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 불감증의 만연으로 일어나는 사고들, 전쟁과 원인을 알 수 없는 질병으로 인한 불안감, 그리고 폭력과 파괴로 소외감을 분출하는 사람들. 이런 시대에 살고 있는 나는 어떤 모습일까. 혹 사회의 굴절한 모습에 감화해 롯처럼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성도는 하나님의 선물인 구원에 감사하면서 그리스도의 장성함에 이르는 길을 걸어가야 한다. 그런데 성숙함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성숙함은 어떠한 가치가 있으며, 그 성숙함이란 어떻게 얻어질 수 있을까.

1. 세 부류의 인생

성경은 인간의 삶을 크게 세 부류로 언급한다. 먼저는 거듭나지 못한 자연인으로, 그리고 거듭났으나 세속적 기준과 가치의 틀을 벗어버리지 못한 거듭나지 못한 자로, 마지막으로 성도됨의 의미와 가치를 깨닫고 그 삶의 기준과 가치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뿌리를 내린 신령한 자로 나뉠 수 있다. 물론 에스겔서 37장의 말씀을 들어 성도의 성장 단계 또는 수준을 좀 더 상세히 조명할 수도 있다. 그러나 두부 자르듯이 각 단계를 획일화할 수 있는 것은 아니므로 여기서는 세 종류의 삶을 생각하면서 기술하고자 한다.

2. 성숙함의 정의

다수의 성도들이 자신의 신앙을 표현할 때 부족하다고 겸손하게 말하면서도 마음으로는 그래도 내가 괜찮은 성도라는 위안을 하면서 신앙생활을 한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바울과 같은 인생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구별해 세웠기 때문에 자신을 그러한 신앙인격에 견주는 것은 불경한 것처럼 말한다. 왜 그럴까? 겸손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교만하기 때문일까.

사도 바울은 엘리야가 자신과 성정이 같은 사람이었으나 불병거를 타고 승천할 만큼 믿음의 사람이었다고 말하며, 모든 성도가 그리스도 안에서 똑같이 부르심을 입었으며 엘리야처럼 성숙함에 이를 수 있음을 가르쳤다.

그러면 왜 대부분의 성도들이 성장이 멈춰버린 영적 장애아와 같은 딜레마에 빠지는 것일까. 그것은 신앙 초기에 성숙함에 이르는 길을 배우지 못하기 때문이며, 성숙을 향한 성령이 주시는 마음을 분별하지 못하고 그저 종교적 신앙에 안주하기 때문이다.

성숙함이란 하나님 중심의 가치 기준으로 신앙적 가치와 세속적 가치를 분별해, 말씀에 집중하고 순종하면서 그리스도를 온전히 의지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의 인격에 이르는 것이다. 바울은 이것을 푯대를 향해 부름의 상을 달려간다고 고백했다. 이러한 성숙함은 교회생활의 기간이나 직분에 의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 어떻게 얻어지는가?

3.성숙을 향한 정진

1) 심고 거두는 법칙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쉬지 아니하리라' (창세기 8장 22절)

포도나무를 심어야 포도를 기대할 수 있다. 우리 마음에 생명의 씨앗인 말씀을 심지 않고는 그 입술에서 은혜로운 말씀이 나오는 것을 기대할 수 없다. 다시 성경은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내어놓는 다고 말씀한다. '선한 사람은 마음의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의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누가복음 6장 45절)

분명 사람은 자신이 가치 있게 생각하는 것에 관심을 갖고, 그 일에 시간과 물질을 투자하고 이야기의 화제로 삼는다. 그러므로 그 사람이 가장 즐겨하는 대화의 내용이 무엇이냐를 보면, 그 사람의 내면 즉 그 사람이 추구하는 삶의 목표를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성도는 삶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갈급해 하고 시간과 수고를 아끼지 않는 열심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구할 수 있다. 그것이 성경이 말씀하는 원리다.

우리가 읽는 모든 성경이 인간 저자에 의해서 기록된 것이다. 성경은 인간과 저자의 사상이 하나님께서 의도하는 가치의 삶을 구현함으로 하나님과 인격적 일치를 이룬다. 이를테면 성도를 달에 비유하고, 태양을 그리스도라 치자. 하여, 그리스도의 빛이 달에 반사해 달 자신은 그 빛을 잘 깨닫지 못하나 세상을 비추는 이치와 같다. 그러므로 성도가 그리스도를 닮고자 한다면 성령께서 주는 마음을 따라 말씀을 사모하고 부지런히 탐독해야 한다. 이 길은 많은 수고와 시간과 때론 물질과 지루함과 멸시함 등을 견뎌야 한다.

2) 나눔의 법칙(풍요의 법칙)

하나의 씨앗을 심으면 하나의 열매가 아닌 수십 배의 열매를 얻을 수 있다. 우리는 열매를  서로 나눌 수 있다. 같은 이치로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면 성령의 조명하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삶의 풍성함에 이를 수 있다. 이러한 나눔은 수직적인 관계의 선포의 말씀과는 달리, 격식 없는 성경공부와 같은 수평적 관계에서 이루어진다. 하나님과 성도의 관계도 수직적 관계와 수평적 관계가 있다. 주님께서도 공생애 기간 동안 제자들과의 관계에서 말씀만 선포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질문에 답하며, 물음이 없을 때는 오히려 질문을 던지는 시간을 가진 기사를 많이 볼 수 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교회의 현실은 수직적 관계에만 집착한다. 성도는 듣고 배워야하고 목회자는 가르쳐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수평적 나눔의 관계를 가지면 마치 권위가 떨어진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질문이 많은 성도를 피곤해 하며 머리만 커진 성도라고 폄하한다.

야고보가 그 서신에서 지적한 것처럼 인간은 한 목구멍에서 단물과 쓴물을 내는 존재다. 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자신의 이중적인 면을 보면서 통탄하는 것처럼 만일 성도가 말씀으로 가치를 정립하고 그 가치를 따라 살아가고자 한다면 충돌로 인해 견디기 힘든 혼란과 아픔을 겪게 된다. 의지적 선택에 있어서 중요함의 우선순위가 삶에서 바뀌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겪은 성도는 자신의 혼란에 대해 도움을 구하고 싶어 한다. 이러한 아픔은 단순한 몇 마디 성경구절로 해결할 수 없다. 설교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말씀이 중심 되지 않는 성도의 교제는 비록 세속적 공감대가 형성된다 하더라도, 성숙과는 관련이 없으며 유익도 없다.

4. 성숙함의 의미(가치)

바울서신 중에서도 특히 에베소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안에서, 성령 안에서, 등과 같이 '안에서'라는 표현을 끊임없이 반복한다. '안에서'라는 표현의 이해는 성도가 접하는 두 개의 세계(동일한 객관적 현실에 대해 인간의 이성을 중심으로 보는 세속적 세계와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이해하는 신적 세계관)를 생각하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다.

바울 사도는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에베소서 2장 12절) 라고 말해 그리스도 안과 밖을 구별한다. 그는 자신이 두 세계를 경험하는 존재인 것을 깨닫고 성도에게도 계속해서 이러한 사실을 주지시킨다. 

환언하면 성숙한 성도는 이 두 세계를 분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그리스도 안에서'란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와 가치가 있기에 사도는 강조하고 있는 것일까?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 없는 세상에서 자기가 주인 되어 가치를 부여하고 살아간다. 성도는 하나님 중심의 삶과 자기중심의 삶을 실현하며 살아간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성도의 삶만 그 가치를 인정하신다. 그러므로 천국에서 영원하신 하나님 앞에서 살아갈 성도는 신의 성품에 참여한 만큼 하나님과 친밀함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다.

성도에게서 복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무엇일까? 교회의 할례 받지 못하고 사용하 는 용어들은 성도의 신앙을 더욱 병들게 한다. 가장 대표적인 단어가 '복'이란 단어다. 복의 본질은 이해하지 못하고 결과적 측면만을 생각해 물질을 지나치게 부각시킨다. 그리고 그 오해로 신앙생활에 혼란이 오고 병이 드는 것이다.
 
그러면 천국을 생각할 때 떠오르는 것이 무엇일까? 참으로 많은 성도들이 천국에 대해 왜곡된 지식과 생각을 갖고 있다. 계시록 21장을 살펴본 성도라면 가히 상상할 수 없는 천국의 아름다움을 마음에 품고 있을 것이다. 나 역시도 그렇다. 그러면 천국의 실체란 계시록에 펼쳐진 환경처럼 모든 의미가 있을까?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로마서 14장 17절)고 말한다.

즉 천국의 본질은 환경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의 질에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천국의 환경이 아름답게 성도에게 주어진다 해도 성도의 인격적 성숙함이 얼마만큼 그리스도를 닮았느냐에 따라, 누림의 능력도 달라진다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복의 본질도 하나님과의 관계, 즉 관계의 질(깊이)이 분명하다.

성도가 고난 중에 있다 하더라도 그러한 고난이 그리스도를 사모하고 그의 말씀을 청종하는 동기가 된다면 그 자체가 복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물질적 부요가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에 게으름의 동기를 준다면 그것은 저주스러운 것이 된다. 성도의 처한 환경과 형편이 어떠하냐가 복을 받았는가의 판단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떠하냐가 복을 받고 있는가의 판단 기준이라는 것이다. 성경은 성도를 생에서 나그네로, 행인으로 말씀한다. 우리의 소망은 생에서 건강이나 물질적 풍요를 누리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창세로부터 예비 된 상속받을 나라에 있다. 그러나 준비된 풍족한 나라를 더 많이 누리기 위해서는 금생의 삶이란 훈련을 잘 받아야만 한다.

이제 마지막으로 욥기를 들어 이야기를 맺으려고 한다. 많은 성도들이 고난 중에 욥기를 생각한다. 그리고 욥기 미말의 열배나 되는 풍요를 음미한다. 그러나 신약에서 욥기에 대해  한 구절이 나오는데 거기에는 '인내'라는 단어로 욥기를 정리한다.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야고보서 5장 11절). 우리의 기대와 다르게 성경은 인내를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인내에 대해 '이제 인내와 안위의 하나님이…(로마서 15장 5절) …예수를 …십자가를 참으사…(히브리서 12장 2절)…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로마서 8장 26절)라고 성 삼위께서 인내하심을 표현하신다. 사랑 장으로 알려진 고전 13장도 면밀히 들여다보면 핵심단어가 인내임을 발견할 수 있다.

그렇다.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에서 우리의 죄 된 본성을 버리고 신의 성품에 참여코자 한다면 인내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렇게 단련된 그리스도를 닮은 인격은 예비하신 나라를 누리는 능력이 될 것이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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