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6롬 9:1~5

예배당에 갇힌 신앙

바른 신앙은 행동하는 삶으로 드러납니다. 그렇지만, 한국교회를 생각할 때 '예배당에 갇힌 신앙'을 떠올리곤 합니다. 현실의 문제에 전혀 답을 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말과 겉은 그럴 듯하나, 들어가 보면 실상 성경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조국의 비극적 분단에 대해서도 한국교회는 역시 이러한 모습을 벗어나지 않고 있습니다. 구석구석에 자리 잡고 있는 기독교인의 이중적 삶의 모습을 보며, 라브리 운동의 창시자 프란시스 쉐퍼는 "서글픈" 일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가졌던 민족애는 너무도 진지하고 강렬했습니다. 기독교인은 자신이 처한 현실의 아픔을 결코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인간이 처한 고통에서 출발되었기 때문입니다.

민족의 불신앙은 바울에게 큰 근심이었으며, 계속되는 마음의 고통이었습니다. 설령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멀어져 구원을 받지 못한다 할지라도 조국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사랑에서 멀어진다는 사실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점은 출애굽의 지도자 모세에게도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출32:30-35).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큰 죄를 범하였나이다...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 주옵소서"(출32:31-32).

개인의 이야기

저 개인의 얘기입니다. 10년 반의 독일 유학기간 동안 독일교회사를 공부하여 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서울 방배동 연구실에서 스스로 한 물음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과연 독일교회사 연구가 우리 민족에게 어떠한 유익을 가져다 주었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순간 저는 뭔가 직접적으로 조그마한 공헌이라도 한국교회를 위하여 하고 싶은 마음이 일어났습니다. 그러한 동기로 독일통일에 있어서 독일교회의 역할에 대해서 논문을 쓰게 되었습니다.

우리민족의 분단은 무엇을 의미하나

분단은 분명 민족의 장애입니다. 아름다운 한반도를 두 동강 낸 20세기 아니 유일한 21세기의 분단국, 한민족의 비극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마땅히 가져야 할 자존감에 먹칠을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열등감으로 망가질 수 있는 수치며, 상처입니다. 힘을 못 쓰게 하는 민족의 허리장애입니다.

분단은 복음의 환태평양시대를 가로막고 있습니다. 물론 세계화, 선진국, 경제대국으로 나아가는데 결정적 훼방자입니다. 영적으로 볼 때, 분단은 세계복음화를 대적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2,600만 북한 동포에게, 12억 중국인에게 말입니다. 여름방학이 되면 뜻 맞는 몇몇 동료들과 쪽빛 출렁거리는 동해바다를 친구삼아 배낭을 짊어지고, 15단 기어 자전거를 타고 개성과 평양으로, 함흥과 신의주로, 아니 백두산 넘어 압록강 건너 상해와 북경으로, 그리고 실크로드를 타고 중동과 러시아와 독일과 프랑스, 스위스와 오스트리아로, 더 나아가 지중해 넘실되는 이탈리아, 스페인으로, 아니 검은 대륙 북아프리카의 알렉산드리아를 지나 아프리카 끝까지 전혀 거리낌 없이 복음을 맘껏 날개 달린 새처럼 훨훨 날아 전할 수 있는 세계선교를 가로 막고 있는 방해꾼입니다.

그러기에 휴전선이 걷히는 날 분명 한국교회는 새로운 역사를 쓰게 될 것입니다. 한반도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선명하게 구체화될 것입니다. 여기에 통일을 향한 우리의 비전이 있는 것입니다. 물론 휴전선은 교육적 의미에서 볼 때 '아직'(not yet)의 뜻이 있을 수 있습니다. 아직은 준비하고 기다리라는 말이지요. 아직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는 말입니다.

통일 전 독일교회, 순수한 섬김과 봉사 실천

통일을 위한 독일교회의 역할은 막대했습니다. 동독의 니콜라이 교회에서 모인 촛불기도회, 원탁대담은 통일 바로 전에 큰 힘으로 동독 공산주의가 마지막을 고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그렇지만, 진짜 통일의 원동력이 된 것은 다름 아닌 독일 교회가 분단 45년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동독의 형제들, 가난과 고통 가운데 있는 동족들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섬겼다는 사실입니다. 갖은 어려움에도 동독에 계속적으로 상주하면서 순수하게 섬김과 봉사의 삶을 실천하였습니다.

첫째, 섬김의 신학(Diakonische Theologie)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셨던 예수님을 본받는 교회여야 했습니다. 마땅히 교회는 조건 없는 섬김을 실천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이미 성도는 하나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이 사랑에는 말할 수 없는 수고가 요구되었습니다. 통독 후 이 일을 지휘했던 목사님은 오직 성령의 도우심만이 이 섬김을 가능하게 하였다고 간증하였습니다.

둘째, 실천적 대화(Praktischer Dialog)를 계속했습니다. "배고픈 자에게 먼저 먹을 것을 주라"는 말씀에 순종했던 것입니다. 무신론적 유물론자, 공산주의와 과연 어떻게 관계를 가질 수 있을까요? 사랑이 동반된 대화가 힘이 있습니다. 물론 사랑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사랑은 확실히 보입니다. 실천적 대화만이 힘이 있고, 상대방을 감화시켰습니다. 순수한 사랑을 거부할 자는 없습니다. 그럴 때 그들은 기독교인들을 다르게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더는 '민중의 아편'으로만 신앙을 오해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선입견을 버리고 마음을 문을 열었습니다. 그 뭔가 함께 일을 할 수 있는 출발점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한국교회는 민족의 응어리를 풀어야  

과거의 아픔, 쓰라린 상처만을 기억하는 것으로 끝날 때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한 발자국이라도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마음에 맺힌 응어리를 어떤 식으로든지 풀어야 합니다. 그리고 민족의 미래를 위하여 큰 마음을, 그리고 웅대한 꿈을 꿀 수 있어야 합니다.

첫째, '이미와 아직'의 통일신학을 확립해야 할 것입니다. 천국을 이해할 때 이 두 말로 정의합니다. '아직'(not yet)과 '이미'(already)의 천국입니다. '아직' 성도는 이 땅에 살고 있지만, 그럼에도 '벌써' 천국을 맛볼 수 있습니다. 물론 남북관계는 현실적으로 긴장이 상존하고 있습니다.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만두고 한 대 쥐어박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십자가의 사랑을 전하는 교회는 그래서는 안 됩니다. 죽음을 이긴 부활신앙이 우리 안에 능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통일을 미리 맛보는 노력과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비록 휴전선은 있어도 그 휴전선이 없는 것처럼, 아니 뛰어넘어 한국교회는 어려움에 처한 동포들을 어떠한 모습으로든지 찾아가고 사랑할 때 앞당겨 이미의 통일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아니 통일을 자연스럽게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둘째, 교회는 정치와는 달라야 합니다. 정치 꽁무니를 따라가는 식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더욱 다른 기독교 가치관에 서서 말해야 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원수 되어 나누어졌던 사람들을 십자가의 피로 화목하게 하시고, 하나 되게 하신 은혜를 우리는 늘 잊지 않아야 합니다.

정치논리인 'give and take'도 아니고, 윈윈전략(Win-Win)도 아니어야 합니다. 윈윈전략도 알고 보면 정치논리인 주고받는 식과 다르지 않습니다. 자기 이익을 먼저 생각하는 속셈이 들어 있지요. 우리는 그들이 좋아하면 감사할 뿐입니다. 형제가 울 때 같이 울고, 형제가 기뻐할 때 같이 기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사랑의 빚진 자로 늘 나서야 하고 살아야 할 뿐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법을 성도는 성취하게 될 것입니다.

셋째, 공산주의자도 사랑의 대상이어야 합니다. 기독교의 사랑은 궁극적으로 원수 사랑입니다. 그러기에 원수 사랑에서 제외될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조건 없이 공산주의자도 선교의 대상입니다. 오늘에 이르기 까지 왜 한국교회가 통일에 그저 침묵으로 일관할 수밖에 없었습니까? 공산주의와 기독교의 문제를 어떻게 정립해야 할지를 주저했기 때문입니다. 아니 빨간색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레드 컴플렉스'라고 일컫기도 하지요. 그렇지만, 십자가의 복음은 공산주의도 자본주의도 결코 진리가 될 수 없음을 역설해야 합니다. 분명 그들은 유토피아를 가져다주지 못합니다. 십자가 보혈, 복음 앞에 나아와 무릎을 꿇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오직 십자가, 오직 복음임을 깨닫고 고백해야 할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상처입은 치유자로 서자

그런데, 통일 후 우리 한국이 북한복음화 그리고 세계복음화를 위해서 미리 잊지 않아야 할 일은 두 가지입니다.

먼저, 분단 하에서 꾸준히 형제 사랑을 북한의 동포들에게 실천하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증거하고 보여주어야 합니다. 통일 후에 가서야 그 무언가를 하려고 한다면 이미 늦은 것입니다. 그땐 북쪽 동포들은 남한 교회를 외면할 것이고, 너희는 말로만 사랑을 외치는 위선자라고 도리어 공격을 할 것입니다. "우리가 어려울 때 모른 채 하지 않았느냐", "너희는 도대체 어디에 있었느냐"고 말입니다.

그리고, 한국기독교는 세상에서 삶의 모델이 되어야 합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니"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아니 최소한 욕을 먹어서는 안 됩니다. 기독교의 타락은 결국 남한의 반기독교 무리들에게도 빌미를 주어 통일 후 복음전파에 결정적인 방해요소로 작용하게 될 것입니다.

이미 북한에 철저하게 번져 있는 유물론 사상과 아울러 그들은 '오염을 불러일으키는 무리'로 교회를 매도하여, 어느 순간 선교는커녕 자기방어, 변명에 갖은 시간과 정력을 쏟아야 할 처지에 이를지도 모릅니다. 그러기에 크리스천은 21세기 삶의 모델로 통일한국을 신실하게 준비해야 합니다.

독일인에게도 뭔가 특별한 것이 있습니다. 최근 독일 대통령 요한네스 라우(Johannes Rau)의 16쪽으로 된 긴 퇴임식 연설을 볼 수 있었습니다. 정치가라기보다는 한 사상가의 연설문이었습니다. 제가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는 리하르트 폰 봐이체커 대통령의 1985년의 대 국민연설은 더 놀라웠습니다. 독일민족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습니다. 왜 그럴까요? 여기에는 특별한 민족의 상처, 눈물을 독일인이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동족상잔의 한국전쟁, 남북의 분단, 휴전선은 21세기 지구촌시대 유일무이하게도 우리 민족의 한숨입니다.

그렇지만, 이 상처가 하나님의 축복의 현장으로 바뀌길 원합니다. 우리의 약함이 하나님이 함께 하는 강점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 상처를 통해서 우리민족도 뭔가 다른 민족이 될 것을 믿습니다. 상처가 향기를 발하는 축복이 될 것을 소망합니다. 헨리 나우웬이 말하는 '상처 입은 치유자'로 우리는 나서야 할 것입니다.

짤막한 시(詩)로 말씀을 맺겠습니다.

풀잎에도 상처가 있다

정호승

풀잎에도 상처가 있다
꽃잎에도 상처가 있다

너와 함께 걸었던 들길을 걸으면
들길에 앉아 저녁놀을 바라보면

상처 많은 풀잎들이 손을 흔든다
상처 많은 꽃잎들이 가장 향기롭다
!

주도홍 / 천안대 교수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