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가로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하되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노라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마태복음 15:21-28)."

사람들은 이 본문을 대할 때마다 신약원문이 말하거나 사용하고 있는 단어나 표현에 관심을 기울이기보다는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다"(24절), "자녀의 음식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오"(26절)와 같은 예수께서 가나안 여인에게 행한 '모욕적인 표현'에 대해서 주목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에 주로 의존해서 행하는 해석이나 설교는 건전하지 못한 경우가 많다. 이제 본문을 꼼꼼히 다시 한번 살펴보면서 본문의 의미가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하자.

"예수께서 그곳을 떠나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향해 가실 때, 한 가나안 여자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말했다. 주 다윗의 자손님. 저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제 딸이 귀신이 들려 무척 고생합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부터 게네사렛 땅으로 와서 자기를 비난하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의 논쟁 후에 두로와 시돈 지역으로 향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가나안 여인은 그 지역에서 나와 예수를 맞았다. 두로와 시돈, 그리고 가나안 여인은 사마리아 사람들보다도 더 멸시를 받고 하나님의 구원과는 전혀 거리가 먼 사람들로 여겨지지 않았던가! 이들은 "땅 끝에 속하는" 사람들이었다.

예수께서 '구원'의 대상자인 유대 땅과 유대인들을 피해 저주받고 버림받은 두로와 시돈의 땅으로 향했다는 말이 무슨 의미일까? 또한 가나안 여인이 그곳을 떠나 나오다가 예수를 만났다는 말은 무엇일까를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러한 배경설명은 나중에 나오는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라는 예수의 말씀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이 말은 무슨 의미일까? 이방인인 그녀는 예수의 배타주의적 선교(혹은 구원)관의 대전제원칙의 예외로 고침을 받았다는 말인가? 아니면 우리가 자주 말하듯이 강청기도(强請祈禱)의 덕분인가? 아니면 본문의 의도가 예수의 배타적인, 즉 지리적 혈연적 구원관('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던가?

내가 볼 때 문맥상 "구원받을 자가 유대나라와 유대 땅에 국한될 것"이라는 말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예수의 사역이 그곳에만 국한된다는 말이 아니다. 이것은 역설적인 표현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어째서 유대 땅을 떠나 두로와 시돈으로 가다가 그곳에서 오는 가나안 여인을 만나서 기적을 행하게 되었을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문은 본문을 더 읽어보아야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닐까?

"그 여자가 우리 뒤를 따라오며 계속해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녀를 우리로부터 보내소서."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여인의 외침에 대답하지 않으시던 예수께서 제자들의 물음에 대답하셨다는 점이다. 우리가 종종 오해하듯이 여자에게 대답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와 그의 일행들을 "괴롭게 하는" 가나안 여자를 그들에게서 떼어내 달라고 예수께 요청하는 제자들에게 대답하셨던 것이다. 사람들은 마치 예수께서 처음에는 여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가 제자들의 간청에 못 이겨 나중에 그 여인에게 대답했던 것으로 생각하나 그런 것은 아니다.

사도들의 입장은 당시의 유대사람들의 입장과 유사했을 수도 있다. 아니면 그냥 귀찮게 하는 존재를 자신들의 눈앞에서 몰아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얼마나 끈덕졌는지 제자들이 두 손 두 발을 들고 이 귀찮은 일을 자신들의 선생에게 맡길 정도였을까?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그녀를 우리로부터 보내소서"(send her away from us)(제자들)는 표현과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예수)라는 표현이 상응한다는 점이다.

그녀가 예수와 제자들을 계속해서 시끄럽게 하니 제자들은 예수에게 그녀를 떠나보내라고 요청하고 예수는 그러한 요청을 하는 제자들에게 자신의 일은 "그녀를 떠나보내는 것이 아니라"는 뉘앙스를 갖는 다소 모호한 표현을 쓴다. 이러한 소란행위에 대해서 예수께서는 침묵으로 일관하셨다는 데 주목해야 한다. 그러나 무엄하게도 제자들은 가나안 여자를 떼어내는 일을 자신들의 선생에게 시킨다. 그랬더니 선생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어린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다"라는 자신의 임무를 언급할 뿐 다른 행동을 일절 취하지 않는다.

제자들은 속으로 이렇게 말했을 수도 있다. "아니, 이 시끄러운 여자 좀 떼어내시라고(다른데로 좀 보내라고) 했더니, 뜬금없이 자기가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어린양에게만 보냄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어째서 하실까? 그 여자를 꾸짖어 쫓아내시고 싶지 않으신가? 어어, 결국 그 여자가 예수님 앞에까지 와버렸네!" 멀리서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예수의 일행들을 쫓아오던 가나안 여자는 드디어 예수 앞에 도달하여 경배와 복종의 표시로 그에게 넙죽 엎드린다. "주님, 나 좀 도와주소!"

제자들과 한차례 행했던 것과 같은 예수의 선문답은 여자에게도 행해진다. "자식들의 음식을 자식에게 주지 않고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들에게 줄 수는 없지!"

그러자 그녀도 지지 않고 예수께 한마디한다. "주님, 옳습니다. 자식들의 음식을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들에게 줄 수는 없지요. 하지만 자식들이 먹다가 흘린 것을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들에게 주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닙니까?"

자신과 제자들과 사이에서 예수께서는 "목자와 양"으로 자신의 지상에서 임무를 표명하셨다. 그리고는 자신과 여자 사이에서 예수께서는 집주인과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로 그녀와의 관계를 설정하셨다. 이것도 '장군 멍군'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여기에서 언급되는 '개들'은 퀴나리오이스(집에서 키우는 개들, 혹은 강아지들)라는 헬라어다. 만약 우리가 그것들을 일반적으로 생각하듯이 근동지방에서 떠돌아다니며 사람을 공격하고 지저분한 것들을 먹어치우는 들개들(wild dogs)을 생각했다면 그것은 이 이야기를 오해하게 만들 수 있다. 모두들 알다시피 들개는 그쪽 지역에서 지저분한 짐승들 중의 하나로 여겨진다. 비록 돼지만큼은 아니더라도 말이다. 그곳에서 들개를 만나면 돌팔매질하는 것이 적합하지 아무리 상에서 떨어진 음식이라도 그것들에게 던져 주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유대지방 사람들과 들개와의 관계다!

그러나 집에서 키우는 개는 그렇지 않다. 지금의 우리처럼 사람의 상전노릇을 하고 있지는 않을지라도, 주인과 비록 대등한 관계는 아닐지라도(목자와 양도 마찬가지다) 개도 한 울타리 안에 사는 한 식솔이 아니란 말인가! 아마도 가나안 여인은 소와 양이 귀중하다면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에게도 관심과 사랑을 베풀 수 있지 않은가라고 항변하고 있었을 수도 있다. 양들은 비록 밖에 있더라도 주인의 소유며 한 식구며 귀중한 재산이다.

그러한 관점에서 볼 때, 이미 가나안 여인은 집안에 들어와 있었다. 이러한 융화의 과정은 우선 예수께서 금지된 지역으로 향하셨기 때문이며 그녀가 그곳에서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며 그녀가 예수를 만나려고 했으며 예수께서 이미 그녀를 한식구로 맞아주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우리가 예수의 말씀 중에서 이스라엘 사람은 주인의 자녀로, 이방인들은 주인의 개로 즉 '인간 이하'로 보았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구원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설명하는 것뿐이다. 그녀는 예수의 주변에서 목청껏 예수의 관심과 사랑을 요청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이제는 예수 앞에서 그와 직면하고 있었으며 그에게 은총을 구하고 있었다. 이제 엄연히 그녀는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그리고 다시 찾은 '어린 양'이 되어있었다. '주님의 애완견'은 이상하고 '주님의 어린 양'은 좋다는 편견을 버려야 한다!

"여자야, 네 믿음이 놀랍도다, 네 소원이 이루어졌도다!"

"여자야!"라는 말은 헬라어로 "귀나이(gynai)"이다. 이 말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자신의 어머니 마리아에게도 사용한 말로 절대 평대 혹은 하대어가 아니다. 학자들은 이 말(호격)은 여인 혹은 결혼한 여성을 지칭하는 말로 애정과 존중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이러한 표현은 사람들이 가정하듯이 하대하거나 천박한 종류로 이해했던 여성에게 할 수 있는 표현은 아닌 것이다.

큰 믿음이라고 이해되는 믿음은 우리가 생각하듯이 수량적인 것이 아니다. 이 믿음은 놀라운 믿음이며 상식 밖의 믿음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이 큰 믿음이란 행위를 포함하는 것이며 신뢰와 헌신을 의미하는 것이다. 믿는다고 주문처럼 되뇌는 것이나 허황하거나 불가능에 가까운 크고 놀라운 것을 무조건 바라는 것이 아니다.

이 이야기의 앞뒤로 나오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의 불신앙과 예수를 시험하려는 태도들과 대조가 된다. 물론 다른 부분에서는 기적과 치유와 육체적 필요의 만족에만 탐닉하는 백성들의 요구를 비난하시거나 회피하시는 예수의 모습도 나타난다. 그와 같이 우리가 기적과 치유기사를 접할 때 항상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종교적이지 않고 경건해보이지 않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큰 믿음과 신뢰와 순종은 여전히 우리가 본받아야 할 산 증거요 산 교훈이다.

성기문 교수. ⓒ뉴스앤조이 신철민
성기문 교수. ⓒ뉴스앤조이 신철민

이와 같은 여러 가지 증거들을 통해서 볼 때, 예수께서 비정하고 냉정하게 가나안 여인을 박대하였거나 홀대했다고 볼 만한 이유는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예수께서는 지역과 혈연을 넘는 구원의 세계를 열고 계셨고 이방인들에게도 관심과 포용력을 갖고 계셨다는 증거를 발견할 수 있었다.

예수께서는 항상 천대받고 고통당하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기울이셨고 그들에게 다가가 그들을 포용하신 점은 현 시대 교회에도 적용할 수 있는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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