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배전 찬양을 하는 모습. ⓒ이준모
활기찬 찬양이 있는 교회가 건강한 교회다. 교회는 시와 노래를 통해 하나님을 찬양한다.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찬양과 기도에 응답하신다. 때로 찬양은 기도가 된다. 우리는 찬양을 통해 하나님을 찬양하지만, 그것은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대화이며 기도다.

중학교 시절, 찬송가와는 다른 많은 찬양이 보급되기 시작했다. 전형적인 예배악기였던 풍금이나 피아노와는 다르게, 어린 세대들이 부르기 좋고 기타와 탬버린 등으로 신명나게 부를 수 있는 노래가 교회에 퍼졌다.

그동안 어른 예배를 통해 부른 찬송가는 무겁고 느려 신나지 않았다. 많은 곡들이 외국에서 수입한 번역된 노래였고, 4·4조의 심파적인 찬송곡이다. 그러나 '가스펠 송'이라 부르는  찬양은 경쾌하고 부르면 부를수록 신이 난다. 가사는 주로 내면적인 고백을 적절한 현대식으로 표현해 마음 표현을 느낄 수 있다. 중고등부 시절 수련회를 통해 부른 찬양은 지금도 여전히 귓가에 맴돈다.

▲ 주일학교 교사들의 율동과 찬양. ⓒ이준모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가스펠 송'이 지나치게 가벼워 때론 경망스럽게 느껴진다고들 했다. 교회는 정규 예배에서 찬송가 외에 새롭게 부르는 찬양을 꺼려했다. 소위 '가스펠 송'은 어린이부나 학생회, 또는 수련회나 비정규적인 예배 시에만 불렀다. 아마도 이런 풍토는 일반교회가 갖고 있는 정서로 보인다. 

그런데 민중교회는 달랐다. 너무 파격적이었다. 「 민중복음성가 」 라는 책을 통해 접하는 찬양들은 적지 않은 부분들이 시위 현장에서 불려지는 '투쟁가'에 가까웠다. 성서구절이나 신앙적인 내용을 담고 있지만, 전교조나 노동현장에서 부르던 일반 '민중가요'도 다수 수록돼  있었고, 정규적인 예배 시에도 일반 찬송가와 특별한 구분 없이 사용했다. 

그러다보니 때로 새로이 민중교회를 찾는 사람들은 새로운 '민중가요'를 배우는 독특한 경험을 하기도 했지만, 기존 교회와는 사뭇 다른 체험이었다. 물론 '학생운동'이나 '노동운동'등의 경험을 통해 이런 노래 문화에 익숙해 있던 사람들에게는 교회가 친근하게 느껴지는 측면도 있었다.

그러나 찬양이 하나님을 찬양하기보다는 사회와 역사의 제 문제를 폭로하고, 여기에 그리스도인으로서 응답해야할 당위적 의무와 결단이 앞서면서 취약한 노래가 일부 섞이게 됐다.  이로 인해 민중교회를 소개받고 처음 발을 디딘 초신자들은 적잖게 당황하는 일이 없지 않았으며, 특히 기존 교회를 다니다 새로이 교회를 오는 중년층에 속하는 사람들은 그런 면이 더 역력했다. 더군다나 교인들 대부분이 청년층에 가까울 정도여서 이런 저런 이유로 민중교회는 특별한 교회가 됐다. 

해인교회 역시 그랬다. 나는 나이 서른에 해인교회에 청빙됐다. 그 때는 교인들이 전혀 없었고 아는 사람들이 아름아름 교회에 와서 교인들 대부분이 20대였다. 어떤 사람이 교회를 찾다가 해인교회에 들렀는데, 그 첫 느낌은 '청년회 수련회 온 기분'이었다고 했다. 문제는 내가 이런 교회의 사정을 편하고 당당하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하는데, 지레 걱정이 앞서 예배중 알지 못하는 방문객이나 초신자들이 나오면 많은 부담을 느끼곤 했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교인들도 그랬다. 민중교회의 장점이 많이 있었지만, 그것을 전하기 전에 이미 초신자들은 우리 교회에 대해 편견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현실적인 문제보다도 교우들의 신앙고백 훈련에 여러 가지 장애를 느끼기 시작했다. 초신자들에게 개역성경이 아닌 성서를 사용하는 문제나 일반 찬송가보다는 '민중복음성가'를 사용하는 문제, 젊은 층이 대부분인 교우들에게서 오는 문제 뿐만 아니라 사회문제의식이 뛰어나 일반인들을 압도해 교회를 점점 특별한(?) 교회로 만들어 갔다.

고민 고민하다가 교우들 앞에 우리 교회의 특수성에 대한 몇 가지 주제를 정리해 공동의회 때 내 놓았다. 교우들 역시 그동안 그런 문제를 충분히 느끼고 있었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어떻게 할 것인가의 문제에서 일부 반대가 없지 않았으나 교우들은 '가스펠 송'이라고 부르는 찬양도 선별해 채택하자고 했다. 흔히 '경배와 찬양'류의 찬양인도가 아니라 교우들이 중고등부 시절 불렀던 노래도 좋았기 때문에 적절하게 부르는 것도 좋다는 취지였다. 교회의 신앙적인 스펙트럼이 넓어야 한다는 생각에 동의하는 분들이 있는가 하면, 대중적 관점에서 수용해야 한다는 분들도 있었다. 어쨌든 해인교회는 그 때부터 「찬미 1500」이라는 책을 구입해 예배 시에 사용하기에 이르렀다.

그로부터 민중교회에도 새로운 책자를 보급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류형선'씨의 기여가 컸다고 본다. 신학적, 신앙적으로 상당히 좋은 노래가 만들어졌고 민중교회에 널리 보급되기 시작했다. 민중교회의 성서적 신앙적 배경이 되는 노랫말이 교우들을 충분히 감동시키고도 남았다. 시대도 변하면서 교우들은 시위현장에서 부르던 '민중가요'보다는 이와 같은 노래들을 선호하는 듯 했다. 그 안에는 국악찬송도 포함한다.

▲ 여신도회가 율동과 함께 하는 찬양. ⓒ이준모

그러나 국악찬송은 다시 어른들 사이에서 문제가 됐다. 국악찬송을 부르면서 치는 장구가 마치 '무당 굿'을 연상하게 했고, 역시 나이가 좀 드신 초신자에게는 교회가 혹시 이단이 아닌가하는 의구심마저 들게 했다. 쉽지 않았다. 예배에 고정적으로 채택된 '죄의 고백' 뒤에 이어지는 '주께서 왕이시라'는 굿거리 국악찬송은 기존교회에서 이동해 온 초신자들에게 문제를 불러 일으켰다. 뿐만 아니라 교회가 사용하고 있는 '표준새번역'에서 오는 낯설음이 더욱 혼란스럽게 했다.

하비콕스는 21세기 목전에서 쓴 그의 책 「영성, 음악, 여성」에서 미국 역시 예배와 재즈, 색소폰이 만나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는데, 이는 한국교회에 민중교회가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가는 과정과 매우 흡사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놀랍게도 재즈는 차별받던 사람들과 환경적으로 열악했던 비슷한 여건 속에서 태어났다는 것이다.

그런데 기존교회는 예배에서 재즈를 사용하려고 하지 않았는데 비해, 성령운동을 하는 교회는 이를 적극적으로 받아 들였다는 것이다. 백인교회들은 예배음악으로 재즈를 채택하지 않았지만, 성령운동의 교회는 미국사회에서 억압에 저항하고자 했던 흑인들과 친근한 재즈음악을 받아들임으로써 사회적으로 차별받는 사람들의 독특한 경험을 예배에 반영했다. 그것은 개인의 체험을 넘어 집단적인 경험이었다.

국악찬송은 한을 넘어 신명을 풀어냈다. 가슴에 억눌렸던 것들이 하나님을 향해 분출하는 것뿐만 아니라 흥을 돋군다.

놀라운 일이 생겼다. 실직 노숙자 쉼터와 가정폭력피해자시설소를 운영하면서 노숙인들과 피해자들이 함께 예배하면서 찬양에 변화가 일기 시작한 것이다. 찬양을 부르면서 눈물을 흘리는 모습들이 종종 눈에 띠기 시작했다.

"하나님 사랑의 눈으로 너를 어느 때나 바라보시고 하나님 인자한 귀로써 언제나 너에게 기울이시니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춰주시고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 너는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만 바라볼찌라."

"온 세상 만드신 하나님 앞에 여기 버려진 언덕에 서서 기도드리니 눈물로 가꾸는 생명의 열매 함께 나누는 기쁨의 그날을 노래하네 쓰러진 땅 일으켜 갈라진 땅 보듬어 그의 나라 일구는 희망의 손길로 살아 창조주 하나님 사랑 햇살처럼 가득히 넘치게 하리라 가난한 마음에 창조주 하나님나라 이슬처럼 찬란히 빛나게 하리라 할렐루야."

성가대도 기존교회에서 사용하는 성가대복에서 개량 한복으로 바꾸었다. 성가대가 다양한 곡들을 소개하면서 이런 찬양문화를 이끌어 갔다. 고백이 있는 찬양, 민중교회의 신앙을 담아 주는 찬양, 때로 차분하게 기도하게 하는 찬양부터 경쾌하고 힘찬 찬양을 소개하기 시작했고, 교우들 전체가 함께 부르면서 자신의 신앙고백을 찬양에 담아냈다. 여전히 무료급식소를 통해서나 쪽방을 통해 교인으로 등록하는 사람이 부르기에는 낯설고 부르기 어렵지만, 교회의 찬양하는 분위기가 이들을 흠뻑 젖게 한다.

찬양은 어떤 찬양을 부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열망하고, 고백하고, 자신을 담아 전적으로 드리려고 하는 이들의 예배다. 음악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우리를 하나님께 드리게 하는 또 다른 힘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음악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선입관이나 편견, 차별을 넘어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고자 하는 이들의 예배일 때에 진정한 의미에서 찬양이 될 것이다.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한 연주가 아니라 이런 찬양이 살아 있는 교회가 건강한 교회이며, 우리 모두의 신앙고백이 어우러질 때 교회는 더욱 신명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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