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물어 해질 때에 모든 병자와 귀신들린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 온 동네가 문 앞에 모였더라 예수께서 각생 병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어 쫓으시되 귀신이 자기를 알므로 그 말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시니라" (마가복음 1:32~34)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계실 때에 세 가지 일을 하셨습니다. 가르치시고, 천국복음을 전파하시고, 그리고 약한 자와 병든 자를 고치는 치유사역을 하셨습니다. 본문도 그 중의 하나, 치유사역을 하신 장면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읽다가 유독 눈을 끄는 한 부분을 발견했습니다. 첫 부분 '저물어 해질 때에'란 부분입니다.

마가가 기록할 당시의 상황은 종이도 귀하고 그럴 때인데 글자 한자라도 줄일 것이지 굳이 그렇게 '저물어', '해질 때에'라고 같은 의미의 말을 되풀이해서 기록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냥 '해가 진후' 라던가 '그날 밤에'라고 기록하면 될 터인데 라고 생각을 하다가, 아니지. 성경의 기록은 말 한마디가 다 뜻이 있지 하는 생각에 다시 한 번 차분히 검토해보기로 했습니다.

개역한글에는 '저물어 해질 때에'라고 번역을 해 놓았고 아가페 쉬운성경을 찾아보니 '그날 저녁 해가 지자'라고 번역을 해 놓았습니다. 현대인의 성경은 '날이 저물었을 때에'라고 내가 맨 처음 한 생각과 같이 번역을 해 놓았습니다.

그런데 영어 성경을 찾아보니 확실하게 해가 진 것을 강조하고 있었습니다.

(NIV) When the sun was setting
(NKJV) When the sun was setting
(NASB) While the sun was setting

그러니 우리나라 개역성경은 번역이 충분하지 않습니다. '저물어 해질 때에'가 아니고 '저물어 해가 진후에'가 더 정확한 번역입니다. 또 같은 내용을 기록한 누가복음과 마태복음을 찾아보았습니다. "저물어 해진 후에 각색병으로 앓는 자 있는 사람들이 다 병인을 데리고 나아오매 예수께서 일일이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고치시니"(누가복음 4:40).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자를 다 고치시니"(마태복음 8: 16).

누가복음과 마태복음에는 그저 평범하게 해질 적에, 해가 질 때, 저물매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 마태복음에 비해서 마가는 유달리 '해가 진후'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마가는 해가 진 것을 그렇게 강조하고 있을까? 해(선)가, 해가 지자. 혹시 이 말은 그냥 단순히 지나가는 말이 아니라 해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소설식으로 말하면 복선이 깔린 단어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마가복음 1장을 천천히, 아주 천천히 읽어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21절에 와서 제 눈이 다시 한 번 멈췄습니다. '저희가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성경에서–특히 신약에서- 안식일이란 시간이 나타나면 그 뒤에 무언가 일이 벌어집니다.

그렇다면 안식일과 이 '해가 진후에'라는 말은 무슨 관련이 있을까? 그래서 우선 그 안식일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를 살펴보았습니다. 성경의 기록에 의하면(21~22) 그 안식일에 예수님께서는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고 귀신들린 사람을 치료해주시고(23~28) 회당에서 나와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셔서 열병 걸린 시몬의 장모를 치유해주셨습니다.(29~31)

그렇게 21절부터 31절까지 안식일에 일어난 사건을 기록한 것입니다. 그리고 32절의 기록이 나옵니다. 그러면 32절도 역시 같은 그 안식일에 일어난 일일까. 저물어 해질 때에입니다. 그렇지 같은 날, 그러니 안식일이지라고 생각하다가, 이게 유대인의 날짜니 우리나라 식으로 계산으로 하면 안 되지 하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우리식 계산으로는 분명 같은 날이지만 유대식으로 보면 달라집니다.

그래서 유대인의 시간계산으로 따져보기로 했습니다. 유대인의 시간계산은 해가 진후 하루가 시작되어서 다음날 해가 질 때까지를 그날 하루로 계산합니다. 그러니 우리나라 식으로 보면 해가 져도 그날, 같은 날인데 비하여 유대인의 날짜 계산법에 의하면 해가 지면 이제 다음날로 넘어간 것입니다.

'저물어 해질 때에' 행간, 백성들의 애타는 심정 묻어있어

그래서 이런 것을 종합해서 32절을 읽어보니, 32절의 '저물어 해질 때에'라는 말은 그 날 안식일이 지나고, 안식일의 해가 떨어지자마자 이런 말이 됩니다. 그렇게 안식일이 지나니 병들고 귀신들린 백성들이 모여들어 왔다는 것입니다. 안식일에는 병자를 고치지 못하니 해가 지기를 애타게 기다리다가 해가지니 비로소 병자와 귀신들린 자들을 예수님께 데려온 것입니다. 마가는 그것을 말하기 위해 저물어 해질 때에 'When evening came, after the sun had set'라고 기록을 해 놓은 것입니다.

그렇게 분석을 하고 나니 그제야 마가가 '저물어 해질 때에'라고 기록한 그 행간에는, 어서 안식일이 지나갔으면 하는 백성들의 애타는 심정이 그대로 묻어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마가는 그렇게 저물어 해질 때에라고 적어 놓아 그 말을 통해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이야기해주려고 했던 것입니다.

백성들이 비로소 해가 지자 모여들었다.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냐? 해가 쨍쨍 비칠 때 와서 고쳐도 시간이 모자랄 터인데 안식일이라는 율법에 잡혀 해가 떠 있을 때에는 나오지 못하고 숨죽여 기다리고 있다가, 해가 진후 비로소 나올 수밖에 없는 그 백성들의 안타까운 현실을 마가는 '저물어 해질 때'라는 말 속에 담은 것입니다.

저는 오늘 마가가 '저물어 해질 적에'라는 말로 시작한 32절을 비롯하여 오늘 본문을 통해 누가가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첫째, 마가가 가지고 있는 백성들에 대한 따뜻한 시각입니다.

마가는 '해가 진후에 모든 병자와 귀신들린 자가' 모였다고 기록합니다. 33절을 보십시다. '온 동네가 문 앞에 모였더라'라는 말을 한번 보십시다. 이 말이 굉장히 사실적인 기록입니다. 만일 '온 동네가 집안에 모였더라' 하면 "에이, 온 동네 사람이 들어갈 집이 어디 있어? 아무리 집이 크다고 해도 한집에 들어갈 수 있나?" 라고 생각을 하겠지만, 그러나 마가는 분명 '온 동네 사람이 문 앞에 모였더라'라고 기록합니다.

온 동네 사람이 교회 문 앞에 모였더라. 물론 가능한 이야깁니다. 지난번에 보니 어느 아파트에서 소방훈련을 하는데 모든 사람들이 아파트 현관 앞에 모여 있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마가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입니까? 고난 받고 힘들고 어려운 사람, 병들어 마음이 아프고 몸이 아픈 사람. 다 거기 모여서 예수님께서 손 대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너무나 안타까웠기에 '온 동네 사람이 다 모였다'라고 표현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상록수라는 소설에는 채영신이 운영하는 학교에 못 배운 아이들이 모여드는데 너무 많이 모이니까, 일본경찰이 수상히 여겨 인원수를 80명으로 제한을 합니다. 채영신은 눈물을 흘리며 인원 초과된 50명을 쫓아내는데 그 울며불며 쫓겨난 아이들이 집에 돌아가지 않고 담 너머로 또는 뽕나무위에 올라가 채영신의 수업을 듣습니다. 그 부분을 잠시 인용하자면 이렇습니다.

"창밖을 내다보던 영신은 다시금 콧마루가 시큰해졌다. 예배당을 두른 야트막한 담는 쫓겨나간 아이들이 머리만 내밀고 죽 매달려서 담 안을 넘겨다보고 있지 않은가? 고목이 된 뽕나무 가지에 닥지닥지 열린 것은 틀림없는 사람의 열매다."

상록수의 저자 심훈은 왜 이런 장면을 그렸을까요? 그렇게 쫓아내는데도 아이들은 왜 가지 않고 모여든 걸까. 아이들은 뽕나무위에 올라가기를 좋아한다? 아이들은 담 넘어 보기를 좋아한다? 그래서 주의하도록 한다? 아니지요. 배울 기회가 없어 안타까운 그 시절, 그 백성들의 마음을 그렇게 묘사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본문에서 마가는 그렇게 백성들의 마음을 묘사해 놓았습니다. 해진 후에 모든 백성이 모여들었다. 문 앞에 다 모였더라. 백성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 백성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마가는 그렇게 표현 했습니다. 그렇게 묘사한 마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현재, 우리는 어떻습니까? 인생의 진정한 의미를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에게 대하여 우리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본문을 기록한 마가의 심정을 십분의 일이라도 우리가 이해한다면 그런 사람들에 대한 태도가 달라져야 한다고 저는 말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마가의 마음을 닮아야 합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그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예수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고 알리다

또 보십시다. 34절에 마가는 '예수께서 각색 병든 모든 사람을 고치시며'라고 기록합니다. 저는 이 말을 문자 그대로 믿습니다. 예수 앞에 나오기만 하면 못 고칠 질병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날, 해진 후에 몰려온 사람들을 모두 온전하게 고쳐주셨다 믿습니다. 마가는 각색이라는 말로 그것을 더 한층 강조합니다. 예수께 나아오기만 해라. 그리하면 그 어떤 병이라도 고침 받을 수 있다 하는 의미로 '각색'이라는 말을 집어넣은 것입니다.

여기 이 말속에는 마가가 가지고 있는 예수에 대한 확신이 들어 있습니다. 또한 그 말에는 '그 어떤 사람이라도 오기만 하세요. 병들도 힘들고 지친 사람들이여, 예수님께 나아가 오기만 하세요'라는 권유의 뜻도 숨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백성들의 안타까운 현실을 충분히 이해했던 마가에게서 또 하나, 살펴볼 수 있는 것은 마가는 예수님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이 32절과 그 뒤 기록을 통해 마가는 예수님의 마음을 우리들에게 알려주려고 합니다.

해가 지자 갑자기 우~ 하고 몰려온 백성들을 볼 때 예수님께서 그 이유를 몰랐을까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그 이유를 환히 아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안식일의 진정한 뜻을 외면한 채 외면적이고 형식적으로 변해버린 그 안식일제도가 백성들이 병에서 고침을 받는데, 은혜를 받는데 장애가 된다는 것을 아신 예수님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너무 안타까운 마음에 먼저 예수님은 거기 모인 백성들의 모든 각종 병을 다 고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모인 사람 모두를 일일이 손을 얹으시며 안수하시고 고쳐 주셨습니다. 모두를 한꺼번에 싸잡아서 병에서 나아라 하신 것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 사정을 다 헤아리시고 그 아픔을 일일이 감당하여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누가가 기록한 누가복음이 더 실감이 납니다.

기록에 의하면 "해질 적에 각색병으로 앓는 자 있는 사람들이 다 병인을 데리고 나아오매 예수께서 일일이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고치시니"(누가복음 4: 40).

누가는 같은 내용을 기록한 부분에서 '일일이'라고 표현을 했습니다. 일일이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고치시니 예수님이 사역방법 중 가장 많이 사용하신 방법이 바로 '일일이'입니다.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다니지 않겠느냐?"(누가복음 15장).

여기서 이 양을 치는 목자는 어떻게 자기 양이 한 마리 없어진 것을 알게 되었을까요? 말이 1백 마리지 그것을 간수하는 것이 말처럼 쉽지는 않습니다. 만일 주일학교 학생 1백 명을 데리고 소풍을 간다고 해 봅시다. 그 선생님 아마 목이 쉬고 하여간 고생 좀 하실 것입니다.

그 양 한마리가 없어진 것을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 저는 몇 가지 가능성을 상상해 보았습니다.

첫째 가능성은 다른 사람 혹은 지나가던 다른 목동이 알려주는 경우입니다. 어이 김서방, 저기 골짜기 건너오다 보니 양 한마리가 헤매고 있던데 우리양은 다 있으니 자네 양이 아닌지 몰라 매면서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김서방 목자는 그제야 부랴부랴 자기 양을 세어보고 나서 "우리양이 맞습니다, 맞구요" 하면서 허겁지겁 그 양을 찾으러 가는 경우입니다.

둘째 가능성은 이 김서방 목동이 평소에 열심히 자기 양을 세는 것입니다. 아침 먹고 세고 점심 먹고 한번 세고 쉬고 나서 한 번 더 세고. 유대인들이 그렇게 셈에 밝다고 하는데 이런 것도 그 원인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셋째 가능성은 그 목자가 자기 양을 일일이 기억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숫자상으로만 1백마리를 기억하는 게 아니라 한 마리, 한 마리 다 기억한다는 것입니다. 이놈은 토끼풀을 좋아하지, 이놈은 물을 너무 많이 먹으면 배탈이 나! 이애는 무서움을 잘 타니 천둥이라도 칠 때는 내가 옆에 있어 주어야 돼. 하는 식으로 성질과 특징을 잘 알 뿐만 아니라 이놈은 머리가 커 그래, 이름을 대두라 하자! 이놈은 머리가 아주 좋아, 그러니 호두라 하자. 이놈은 꼬리가 커 그래서 대미, 이놈은 꼬리가 길어, 이름이 장미, 이런 식으로 이름까지도 다 기억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숫자를 세지 않더라도 고개를 돌려 잠깐 살펴보기만 하면 "어, 모두 다 있구… 아니 장미가 안 보이는데… 어 저기 있구나~" 하는 식으로 일일이 기억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기억하고 있다가 한마리라도 보이지 않으면 자기 몸 힘든 것을 마다 않고 찾아가 찾아오는 모습을 누가는 묘사하고 있습니다.

많은 '양'의 형편을 일일이 살피다

저는 바로 예수님이 바로 그러한 우리의 목자라고 믿습니다. 우리 교회의 150명 교인중의 하나로, 숫자로 보시는 분이 아니라 나의 성격과 형편과 고민을 모두 알고 계시고 항상 보살펴 보아주시는 그러한 목자가 바로 우리 예수님이라고 믿습니다.

저는 여기 이 말씀 '일일이' 하면 떠오르는 목사님이 한분 계십니다. 제가 모교회에서 안수집사로, 청년부장으로 봉사하고 있을 때입니다. 그때 매일 새벽기도를 나갔는데, 어느 날 새벽예배 후에 개인기도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예배 후에는 개인기도 시간으로 교회 안에 있는  불을 끄고 비상구만 표시해 놓아 깜깜한 상태입니다.

한참 기도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앞에 환한 불빛이 비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러더니 다시 그 빛이 사라지고 한참 있다 불빛이 나타나고 사라지고 그렇게 반복하는 것이었습니다. 살펴보니 제 옆에 교구 목사님이 기도를 하고 계시는데, 인덱스카드로 기도카드를 만들어 가지고 들고 한 장씩 넘기면서 깜깜하니깐 가느다란 후래쉬로 비쳐가면서 일일이 교구 가족의 이름을 불러가면서 기도를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교구 목사님이 그렇게 교구식구들을 위해 기도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제 기분이 어땠을까요? 지금도 우리 예수님은 그렇게 우리 이름을 불러가면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예수님을 마가는 32절, 33절, 34절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다음 예수님은 그 백성들을 위해서 무엇을 하셨을까요? 예수님께서는 그 병자들을 고쳐주신 데에서 그친 게 아니라 더 나아가 안식일에 대한 분명한 선을 그어 놓으려고 하십니다.

그래서 마가는 32절 '저물어 해질 적에'를 복선삼아 꺼내놓은 다음에 집요하다 싶을 만큼 안식일 문제를 꺼냅니다. 왜냐면 예수님께 나오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 무엇이냐? 그것이 안식일 때문이냐? 그게 마가로서는 안타까웠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다음장인 2장, 24절에 밀밭사이로 지나가던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먹은 사건을 가지고 안식일 이야기를 다시 시작합니다.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먹은 것이 그 당시 율법에 의하면 어느 정도 어마어마한 죄목인줄 여러분 아십니까? 밀 이삭을 자르는 것은 추수하는 행위, 손으로 비비는 것은 타작하는 행위,껍질을 불어 날리는 것은 키질하는 행위, 손으로 비벼 먹는 것은 음식을 장만하는 행위에 해당되어 네 개의 율법을 어긴 것이 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안식일에 대하여 느끼는 감정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입니다. 이스라엘에 유학을 다녀온 사람이 쓴 글에서 읽은 내용입니다.

하루는 금요일 저녁 갑자기 이웃에 사는 유대인 아주머니가 찾아왔어요.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저물어 해가 진후에 말입니다. 왜 그런가 했더니 다른 게 아니라 금요일 오후 해가 지면 이제 안식일이 시작되는데 그만 깜박 잊고 집안에 불을 안 켜놓은 거에요. 불 켜는 스위치를 올리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전기 스위치 올리는 것도 안식일에는 해서는 안 되는 일중의 하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개는 해가 지기 전에 집안의 불을 다 켜놓는데 그만 그 아주머니가 깜박 잊어버린 겁니다. 우리 같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누가 보지도 않는데, 뭐 집밖으로 나가는 것도 아니니 누가 보지도 않을 것인데, 그냥 모른척하고 스위치 올리면 누가 아나?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런 것 하나 그렇게 어영부영 하질 않는다는 겁니다. 그 아주머니, 그 옆집에 와서 부탁하는 것이 무엇이냐. 자기 집에 가서 전등 스위치를 올려달라는 것입니다. 그 정도로 철저하게 지키는 것이 바로 유대인의 율법입니다. 그러니 그 옛날 바리새인들 오죽했겠습니까?

그렇게 잘못된 종교적인 관행으로 사람을 옭아 매는것이 너무나 안타까운 나머지 예수님은 2장 27, 28절에 안식일의 주인은 누구인가에 대한 폭탄 같은 선언을 합니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마가는 예수님의 마음을 그렇게 바로 읽었습니다. 아, 예수님의 마음은 그런 잘못된 종교관행에서 백성들을 풀어주고 싶어 하시는구나! 이러한 예수님의 마음을 정확하게 읽어낸 마가는 바로 이어서 3장 4절에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면서 다시 한 번 안식일에 대해 쐐기를 박아 안식일논쟁에 대해 결론을 다시 한 번 내리시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기록합니다.

'저물어 해질 때에'는 율법의 굴레를 넘어선 것이다

마가의 관점에서 보면 안식일에 관한 잘못된 전통, 관행은 분명히 없어져야 할 굴레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1장에서 32절 '저물어 해질 때에'란 말로 운을 띄우고 2장과 3장에 걸쳐 예수님이 그러한 굴레를 혁파하고 초월하시는 것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안식일 자체는 예수님도 지킨 하나님의 법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안타까워했던 그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사람이 만들어 하나님의 법에다 더 붙여놓은 인간의 전통과 유전, 그러한 법칙이었습니다. 그것이 오히려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지키라 하신 진정한 의미를 훼손하고 인간을 구속, 속박하기에 예수님은 그것을 풀어 주시려고 한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 혹시 그러한 것은 없습니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종교적인 전통이나 관습이 오히려 예수님께 나가는 길을 막고 있는 것은 없습니까? 혹은 잘못 가르쳐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나가는 길을 가로막고 있지는, 힘들게 하지는 않습니까?

교회는 예수님의 마음을 마가처럼 정확이 읽어야 합니다. 마가는 안식일 저녁 해가 지기를 기다리던 백성들의 그 모습을 통하여 그러한 제도적인 굴레 때문에 예수께 나오고 싶어도 나오지 못하는 백성들의 모습과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여주었습니다.

마가가 그것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백성들을 막고 있는 굴레를 풀어 주어 그들이 자유롭게 예수님께 나아오도록 해 주기를 바라는 것이 아닙니까? 백성들을 안타까워하신 예수님의 마음을 닮아 가라고 우리에게 당부하는 게 아닙니까?

오늘도 해가 분명히 질 것입니다. 내일도 해가 질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아니 오늘만이라도 해질 녁에 나오는 본문 말씀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마음이 어떠한지를, 예수님을 모른 채 죽어가는 백성을 향한 마음이 어땠는지를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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