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일이 죽었다. 그것도 객사했다. 남의 나라 남의 땅에서. 그가 죽은 일의 책임을 둘러싸고 무성한 이야기가 있다. 마치 폭풍처럼 이제는 지나가 버린 그의 죽음.

그의 죽음 소식이 있던 그 주일에 우리 교회 성도들과 나는 진종일 울면서 예배했다. 너무 억울하게 죽었고, 너무 어이없게 죽어서. 무책임한 정권에 생명을 돌볼 줄 모르는 위정에 분노하며. 그렇게 나는 비보를 듣고 차 안에서 울고, 광화문 촛불집회에서 울고, 또 하나님 말씀을 전하면서 울었다. 나도 울고, 성도들도 울었다. 꽃다운 넋이 그다지도 맥없이 가버려서. 분하고 비통하고, 그 자리가 내 자리가 될 수도 있었음에 소름이 돋아 정신조차 아득했다.

그이가 그렇게 가고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려는 많은 시도가 있었다. 그의 독특한 이력에 사람들이 이것저것 갖다 붙였다. 외대 아랍어과를 나왔고, 목사가 되기를 원했고, 이슬람에서 선교하기를 원했던 젊은이. 그래서 그의 죽음에 곧장 따라오는 수식어는 순교자였다.

나는 김선일의 죽음이 누구보다 안타깝다. 슬프다. 무슨 이야기든 해야 하기 때문에 글은 쓰지만, 지금도 가슴이 아리고, 그의 죽음이 떠오르자 또 눈물이 흐른다. 그러나 나는 그를 순교자로 여기지 않는다. 그는 단지 무능한 정권이, 미국의 시녀로서 이라크 민중들이 원치도 않는 군대를 파병하고 또 파병하려고 했기 때문에 참수된 것이다. 순교자가 아니다.

또 다른 이들은 그를 용기 없는 그리스도인으로 매도했다. 이유는 그가 그리스도인이라면서 마지막 순간에 살려달라고 구걸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그렇게도 그 이들의 비위를 상하게 하는 이유가 되는지 공감되지 않는다. 기왕 죽으려면 예수 믿으라고 한 마디 하고 죽으면 얼마나 좋았겠냐는 것이다.

소름이 끼친다. 오한이 든다. 저주의 악다구니를 쏟아내고 싶지만, 스스로 더러워지지 않기 위해서 참을 뿐이다. 그것도 기업을 운영하는 경영인들조차 조심스러워하는 세습을 해 아들을 강단에 세운 작자가 억울한 한 사람의 죽음에 분탕질을 해대고, 성도들은 또 그 말에 아멘을 해대는 꼬락서니를 어떻게 이해할까?

나는 그가 순교자라 생각하지도, 그렇다고 용기 없는 그리스도인이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나와 같고, 우리 성도들 같은 그런 생명이었다. 그런 생명이 간 것이다. 하나님의 생명이 간 것이다. 꽃이 떨어져도 마음이 아프고, 나뭇가지가 부러져도 눈물이 난다. 하물며 사람의 생명을 말해 무엇 하겠는가! 그저 불의한 전쟁에 개입한 힘없고 무능한 한 나라의 국민이라는 것이 그의 죄라면 죄겠지.

그런 더러운 전쟁의 와중에 우리를 대신해 희생당한 한 마리 무고한 양으로 그렇게 제물이 됐을 뿐이다. 그래서 가슴이 아프다. 그래서 눈물이 난다. 한 생명이 그렇게도 고귀하기에, 그렇게 맥없이 가서 운 것이다.

한 사람의 생명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는 것이 그리스도교이다. 나는 함부로 보복을 말하고, '복수는 나의 것'이라 말하는, 하나님의 방법을 포기하는 사악함과 무서움을 드러내는 우리나라 교회의 현실에 아연해진다. 당장 보복해서 김선일의 원수를 갚자는 교회의 말을, 목사들의 말을, 성도들의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모르겠다. 다만 손이 부들부들 떨릴 뿐이다.

더 이상 상대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도 않고, 죽이면 죽고, 창으로 찌르면 찔리고, 가시 면류관을 씌우면 썼던 예수님은 당신들에게 무엇이며, 원수를 사랑하라는 계명은 도대체 당신들에게 무엇인지, 모르겠다. 제발 한 생명을 귀하게 생각하자. 제발! 제발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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