 원하시는가?

무리가 모인 곳은 어디나 '성전' 

교회의 제일 되는 목적이 예배라고 하는데 이의를 달 크리스천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의 지도자들이 자꾸 구약시대 교회의 개념을 끌어들여서 교회건물 안에서 예배 보는 것만을 예배라고 생각하게 만든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많은 교회의 지도자들이 성경공부 가르칠 때는 분명히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의 모임이라고 가르쳐 놓고는, 예배는 반드시 자기 교회건물에 나와서 드려야만 하나님이 받으신다고 가르치는 이율배반에 빠지고 있다.

심지어는 부산으로 출장 간 성도들도 주일예배는 반드시 서울 본교회에 와서 드려야 한다고 가르치고 그렇게 하는 성도를 일등성도로 자랑하고 있는 실정이다. 언뜻 보면 아무것도 아닌 문제 같으나 근본적인 교회론으로 따져보면 심각한 성경적 오류를 범한다. 이것이 한국교회 성도들을 종이호랑이로 만든 주범이다. 주님을 믿는 사람들의 무리가 교회라면, 그 무리들이 모여 예배를 드리는 곳이라면, 어디나 성전이어야 한다.

또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1조에 인생의 목적은 주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라 했다. 그렇다면 주를 믿는 무리들의 인생의 목적이 주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일이라면, 과연 같이 모여 말씀 듣고 찬양하고 기도하는 그 시간만이 주님을 영화롭게 하고, 무리들이 함께 모이는 모임에서만 그를 즐거워하는 일일까? 한국교회는 아직도 예배를 교회 건물 안에 국한시켜 이해하고 있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크다.

하나님은 '교회 밖' 예배에 더 관심 있으시다

교회의 제일 되는 목적이 예배라는 사실은 분명하지만 교회를 교회 건물로, 예배를 교회 건물 안에서 예식으로만 이해하는 데서 하나님의 뜻을 크게 왜곡하고 있다. 하나님은 성도들이 교회 건물 안에서만 예배드리는 걸로 만족하시지 않으신다. 절대로. 교회건물 밖에서 드려지는 예배에 더 관심이 있으시다. 하나님은 성전 안에 갇혀 계시는 분이 아니다.

주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이 주일날 예배당에서만 이루어진다고 믿는 신앙으로는 주님을 영화롭게 하기는커녕 주님을 답답하게 하는 일이 된다. 인생의 목적, 다시 말해서 교회 그리고 예배의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면 우리의 예배를 다시 점검해야 한다.

교회건물 안에서만 예배 보는 행위는 하나님을 교회건물 안에 가두는 행악자의 행위다. 소위 예배의 성공을 말하는 사람들의 가치관을 들어보면 철저히 인본주의적이다. 예를 들어 찬양에 감동이 있고 말씀에 은혜가 있고 기도에 능력이 있는 것을 예배에 성공한 교회라고 한다. 잘 생각해보라. 무서운 생각이 든다.

찬양에 감동을 받는 자, 말씀에 은혜를 받는 자, 기도의 능력을 받는 자는 예배를 드리는 사람이지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이 아니다. 철저히 예배자가 예배의 중심이니 하나님이 설 자리가 없다. 죽어있어야 할 예배의 제물인 예배자들이 왜 감동과 은혜와 능력을 받아야 하는가? 예배의 점수를 매기며 은혜를 받았느니 은혜가 없느니 말하며 예배의 채점자가 된 예배자들.

이것이 오늘날의 예배라면 주님이 가르치는 예배와는 거리가 멀다. 형제와 다투고 예배하러 나왔거든 먼저 화해하고 나올 것을 말씀하신 주님의 예배정신은, 예배 때 받은 감동과 가르침을 그대로 행동에 옮기고 실천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목적이요 삶이라는 것이다.

영성 있는 지도자들이 교인의 삶을 무력화

그런데 오늘날 목사들과 성도들의 최대의 목표를 영성으로 보는 관점들이 너무 강하게 대두되고 있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영성을 거룩한 정도에 다다르는 것으로 이해하며 수도원에서 씨름하던 영성을 그대로 다시 재현하자며, 공동체 운운하며 중세로 돌아가는 것이 고상한 믿음쯤으로 설파하는 영성 있는(?) 지도자들이 오늘날 교인들의 삶을 무력화시키고 있다. 성도의 목표는 영성이 아니다. 성도의 목표는 영성 있는 삶이 되어야 한다.

오늘날 교회에서 자꾸 능력 있는 성도가 되라고 한다. 각종 은사를 받으라고 한다. 그러나 능력과 은사 받는 것을 목표로 가르치니까 그것을 받은 사람들이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다. 금식기도하여 능력을 받고 많은 은사를 받고나니 자신이 무언가 된 줄로 착각을 한다. 왜? 능력 받는 것이 목표였는데 남들이 받지 못한 능력 받았으니 우쭐해 질 수밖에. 받은 은사와 능력을 주님을 위해 쓰지 않으면 오히려 화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은사와 능력 받는 것이 성도의 목표가 아니다. 성도의 목표는 능력 있는 삶을 사는 것이다. 바울사도가 말한 능력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굶어도 매를 맞아도 견딜 수 있는 능력을 말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지도자들이 콩나물 대가리 따듯 꼭지 다 잘라내고 뒷부분만 말하고 성경을 왜곡했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안에서 내가 모든 일을 할 수 있느니라" 말하면서 자기가 원하는 대로 되는 것을 능력이라 가르친다.

마태복음 25장에 말씀하신 대로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바로 나에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그게 바로 성도에게 가장 중요한 예배며 구원이며 심판이라는 것이다. 행위 구원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자는 입으로 구원을 확신하는 자가 아니고, 가난한 자들과 병든 자들과 장애인들을 돌봄으로써 예수님의 근본 사역을 이루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배의 삶과 결실이 없는 사람은 불신자라는 것이다. 그래서 마태복음 25장 심판장에 주님은 담대히 말씀하시길,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하지 않은 자는 모두 불신자로 지옥불에 던진다고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천국의 심판을 말한다는 심판장에서 굳이 은혜니 구원의 확신이니 절대주권이니 하는 잣대로 심판을 말씀하지 않으시고 행위처럼 보이는 비유들만 말씀하셨을까? 슬기로운 다섯 처녀 비유, 달란트비유, 양과 염소 비유를 말씀하시고 결론적으로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하지 아니한 자를 영원한 형벌에 처넣는 것으로 결론을 내리신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은혜로 구원받은 자는 반드시(예외없이) 지극히 작은 자들과 삶을 나눈다는 것이고, 만일 그런 삶이 없다면 그것은 가짜 신자라는 뜻이다. 추수감사절이나 연말에 소외계층을 찾아 섬기는 그런 연례행사로는 영원한 형벌감이라는 것이다. 지극히 작은 자들과 함께 삶을 나누는 삶이 예배의 삶이요, 성도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이다.

결론

1. 교회의 사역이 결코 예배와 사회사역으로 이분화될 수 없다.
2. 성도의 예배는 교회건물 안에서의 예배가 끝나는 시점부터 시작하여 어떻게 예배가 구체화 되었느냐로 그 성패를 판단한다.
3. 지극히 작은 자와 나누는 삶은 결코 선행이 아니다. 우리의 예배 행위요 구원행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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