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휴대폰이라는 게 생겨서 아무데나 꺼내들고 '속닥속닥' 대화를 한다. 애들이건 어른이건 길을 가다가도 심지어 화장실에서도 사용한다. 편리하다고 해야 할지, 신기하다고 해야 할지, 아무튼 휴대폰이 없으면 못 사는 세상처럼 되고 말았다.

18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 이야기다. 봄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어느 날, 사북에서 교역자회의가 있어 정선에서 기차를 탔다. 기차 안에서 한 달 전 J교회에 부임해온 K목사를 만났다. 나보다 나이가 7~8살 많은 아직 마흔이 안 된 형님뻘 쯤 되는 목사였다. 반갑게 열차 안에서 인사를 나누었다. 내가 목회하고 있던 덕송교회는 새로 부임해 오신 K목사가 시무하는 J교회의 지교회였다. 반가운 인연이었다. 어쨌든 내가 정선에 온 것으로 따지면 1년 선배였다. 잠시 후 K목사는 밝은 표정으로 이렇게 물었다.

"박 전도사! 교회에 어려운 일이 있다거나, 내가 도울 일이 있으면 조금도 망설이지 말고 말하게. 내가 들어 줄 수 있는 일을 힘닿는데 까지 도와 줄 테니…." 말만 들어도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그리고 아무런 격의없이 후배전도사를 대해주니 참 고마웠다. 그래서 내가 이렇게 대답했다.

"목사님, 어렵거나 힘든 건 없어요. 교회에 전화가 없어서 그게 좀 불편해요." "어 그래. 그럼 내가 교회에 얘기하든지 여선교회에 얘기해서 덕송교회 전화 하나 놔주라고 하지 뭐! 기다려봐 곧 좋은 소식이 있을 테니!"

그 당시 전화를 하나 가설하는데 15만 원 정도 들었을 때다. 내가 만난 사람 중에서 그렇게 화통한 사람을 보지 못했다. 열차 안에서 그런 대화가 있은 뒤, 서너 달이 지났다. 사북에서 목회하는 친구 전도사를 만났는데 대뜸 나보고 하는 말이 "너는 든든한 백이 있어 좋겠다"고 하지 않는가?

내가 무슨 소리냐고 궁금해서 묻자, 며칠 전 사북에서 지방여선교회 계삭회가 있었는데 J교회 여선교회에서 덕송교회에 전화를 놔주기로 보고하는 걸 직접 들었다는 것이다. 담임전도사인 내게는 아무 기별도 없이 지방여선교회 계삭회에 먼저 보고부터 했다는 것이다. 조금 찜찜하긴 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우리 교회도 곧 전화가 생길 것 같아 내심 좋았다. 당시 정선지방이 43교회였는데 전화가 없는 교회가 우리 교회를 포함하여 두 교회밖에 없었다. 그리고 또 두 달이 지났다. J교회 여선교회에서 우리 교회에 전화를 놔주기로 했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깜깜 무소식이었다.

그러던 어느 주일 아침, 새벽기도회를 마치고 막 집에 들어왔는데 뒷집 연숙이 엄마가 달려와서 전화 왔으니 받으라는 것이다. 무슨 일일까? 허겁지겁 달려가서 전화를 받았다. K목사가 말하길,

"박 전도사! 오늘 저녁예배에 우리 교회에 와야 하겠는데. 올 수 있겠지? 우리 교회 여선교회에서 덕송교회에 전화를 놔주기로 했는데, 전화 가설하기 전에 먼저 전화기 전달식을 하기로 했어. 그러니 오늘 저녁 우리 교회 저녁예배에 꼭 참석해야 돼!"

전화를 끊고 집에 돌아왔는데 명치끝이 답답한 게 체한 것처럼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아내는 모슨 일이 있었길래 기분이 안 좋은 표정이냐고 꼬치꼬치 캐물었다. 그래서 방금 전 전화내용에 대해 자초지종을 얘기해 주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여보, 전화가 없으면 좀 불편하겠지만, 그렇게 삽시다. 지금까지 전화 없이도 잘 살았는데 전화 없다고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합시다."

아내는 내 마음을 환히 꿰뚫고 있었다. '그렇게 하자'고 순순히 동의해 주었다. 다시 연숙이네 집에 가서 K목사에게 내 의사를 전했다. 오늘 저녁예배에 전화기 전달식에 참석할 수 없겠다고, 우리 교회에 전화가 꼭 필요한 것이 아니니 받지 않겠노라고, 지금 전화를 가설한 상태가 아니니 없던 일로 하자고 대충 말씀드렸다. 그러자 K목사는 펄쩍 뛴다. 지금 와서 그럴 수 없다고, 성의를 무시해도 유분수지 무슨 얘기냐고? 그러지 말고 저녁에 오라고….

전화를 끊고 집에 왔는데 주일 오전예배 전에 전화가 두 번 더 왔고 예배를 마친 다음에도 사모님을 통해서 전화가 두 번 더 왔다. 내가 분명히 내 입장을 전달했으므로 더는 말하고  싶지 않아 아내를 보냈다. 아내도 "전화기 안 받는데요. 박전도사 고집이 황소고집이래요."라고 대답했단다.

지금 생각하면 K목사가 J교회에 부임한지 몇 달 안 되는 시점인데 주보에 광고까지 박아 저녁예배 시 전화기 전달식을 하기로 여선교회와 약속이 되어 있었는데, 그걸 취소할 수도 없고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난감했으리라 짐작된다. 오후 내내 찜찜하고 불편했다. K목사에게 간단한 편지를 썼다.

"존경하는 목사님! 죄송합니다. J교회 여선교회에서 우리교회 전화를 놔주기로 이미 두 달 전에 지방여선교회 계삭회에서 보고까지 해서 이미 다 알려져 있습니다. 아직 전화 가설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굳이 전화기 전달식을 할 것 같으면 우리교회를 방문해서 전달하면 될 텐데, 그걸 받으러 저녁예배도 드리지 말고 전달식에 참석하라니 솔직히 불쾌합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시길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 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셨는데 이미 광고를 통해 다 알려진 사실을 거듭 확인할 필요가 있는지요? 저도 최소한의 자존심은 지키고 싶습니다. 우리교회는 전화기를 받지 않겠습니다. 성의를 무시했다면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없었던 일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쪽지에 내 생각을 적어 우리교회 오토바이가 있는 청년 편에 보냈다. 그 청년이 다녀와서 하는 말이 "목사님이 편지를 주택마당에서 서서 읽으셨는데 표정이 어둡더니만 바들바들 떠시데요. 편지에 뭐라고 적으셨어요?"

그 후 K목사는 내가 하는 일에는 사사건건 제동을 걸었다. J교회 다니는 교인 중 집사 한분이 우리 교회 설립자인데 그런 인연으로 정선읍에서 살지만, 매월 십일조를 교회에 보내는 분이 계셨다. K목사는, 십일조는 지금 다니는 교회에 해야 정상이라면 십일조를 중단했다.  그 분이 매달 보내는 십일조가 5만 원이었는데, 내가 교회에서 받는 생활비와 똑같았다. 그 분이 우리 교회에 보내는 1년 십일조가 우리 교회 1년 예산 중 절반이었다.

지방회에서 여름성경학교 강습회를 하면 내가 문학을 한 사람이라 해서 '동화구연', '기독교문학' 등 커리큘럼을 설치했는데, K목사는 J교회 교인들이 내 과목에는 수강하지 못하게 했다. 덕송교회가 J교회 지교회였는데, 마침 J교회에서 멀리 떨어져 새벽기도회에 나오기 힘든 교인들을 위해 그 지역에 교회를 하나 개척하기로 하고 첫 담임자를 내가 하기로 내정했지만, 어느 날 K목사는 나를 부르더니 전임자와 나와 한 약속을 '커뮤니케이션'이 안 된다는 이유로 무산시켜버렸다.

한번은 지방 교역자회에서 속초로 가서 자체 목회세미나를 한 적이 있었다. 세미나 발제자는 지방 목회자들이 했다. 경비를 아껴보자는 생각이었고, 그렇게 하면 발제를 맡은 사람이 공부를 해야 하고, 훨씬 더 진솔하고 유익한 세미나가 될 같아 선교부 실무자들이 그런 계획을 세운 것이다. 나도 발제를 하나 맡았다. 그때 선교부 총무가 K목사였다. 내가 맡은 발제의 내용은 '현대사회는 설교의 위기다'라는 제목이었다. 내용의 요지는 이랬다.

"강단에서 수없는 설교가 쏟아져 설교의 홍수시대를 이루었지만, 성서가 제대로 설교되어지지 않고 있다. 오늘 한국교회의 설교 상황에서 가장 큰 문제점은 설교자들이 제멋대로 성서를 풀이하는 것이다. 본문의 맥락과는 아무 상관없이 그저 말의 표현이 자기의 설교내용과 비슷한 점이 있으면 그들을 모조리 열거하고 인용하는 습관이 있다."

나는 그걸 준비하느라 이 책 저 책을 보면서 일주일동안 준비했었다. 사실 설교경험이 미천한 사람이 설교에 대한 발제를 했으니 내용이 얼마나 신통치 않았겠는가? 그러나 그 원고가 지금도 남아있는데 내용에는 크게 문제가 없는 것 같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40분이었다. 강연이 무르익을 무렵, K목사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얼어나더니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박 전도사! 박 전도사가 그런 정신으로 목회를 하니 교회가 부흥이 안 되지!"

그런 식의 발제라면 그만두라는 것이다. 세미나를 주최한 담당 선교부 총무 입에서 그런 말이 쏟아져 나왔다. 그래서 그 날 세미나는 중단되었다. 내가 목회하던 마을은 20호가 조금 넘는 궁벽한 시골마을이었다. 그래도 어른이 8명, 청년 1명, 교회학교 어린이 중고등부 포함해서 20여 명. 그렇게 해서 30명 쯤 모이는 아담하고 작은 교회였다.

K목사는 내가 담임하는 교회가 '작은 교회'이기에 형편없는 교회쯤으로 알고 있었을까? 내가 운동권 목회자라고 기도도 안하고 불성실한 목회자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내가 전화기 전달식을 거부한 것에 대한 앙갚음이었을까? 지금도 그게 궁금하다.

K목사는 지금 큰 도시의 대형교회 목사다. 한마디로 잘 나가는 목사다. 내가 20년 가까이 된 이야기를 새삼 끄집어내는 이유가 무엇일까? 아직도 내 마음 한 구석에 그 시절의 응어리가 여전히 불편한 감정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내가 구태여 여기 적시하는 심정은 또 무엇일까? 또 만약에 그런 상황이 지금 벌어졌다면 나는 어떻게 했을까? 그때 나는 전화기 전달을 거부하면 나에게 '반드시 불이익이 돌아올 것이다'라고 직감했었다. 내 예상이 적중했다. 아니 내 예상보다 훨씬 타격이 컸다.

18년 전 K목사와 갈등으로 빚어진 불편한 감정을 내가 풀고 싶어도 풀어지지 않는다. 그 쓰라린 앙금이 내 가슴 한 편에 그대로 남아 있는데 자동으로 치유되거나 사라지지는 않는다. 이 불편한 감정에서 나는 자유하고 싶다. 아직 내가 성숙하지 못해서 그런 탓일까? 그러나 이따금 생각이 난다.

▲ 박철 목사. ⓒ뉴스앤조이

18년 전 얘기를 구태여 끄집어내는 까닭은, 내가 경험한 비슷한 상처를 남에게 강요하지 않았는가? 그걸 반성해 보고 싶어서다. 참으로 다행한 일은 18년 전 나의 모습이 지금도 동일하다는 것. 그 시절의 삶의 정체성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상처가 오히려 나를 바르게 잡아주었던 것이다.

교회 전화만 있어도 좋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는데 지금은 사람마다 그 전화를 주머니에 넣어갖고 다니는 세월이 되었으니, 전화에 대한 나의 추억도 구시대의 유물이 되고 말았다.

더군다나 아름답지 못한 유물을 18년 동안 끌어안고 있으니 나도 참 못난 사람이다. 구시대의 유물은 하루라도 빨리 청산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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