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에 다니던 교회 목사님께서 이런 말을 하셨습니다. 서울의 어느 교회 목사님이 한 신도가 예배 뒤 작별 악수를 하면서 봉투를 슬며시 주었다고 합니다. 봉투가 엷어 10만 원 권 수표이겠거니 하고 집에 가서 꺼내보았는데 8억짜리 수표가 들어있어 깜짝 놀랐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것이 믿음이다"고 강조하시며 은근히 자신에게 기대를 갖고 있음을 표현하신 것이 생각납니다. 그 즈음에 그 목사님께서 남성성경공부반을 모아 성경 공부를 하였는데, 나는 "믿음이 무엇입니까?" 하고 질문하였더니 몹시 불쾌해하면서 장황하게 설명하고서 시간을 마쳤습니다.

그 후로는 질문할 기회를 주지 않고 두세 번 공부하다, 이런 저런 핑계로 성경공부를 미루더니 아예 폐지해버렸습니다. 그리고 얼마 안 돼서 저는 구역 소그룹 성경공부 인도자의 자리에서 말 한마디 듣지 못하고 저도 모르는 중에 제명되었습니다. 이분은 평소에도 성도가 많이 알면 머리만 커진다고 말씀했습니다.

대부분 목사들이나 성도들은 믿음을 이해하고 말할 때 "믿습니다. 아멘"하고 표현하면 다된 것처럼 단순하게 생각하며 가르치고 배우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는 믿음이라는 개념을  단순하게 생각하는 것은 곤란하며 건강하고 능력 있는 신앙생활을 누리기 위하여 성경에 기록한 믿음을 심도있게 이해하고자 한다면, 원인적 의미의 믿음과 원인을 근거로한 적용적 의미의 믿음으로 나누어 접근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로마서 1장 17절의 "복음은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의 "믿음으로 믿음에" 이른다는 말씀의 의미나 성경에 그 의미가 사뭇다르게 이해되는 믿음이라는 단어를 이해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로마서 1장 17절의 반복적으로 표현한 믿음을 바르게 이해하는 문제는 신앙생활의 본질과 맞닿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이 말씀의 앞에 나오는 "믿음으로"는 에베소서 2장 8절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말씀에서 보듯이 하나님의 전권에 의해 일회적이고 즉각적이며 변치 않는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말하며 하나님 자녀가 되는 신분변화를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믿음으로"는 원인 행위를 주님께서 행하시고 그 결과가 우리에게 맺힌 것을 말하는 것으로 성도의 의지나 행위와 관련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것을 원인적 의미의 믿음이라 하겠습니다.

참고로 구원의 의미로 이해하는 "믿음으로"를 하나님과 관계의 변화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죄를 범하기 전 첫 사람 아담은 하나님과 관계가 창조주와 피조물 그리고 동산의 주인과 동산을 맡은 청지기(종)의 관계였는데 반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의 하나님과 성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는 자녀가 된 것으로 아담의 위치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차원의 관계가 형성된 것으로 이해하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달리 말하여 영적인 신분이 주종관계에서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로 상승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아담의 모습으로 회복했다고 이해하는 것은 자신의 신분을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새롭게 관계가 형성되었으므로 "믿음으로"가 의미하는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하나님의 재창조 역사와 관련된 믿음을 의미한다고 보겠습니다.

그리고 뒤에 나오는 빌립보서 2장 12절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말씀을 "너희 구원을 이루라"의 구원을 이룰 때의 성숙(성화가 객관적 묘사적 개념이라면 성숙은 주관적 경험적 개념임 )을 이루어 가는 믿음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선물로 받은 성도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는 인격을 닮아 가야하는데 이것을 성경은 "구원을 이루라" "믿음에"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 믿음은 세속적 가치를 버리고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하는 성도의 의지적 결단을 요구하며 하나님 중심의 가치를 얼마만큼 성경 말씀을 통하여 깨닫고 체질화하였느냐에 따라 신앙적인 삶의 모습이 다르게 나타나는 것으로, 저는 이것을 적용하는 의미의 믿음으로 표현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동전의 양면과 같은 믿음과 행위를 이해함에 있어서 믿음을 이중적 측면으로 생각하면서 접근하면 믿음과 행위의 관계가 더욱 분명해진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면 믿음의 다른 표현인 행위의 부분이 혼란을 주는데, 그것은 믿음의 이중적 측면 중 나중에 나오는 "믿음에" 부분과 행위를 연관해 이해할 때, 하나님의 전권으로 이루시는 구원의 믿음과 혼란을 피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행함의 문제는 천국에 들어가는 자격과 관련되지 않고 다만 상급의 부분만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한 가지 더 생각할 부분이 있습니다. 믿음과 행위가 객관적으로 같은 실체임에도 신학적으로 분리해서 접근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인들이 믿음은 곧 삶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반면에 철학이 발달한 헬라인에게서는 믿음과 삶이 바로 연결되지 않아도 무리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즉 탁상공론과 같은 것이 그것이지요. 그러므로 헬라문화의 영향권에서 살아가는 성도를 향해 쓰였다고 생각되는 야고보서의 강조된 행위는 구원의 믿음을 선물로 받은 성도에게서 마땅히 그리스도의 인격이 배어 나와야 된다는 것으로 성도가 성숙한 삶을 누려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것으로 보는 것이 무난합니다.

이제 믿음의 이중적 성격과 믿음과 행위가 본질적으로 같은 실체라는 점을 생각하면서 그 이면에 있는 원리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성령 하나님의 역사가 그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 13절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의 말씀과 같이 하나님께서는 믿는 성도의 마음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하는 소원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소원의 내용이나 소원에 대한 반응은 성도의 성숙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믿음을 단순하게 받아들이는 성도는 신앙생활의 모습도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즉 눈으로 보이는 육체적 모습을 보고 모두 성인이라면 더욱이 직분을 받았다면 영적인 것도 높은 수준일 것이라 기대합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그가 이제 막 태어난 성도이거나 성장이 멈춰버린 영적 장애인이라면 성숙한 그리스도인다운 요구에 율법주의 반응을 보이거나 내적으로 강박관념에 쌓인 채, 사역의 본질에는 관심이 없고 손님접대 준비에만 바쁜 마르다처럼 세상의 도덕이나 자신의 고정관념의 틀로 들어가리라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다운 삶은 무엇인가? 세상의 도덕과 사회 규범을 잘 지키면 되는 것인가? 성숙한 신앙행위는 도덕적인 것과 외관상 비슷해 보이지만 전혀 본질이 다른 것입니다. 이러한 모호함의 분별의 기준은 오직 말씀입니다. 구원을 이루고자하는 성도는 말씀에 대한 감각과 열정이 비록 불완전하고 실패를 거듭하지만 성령님이 인도하는 마음의 소원을 따라 가야 하는 것입니다.

마리아가 주님의 말씀에 집중하고 주님 사역의 본질을 이해하면서 옥합을 깨뜨렸듯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은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성도가 하나님의 일을 알고 싶고 또 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기쁨이 있고 감사가 넘치며 거기에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교회의 현실은 말씀이 체질화되어 누리는 자유함보다는 마르다와 같이 주님이 오실 때 그 분의 발걸음에는 관심이 없고 다만 마르다가 손님을 대접할 때 해왔던 것처럼 대접할 음식을 부지런히 만들어야 하고 동구 밖까지 달려가 맞이하듯이 뭔가 해야만 할 것 같은 강박관념이 짓누르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것은 믿음을 단순하게 이해하고 가르치며 교회만 다니거나 나오게 하면 거의 다 된 것 같이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 글이 말하는 "믿음에" "구원을 이루라"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세속적인 것과 성경적인 것의 구분도 불분명합니다. 결론적으로 성숙에 대한 이해 결핍이 문제입니다.

제 견해로는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전권으로 이루는 구원의 믿음보다는, 마음에 주시는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따라 성도가 성숙해가는 믿음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66권이나 되는 필요하고도 충분한 성경 말씀(천지를 창조하실 때의 동일한 능력의 말씀)을 주신 것이라 생각합니다.

성도의 성숙은 목회자에게나 성도 자신에게 있어서 많은 시간과 수고를 필요로 합니다. 그리고 전도에서와 같이 가시적 성과를 알기도 힘듭니다. 그러나 성도가 소원하는 마음을 키워가고, 주님이 공생애 동안 제자들을 대하셨던 것 같이 교회가 양육에 관심을 갖는다면, 세속적 도덕이나 예법과 말씀에 대한 반응을 분별하지 못하는 무지한 목회자와 성도가 난무하는 오늘의 교회가 아닌, 성숙한 성도상의 교회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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