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대비평>은 2000년 가을호에서 [쟁점 - 한국의 지식권력 시리즈] 세 번째로 '권력으로서의 한국종교'를 다뤘다. 주제에서도 암시되듯이, 한국의 종교는 이미 하나의 권력으로 상징되고 있다. 그 권력의 힘이란 언론계와 더불어 절대성역으로 자리매김되어 있기도 하다.

'한국종교, 열광과 침묵 사이에서'(장석만) '개신교와 성장주의 이데올로기'(이진구) '불교계, 종단 권력의 정치학'(김종찬) '한국 천주교회의 빛과 그림자'(조현범) 등 4개의 글로 구성돼 있다. <뉴스앤조이>는 그중 이진구 선생(서울대 종교학 강사)이 쓴 '개신교와 성장주의 이데올로기' 게재를 요청했고, 이진구 선생이 기쁜 마음으로 흔쾌히 응했다. 이진구 선생의 글을 두 개의 작은 주제로 나눠 세 차례에 걸쳐 연재하고 있다. 세 번째 얘기다.




5. 교회 안의 '파시즘'
국가권력과 유착하고 타종교에 대하여 정복주의로 일관하는 개신교 종교권력의 내적 작동방식은 어떠한가? 이 점에 주목해 보자. 한국 개신교는 한 지붕 아래 여러 가족이 함께 모여 살고 있는 모양을 하고 있다. 이 가족들 전체를 지배하는 주인은 없다. 단지 여러 가족 대표들이 공통의 이익을 도모하고 공동의 적에 대처하기 위해 일종의 입주자대표회의를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중 진보적 색채를 띤 가족들은 NCC라는 연합기관을 만들었고, 좀 보수적 색채를 띤 가족들은 '한기총'(한국기독교총연합회)이라는 기관을 만들어 운영하고 있다. 그리고 그 가족들의 계보를 보면 원래는 몇 개의 대가족(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침례교 등)이 있었으나 이들이 핵분열을 하여 현재는 1백개가 넘는 소가족으로 분화되어 있다.

이러한 교회 분열은 신학적 노선의 차이보다는 교단의 헤게모니 장악을 둘러싸고 일어났다. 극심한 교회분열로 인해 개신교의 사회적 공신력이 저하되기는 하였지만 그와 반대로  개신교 전체의 교회 숫자와 신자 수는 증가하는 역설적 현상이 일어났다. 모(母) 교회에서 떨어져 나간 분파들이 종교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교회 개척에 필사적으로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교회 개척에 성공한 몇몇 교회는 짧은 기간 내에 비약적 성장을 거듭하여 대형교회로 발돋움했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성인 신도가 1만명이 넘는 교회가 14개, 성인 신도 1천명 이상인 교회는 1천개 정도라고 한다. 주일 예배에 성인 신자가 1천명 이상 모이는 교회를 대형교회라고 할 때, 한국 교회에서 대형교회가 차지하는 비율은 2% 정도이다. 이러한 대형교회들이 개신교 성장의 주역을 담당하였을 뿐만 아니라 개신교 종교권력의 핵심부를 장악하고 있다. 대형교회의 목사는 대외적으로는 개신교 연합기관의 장이나 교단 총회장을 차지하며, 대내적으로는 교회운영에 관한 절대적 권한을 행사하기 때문이다.

총회장은 교단 전체의 운영에서 막강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에 이들을 뽑는 선거는 매우 치열한 모습을 보인다. 선거철이 되면 각 세력 사이에 후보자를 둘러싸고 권력투쟁이 일어나며 이는 결국 금권선거로 귀착된다. 1998년 9월, 한국 개신교 교단 중 가장 거대한 규모를 지닌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의 부총회장 선거가 끝난 뒤 한 전도사가 양심선언을 한 적이 있다. 그는 "선거 당일 아침 재정부장 장로가 가져온 현금 3천만원을 20만원, 30만원, 50만원, 100만원으로 나누어 봉투에 담으며 굴욕감을 느꼈다"면서 "이런 풍토 아래서라면 바울이나 베드로가 총회장으로 출마해도 돈을 쓰지 않고는 낙선할 것 같았다"고 털어놓았다. 총회장 선거에서는 '10당 8락'이라고 하여 10억원 쓰면 당선되고 8억원 쓰면 떨어진다는 이야기가 공공연한 비밀이라고 한다.  

이러한 총회장이나 연합기관장의 후보자는 주로 대형교회의 담임목사이며, 이들이 개신교 종교권력 최상층의 모집단을 구성하고 있다. 담임목사 제도는 1인 지배의 권력편제 방식이다. 그의 아래에는 교회의 규모에 따라 1명에서 수십명에 이르는 부목사가 배치되어 있다. 담임 목사의 제안이나 정책결정에 대하여 부목사들은 거의 반대의견을 제시하지 못한다. 그러한 행위는 권위에 대한 불복종으로 비쳐지고 교회에서 쫓겨날 위험을 자초한다. 따라서 담임 목사 한 명이 교회의 핵심적인 모든 정책을 결정하고 부목사들은 그 지시를 시행하는 집단에 불과하다.

대형교회의 이러한 권위주의적 문화는 '개척교회' 제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오늘날 대형교회의 담임목사는 대체로 '개척교회'에서 출발하여 '입지전적 성공'을 거둔 자들이다. 이들은 오로지 자신의 피땀에 의하여 오늘의 거대한 교회가 세워질 수 있었다고 믿는다. 따라서 교회의 유일한 주인을 자신이라고 생각하고 더 나아가 교회를 자신의 사적 소유물로 간주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교인들 위에 군림하며 부목사나 교직자를 자신의 '심복'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사고방식 속에서는 자신의 분신인 자식에게 교회를 넘겨주는 것이 전혀 이상하게 여겨지지 않는다. 자신의 피붙이만이 그 동안 피땀 흘려 건설해 온 거대한 '제국'을 그대로 보존할 것이며 아버지의 '명성'을 훼손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대기업이 중소기업을 침식하고, 대형 약국이 동네약국의 기반을 무너뜨리듯이, 대형교회는 중소형 교회의 기반을 침식하는 경향이 있다. 교회성장의 목표는 무한하기 때문이다. 수천명 대의 교회는 만 명이 넘는 초대형교회로 성장하기 위해, 초대형 교회는 지상최대 규모의 교회가 되기 위해 다양한 선교방법을 동원한다. 대형교회의 '싹쓸이'라는 것이 이러한 맥락에서 등장하였다. 일요일만 되면 대형교회 소속 대형 버스들이 멀리 떨어져 있는 지역의 타 교회 소속 교인들까지 싹쓸이하여 데리고 간다고 한다. 이는 대형백화점이 셔틀버스를 이용하여 멀리 떨어진 곳에 살고 있는 재래시장 소비자들까지 싹쓸이하여 데려가는 것을 연상시킨다.
  
대형교회는 최신식 시설을 갖춘 거대한 교회건물과 부동산, 그리고 대형 버스를 갖추고 있으며, 대규모 행사를 자주 개최한다. 이러한 거대한 시설을 갖추고 맘모스 행사를 하는데 들어가는 비용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교회 재정의 주요 수입원은 교인들의 자발적인 헌금일 것이다. 그러나 수천명, 수만명의 교인이 내는 십일조를 비롯한 다양한 명목의 헌금 규모는 베일에 가려져 있다. 교회가 재정을 공개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학자들이 한국 개신교 전체의 재정 규모를 파악하려고 노력하지만 성공하지 못한다. 대부분의 교회가 예산 공개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각 교회의 핵심 권력층만이 자기 교회 돈의 행방을 정확히 알고 있을 것이다.
  
교회는 비영리단체로 간주되어 면세혜택이 주어지며 목사에게도 세금이 부여되지 않는다. 이는 종교단체가 신자들의 자발적인 헌금에 의해 유지될 뿐만 아니라 수익사업에 종사하지 않고 국민의 '영적 복지'를 위해 일하는 공익기관으로 인정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교회는 건물의 확장을 위해서 엄청난 돈을 쏟아부을 뿐 가난한 자를 위한 사회복지 사업에는 매우 인색한 것이 사실이다. 즉 오늘날의 교회는 대형건물의 신축을 통해 교세를 과시하고 종교권력을 강화하는 이익단체의 성격을 강하게 지니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거액의 음성 수입이 손쉽게 조달되고 종교재산이 사유화될 가능성이 크다. 한국 개신교 종교권력은 바로 이러한 교회재정의 불투명성 위에 터를 잡고 있는 것이다.
  
개신교 종교권력은 성차별 이데올로기에 근거하고 있으며 그것을 강화시키는 작용을 하고 있다. 한국 교회 신자의 70% 이상은 여성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직의 영역에서 여성은 철저히 배제되어 있다. 대부분의 교파와 교단이 여성 목사 안수를 허용하지 않고 있으며 허용하고 있는 경우라 하더라도 그들의 발언권과 영향력은 극히 미미하다. 유교 사회에서 여성이 제사에는 참여하지 못하고 제사 음식을 마련하는 역할만 하였듯이, 오늘날 교회의 여성신도들은 교회운영보다는 예배 후의 식사 준비와 설거지에 더 많은 시간을 쏟고 있다.
  
교회 내의 성차별은 성폭력 사태까지 몰고 오고 있다. 요즈음 성폭력 상담소에 들어오는 사건 중에 남성 목회자에 의한 여신도 성추행 및 성폭력이 기하급수적으로 증대하고 있다고 한다. '성(聖)스러운' 목회자가 종교적 권력을 이용하여 여성의 성(性)을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내 성폭력은 '발생의 용이성과 처리의 난이성'으로 특징지어진다.

한 피해 여성은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저는 완전히 목사에게 세뇌되어 목사를 예수님처럼 섬겼고, 당시 불받는다던 전도사는 목사를 섬기는 것이 예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가르쳤고, 사모는 목사님 말씀이 하나님 말씀이라고 하면서 한 마디도 의심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가르쳤습니다"(K 희생자의 '탄원서' 중에서)  
  
성폭력 사태가 폭로되어 고발되는 경우에도 남성중심 교회의 치리 구조 하에서는 여성에게 불리한 경우가 많다. 따라서 피해 여성들은 사실 자체를 감추거나 고소를 취하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중요성을 지니는 것은 교회 내에서 목사의 지위가 거의 절대적이며 신자들은 목사의 권위에 맹종하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교회 안의 파시즘'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미시적 권력 관계 속에서 성폭력이 '은혜'의 차원으로 해석되어 수용될 여지가 마련되는 것이다.  


6. 기복주의와 패권주의를 넘어서
오늘날 국가권력은 종교집단을 감히 건드리지 못한다. 잘못 건드리면 수습할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지기 쉽기 때문이다. 다른 사회 영역의 부패에 대해서는 날카로운 필봉을 휘두르는 언론과 방송도 종교계에 대해서만큼은 신중한 자세를 취한다. 자칫하면 윤전기의 가동이 전면 중지되고 방송사의 주조정실이 전면 마비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대의 유일한 '성역'은 종교집단이다.

개신교는 한국 사회에서 가장 거대한 규모와 사회활동을 자랑하는 종교집단이다. 종교집단은 기본적으로 자발적 조직(voluntary organization)이다. 따라서 신자들은 교회로부터 아무런 경제적 보상을 받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소중한 돈과 시간과 몸을 교회에 헌신적으로 갖다 바친다. 그러면 왜 신자들은 아무런 경제적 투자가치가 없는 곳에 엄청난 돈과 에너지를 쏟아 붓는가? 자신들의 '종교적 욕구'를 달성하기 위해서이다. 그러한 종교적 욕구의 저류를 이루고 있는 것은 대체로 육신의 건강과 사업의 번창과 가족의 평안이다. 이른바 '기복신앙'이다.

따라서 신자들의 기복적 욕구를 잘 충족시켜 주는 교회가 번성한다. 오늘날 성공한 교회, 즉 대형교회는 대체로 신자들의 기복적 욕구를 잘 파악하여 그들의 '주문'에 맞는 '기복상품'을 제공한 교회이다. '기복 장사'를 하는 교회는 교인의 숫자에 의하여 그 '효능'을 검증받기 때문에 무제한적 성장을 추구한다. 여기서 기복신앙과 자본주의의 성장논리가 손을 잡는다. 오늘날 한국 개신교는 기복신앙이라는 내용과 자본주의적 성장논리라는 형식을 결합시킨 종교권력으로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개신교 종교권력은 이미 거대한 규모와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승리주의'를 기본 에토스로 하고 있다. 여기에 가부장적 권위주의가 가세되어 오늘날 한국 개신교 종교권력의 기본 속성이 결정되었다. 이러한 성격을 지닌 종교권력이 교회 안과 밖에서 작동하면서 앞에서 살펴본 다양한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효과를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 들어 교회 성장이 둔화되고 교인의 숫자가 상당히 줄어들고 있다. 교회를 찾는 자보다는 교회를 떠나는 자가 더 많다고 한다. 그래서 '교회의 위기' 담론이 개신교계에서 확산되고 있다. 늘 그랬듯이, 내부의 위기가 생기면 외부에서 희생양을 찾는 법이다. 포스트모던 신학과 종교다원주의 신학에 대한 정죄, 여성신학에 대한 공격, 새로운 '이단' 만들기, 타종교에 대한 공세의 강화, 젊은이의 '세속화'에 대한 탄식. 이러한 것들이 '교회 위기'의 '주범'으로 간주되고 있다.

이는 '위기'의 진원지를 은폐시켜 기존의 권력을 정당화하고 유지시키기 위한 교회의 몸부림일 뿐이다. '교회 위기'의 진원지는 '기복신앙'을 이용한 정통주의, 근본주의, 승리주의, 패권주의, 가부장주의의 절묘한 결합에 있다. 최근의 교회세습 문제는 이러한 맥락 속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가 최근의 위기를 전화위복으로 삼아 새로운 의미 창조의 자발적 집단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권력의 그물을 해체하는 작업부터 서둘러야 한다. 이러한 해체작업은 교회가 '자발적 가난'(homelessness)의 에토스에 입각하여 기복지향적 신앙을 넘어서고, 교회운영상의 가부장적 파시즘을 무력화시키고, 종교시장에서 패권주의를 불식하고, 나아가 국가권력과의 밀월이 아니라 통치권력에 대한 비판적 견제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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