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유한 존재로 변화된 사람의 실천적 삶은 섬김으로 표현된다. 그렇기 때문에 겉으로 섬김의 모습을 지닐 수는 있지만 진정한 섬김의 영성은 먼저 온유의 성품을 지닌 사람에게서 흘러나온다. 사람의 눈앞에서 섬김의 태도로 남을 배려하고 또 이해하는 표정을 지을 수 있지만 사실 그 속을 들여다보면 그 마음이 담긴 섬김의 모습이 아닐 수 있다. 자기를 스스로 낮추고 남을 높일 줄 아는 온유함에서 섬김의 도(道)가 나온다.

예수의 삶을 이해하지 못한 제자들

▲ 섬김은 다른 사회집단이나 공동체와 구별된 예수공동체가 가지는 예수의 제자됨의 표식이다. 그러나 오늘 교회공동체를 돌아보면 겉으로는 높은 자리에 앉은 사람을 비방해도 속으로 그 자리를 차지하고 싶어하는 권력의 맛을 아는 이들, 주님의 종이라 외치면서 교회, 교단의 감투에 연연하는 소인배들이 허다하다. ⓒ뉴스앤조이

예수도 제자들에게 남을 자신보다 높게 여기고 또 서로 섬기는 삶을 실천하라고 끊임없이 말씀하셨다. 하루는 두 제자의 어머니가 예수를 찾아왔다. 예수는 그녀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물었다. 그녀는 뜻밖의 요구를 했다. "주님의 나라가 서면 저의 두 아들을 하나는 주님의 오른편에, 하나는 왼편에 앉게 해주십시오."(마 20:21) 예수의 제자됨을 무슨 감투 정도로 여긴 몇몇 제자의 욕심이 어머니의 치맛바람을 불러일으켰다.

예수에게는 어이가 없는 요구였다. 이러한 요구는 자신의 삶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에게서나 들을 수 있는 황당한 간청이기 때문이다. 그나마 주님의 나라가 세워질 것이라는 욕심 어린 믿음, 믿음 아닌 믿음을 가상히 여겨야 할까? 어쨌든 예수는 이 간청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예수는 그 어머니의 요구에 대해 어머니가 아닌 그녀의 아들인 두 제자에게 대답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보건대 아마도 이 두 제자가 어머니를 통해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려 했던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직접 묻는다. "너희가 청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느냐?" 이 말에서 예수의 안타까운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지난 3년간 자신이 보여주었던 삶을 누구보다도 더 가까이에서 체험하고 깨달았던 제자들에게서 그런 요구를 들어야 하다니, 이것은 예수공동체에 대한 목회의 실패로 볼 수 있지 않겠는가? 예수는 단호하게, 그러나 절절한 심정으로 묻는다. "내가 마시게 될 잔을 너희도 마실 수 있느냐?"(22절).

두 제자는 그때서야 눈치를 챘는지 마실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예수는 다시 한 번 확인하며 두 제자에게 말한다. "너희도 내 잔을 마시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내 오른편과 내 왼편 자리에 앉는 특권은 내가 주는 것이 아니다. 그 자리에 앉을 사람들은 내 아버지께서 미리 정해놓으셨다."(23절) 예수는 자신이 마시게 될 잔을 마실 수 있느냐고 묻지만, 제자들은 현재 마실 수 있다고 생각하든 안 하든 결국에는 마시게 될 것이라고 답한다. 만약 가능성의 문제라면 당연히 대가가 있겠지만 필연적으로 마시게 되는 것이라면 그에 대한 보상은 상관할 일이 아닌 것이다. '아버지께서 미리 정해놓으셨다'는 말이 그 말이다. 결국 어떤 대가를 바랐다는 것은 제자들 자신이 아직 자신들이 마실 물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못했음을 말하는 것이다.

종처럼 남을 섬기고자 이땅에 오신 예수

문제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나머지 열 제자가 분개하기 시작한 것이다. 두 제자가 자신들 모르게 그런 간청을 했다는 것에 화가 난 것이다. 그들이 화를 냈다는 것 자체는 그들 마음속에도 그 두 제자와 별반 다르지 않은 욕심이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일종의 질투다. 겉으로는 어머니까지 앞세워 무례한 요구를 한 두 형제에게 화를 낸 것으로 비춰지지만 사실은 서로서로 자신들이 높아지려는 욕구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자신들의 스승인 예수 앞에서 언쟁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참다 못해 예수가 다시 개입했다. '그들을 가까이 불러모았다'는 성서의 표현에서 예수는 아주 진지하고 심각하게 말씀하셨음을 알 수 있다. 예수의 말을 풀어쓰면 다음과 같다.

'너희도 잘 알지 않느냐? 너희도 나와 다니면서 세상 통치자들을 잘 보지 않았느냐? 그들은 백성을 강제로 지배하고 권력으로 백성을 억압하지 않더냐? 너희는 내가 말로 혹은 행동으로 그 모습을 얼마나 미워하고 저항했는지 똑똑히 보지 않았느냐? 그런데 너희들의 지금 행동은 그들과 무엇이 다르냐?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적어도 너희들이 나와 지난 3년간 먹고 자며 어려움을 함께 했던 나의 제자들이라면 정말 그래서는 안 된다. 제자들아, 정말 너희가 높은 사람이 되고 싶으냐? 세상 권력이나 돈이 아니라 정말 위대한 사람이 되고 싶으냐? 그렇다면 남을 섬겨라. 으뜸이 되고 싶으냐? 그러면 먼저 종이 되어라.

너희가 미처 나를 알아보지 못한 모양인데, 사실은 나 또한 섬김을 받으러 이 땅에 온 것이 결코 아니다. 내 주위에 이런저런 사람이 모이고 나를 존경하는 사람이 몇몇 생기고, 나를 통해 사람들이 변화되는 모습을 보면서 너희들 스스로 내 제자라는 사실에 우쭐했다면 그것은 정말 나의 삶을 결코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오히려 나는 섬기러 왔다. 남을 섬기되 마치 종처럼 섬기러 온 것이다. 결국에는 죽음이 오더라도 나의 섬김은 끝나지 않는 그런 섬김의 마음으로 온 것이다. 내 말을 알겠느냐? 아직도 하늘 보좌에 앉는 꿈을 꾸고 있느냐?'

이렇게 말씀하신 예수는 아마도 속으로 눈물을 흘리셨을 것이다. 예수는 지금 우리에게 그때나 지금이나 세상의 기준이나 판단에 전혀 부합되지 않는 삶의 모습을 요구하고 계신다. 그렇다! 섬김은 현실세계에서 일반적으로 결코 통용되지 않는 가치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예수를 믿어도 진정한 섬김의 영성은 요원하게 여겨지는 것이다. 섬김은 오히려 남에게 비굴하게 굴종하거나 자신이 손해 입는 자세라고 치부된다. 사실 우리는 영혼 깊이에서 다음과 같이 하소연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주님!
남을 섬겨야 한다니요?
종이 되어야 한다니요?
저희들의 세상을 보세요
온통 높은 사람 되려
으뜸이 되려 조바심 치는데
그 안에서 남 섬김은 분명 헛짓이지요?

섬김 향해 목숨조차 내던진 당신 앞에서
몸 던져 으뜸 되려는 우리에게
섬김과 희생, 그 말과 뜻은
오늘 한 푼의 가치 없는
쓰레기통 속 무참히 처박힌 빈 외침일 뿐이지요?

주님!
당신을 믿는 우리조차
슬그머니 지나치는 그 말씀
아예 도려내어 없었던 진리로 묻어버린다면
차라리 당신이나 부끄럽게 아니할 것을

그러니
아─ 이 가슴을 찢을까요?
아니면 이 말씀을 찢어버릴까요?

'사라지는 섬김의 도(道)'

권력의 맛을 알고 감투에 연연하는 소인배들

섬김은 다른 사회집단이나 공동체와 구별된 예수공동체가 가지는 예수의 제자됨의 표식(mark)이다. 그것은 예수 자신이 우리의 모범으로 섬김의 삶을 사셨고 우리는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 나 자신과 교회공동체를 돌아보면 겉으로는 높은 자리에 앉은 사람을 비방해도 속으로 그 자리를 차지하고 싶어하는 권력의 맛을 아는 이들, 주님의 종이라 외치면서 교회, 교단의 감투에 그토록 연연하는 소인배들이 허다하다. 그들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질타는 안중에도 없다. 예수와 하나님을 섬김다고는 하지만 그것이 현실에서 가난한 자, 고통받는 자, 사회적으로 비천한 자를 섬기는 것이라고는 믿지 않는다. 교회 안에 이웃을 사랑과 봉사로 섬기라는 가르침은 많지만 그 섬김의 극진한 모습이 보이지도 않고 무엇인지도 뚜렷하지 않다.

섬김은 상대방에 의해서 좌우되는 행위가 아니다. 대가를 바라거나 또 결과를 바라는 행위도 아니다. 섬김은 남을 존경하는 마음에서 시작되며 존중함으로 진행되고 또 희생을 감내해야 하는 적극적인 행동이다. 섬김의 도(道)는 종의 도(道)다. 종이 되지 않고서는 섬김을 실천할 수 없다. 예수는 종이 되어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다. 이 섬김의 모습을 보여주시려고 하나의 퍼포먼스로 한 것이 아니라 섬김을 위해 먼저 종이 되었다는 것을 몸으로 보여주신 것이다.

▲ 김진 목사 / 크리스챤아카데미 선임연구원. ⓒ뉴스앤조이
섬김의 실천은 꼭 큰 능력이나 물질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섬김은 공동체 안에서 남을 배려하는 지극히 작은 일에서부터 시작된다. 우리의 섬김은 결국 그 사람을 섬기는 것이기 때문에 행위 그 자체보다는 그 사람을 중심에 놓고 생각해야 한다. 온유의 영성이 우리로 하여금 온전한 섬김을 실천하도록 힘을 주지만, 거꾸로 섬김의 영성이 실천됨을 통해 온유의 영성은 더 깊어질 것이다. 자기 안에 온유와 겸손의 영성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실제 생활에서 남을 섬기는 작은 행동을 통해 온유함을 체화해나갈 수 있다.

엔크리스토출판사에서 출간한 '김진의 영성이야기' 시리즈 중 「팔복의 영성」을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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