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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감이 좋다."

들을 넘어서 불어오는 바람 냄새를 맡으며 나는 그렇게 생각해 본다. 좀 성급한 감이 있긴 하다. 지난번 여름이 견디기 힘들도록 무덥기는 했었다. 지금도 여름의 위세를 유지해도 되는데 그렇게 쉽사리 자리를 거두고 떠나가는 것이 아쉽기만 하다.

"조금만 더 머물렀으면 좋았을 것을."

그래서 이런 소리를 덧붙여 본다. 그러나 그런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내 눈길은 벌써 가을을 향하고 있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 동안 세상살이에서 이미 지나간 것은 떠나가게 놓아두는 것을 체득한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다소 매몰차지만 여름에 대해서 더는 그리워하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지나간 것이다.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것이다. 초가을의 문턱에 서서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가을을 맞이할 준비를 하자."

여름 내내 무더위와 싸우며 힘든 시간들을 보냈다. 힘들었던 만큼 보람도 있고, 지쳐서 쉰 횟수만큼 아쉬움도 남는다. "조금 더 할 수도 있었는데." 그러나 마찬가지로 지난 일에 대해선 아픔도 슬픔도 그리움도 모두 잊어버리기로 했다. 그리고 이제 앞으로 다가올 가을을 바라보러 길가에 나와 들을 스치며 지나오는 가을바람을 맞이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 예감이 좋다."

어쩐지 이번 가을은 무언가로 인하여 풍성할 것 같은 느낌이다. 좋은 일들이 생긴다던가, 좋은 사람을 만난다든가, 좋은 글을 남긴다든가 하는 종류의 풍성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번 가을은 정말 가슴속 깊은 곳에 가을을 가득히 담을 수 있을 것 같은, 아무런 근거도 없는 느낌이 자꾸만 고개를 들고 일어나기에 하는 말이다. 지극히 고요한 평안함으로, 노하지도 성내지도 초조해 하지도 않고, 시간을 흘러가는 대로 바라보며 한 계절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이젠 더 이상 사라져 가고 낡아져 가고 무너져 가는 것이 가슴에 상처를 주지 않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이젠 아프지 않을 것 같다. 그러기에 나는 자꾸만 예감이 좋다는 말을 되풀이 하는 것이다.

인생의 중년. 나는 내 인생의 초가을쯤에 와 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계절, 만추가 이제 그리 멀지 않았다. 만추. 그 깊은 가을이 다가올 때 나는 흑백사진의 근사한 노인들처럼 곱게 양복을 차려입고 복고풍의 안경을 쓰고 지팡이를 두드리며 낙엽이 쌓인 길을 걷고 싶다. 그리고 평안한 어조로 이렇게 말하고 싶다.

"난 내 인생을 후회하지 않는다."

이제 가을의 입구에 서서 나는 그것이 그렇게 어렵기만 할 것 같지는 않다는 느낌을 갖는다. 아직은 조금 더 많은 것들을 비워야 하고, 아직은 조금 더 세상을 알아야 하고, 아직은 여름내 다 하지 못한 일들을 마무리해야만 한다. 그러나 내 인생의 봄부터 지금까지 줄곧 지녀온 소망을 이루는 일이 그다지 어렵지 많은 않은 것 같은 느낌이 들기에 하는 말이다. "예감이 좋아."

그래 아마도 난 내 인생에 아쉬움을 남기지 않고 생을 마감할 수 있을 것 같다. 바람과 많은 싸움을 치러왔다. 바람과 맞서려고 노력했고, 일부러 바람을 찾아 먼 길을 떠나기도 했었다. 그러다가 정이 들었나보다. 난 바람과 벗이 되었다. 바람과 싸우던 내 가슴에 박혀있던 날카로운 가시가 빠진 자리에 커다란 구멍이 생겨버린 것이다. 바람은 그 사이로 지나다니며 재롱을 부리고, 난 그 모습을 바라보며 실없는 사람처럼 헛웃음을 웃는다.

이제는 내 가슴에 막힌 것이 없기 때문이다. 편안하다. 마치 세상을 두루 돌아다닌 사람처럼 더 이상의 욕망은 없다. 나를 끈질기게 쫓아다니며 끊임없이 나를 괴롭히던 그림자가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가을바람이 그놈을 싣고 멀리 사라져 가는가 보다.

저 멀리서 들려오는 그놈의 비명소리를 들으며 난 내 가슴을 쓸어내린다. 이젠 된 것이다. 이젠 편안한 가을을 맞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편안한 휴식을 위한 마지막 준비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맞다. 예감이 좋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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