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애통하는 마음은 사랑에서 비롯된다. 사랑 없이 진정으로 슬퍼할 수 없다. 그래서 애통(哀痛)은 슬픔의 아픔이 아니라 사랑의 슬픔 곧 애통(愛痛)이다. 사랑하기에 느끼는 아픔이다. 사랑 안에서 아파하고 사랑으로 고통에 동참하는 것이 예수가 보여준 사랑이요 슬픔이었다. ⓒ뉴스앤조이 신철민
팔복 중 애통의 복은 이해하는 것조차 버거운 말씀이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쉽게 이해할 수도 있다. '예수가 바로 우리를 위해 애통하며 슬퍼하시지 않으셨는가? 그래서 그는 우리의 고난을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이 아니냐? 우리는 그것을 십자가라는 상징을 통해 늘 회상하고 있지 않은가? 그리스도가 우리의 고난을 대신 슬퍼하셨듯이 우리 또한 병들고 고난받는 세상과 사람을 위해 애통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일 아닌가?' 이러한 이해가 틀린 것만은 아니다.

그러나 이런 이해만으로 애통을 하나의 존재론적 영성으로 자리매김하기란 부족해 보인다. '존재론적으로 기독교인은 이웃의 고난이나 아픔을 지나치거나 흘려 보낼 수 없는 존재'라고 믿는다 해도 '슬퍼하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에 쉽게 동의할 수 없다. 그 이유는 우리가 진정으로 슬퍼하는 사람과 함께 하지 않아서 그들의 행복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한 예수가 말한 슬픔의 의미가 가슴에 꽂혀 있지 않기 때문이다.

감정으로서가 아니라 존재로서의 슬픔은 우리가 생각하는 부정적인 의미에서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의 발로가 아니다. 애통의 영성은 전 존재가 사랑으로 변화해가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영성이다. 사랑하는 자만이 깊이 슬퍼할 수 있다. 애통하는 마음은 사랑에서 비롯된다. 사랑 없이 진정으로 슬퍼할 수 없다. 그래서 애통(哀痛)은 곧 슬픔의 아픔이 아니라 사랑의 아픔, 사랑의 슬픔 곧 애통(愛痛)이다. 사랑하기에 느끼는 아픔이다. 사랑 안에서 아파하고, 사랑으로 고통에 동참한다. 그것이 예수가 보여준 사랑이요 슬픔이었다.

상처받은 사람들을 위해 눈물 흘리신 예수

하루는 예수께서 사랑하는 나사로가 죽을병에 걸려 고통을 받는다는 전갈을 받는다. 그 소식을 들은 예수는 의연하게 "그 병은 죽을병이 아니다. 그것으로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아들로 영광을 받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요 11:4). 그러고도 예수는 이틀 동안이나 그곳에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머무르셨다가 이틀이 지나서야 유다 땅으로 돌아가셨다. 사실 그곳은 예수의 적대자들이 많아 목숨이 위협받는 곳이어서 제자들은 말렸다. 그러나 예수는 "나사로가 잠들었다" 하시고는 그곳으로 갔다.

나사로는 죽은 지 벌써 나흘이 지난 상태였다. 마르다는 예수가 원망스러웠는지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오빠는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21절)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번에도 예수는 감정의 변화 없이 자신 있게 말한다.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 이번에는 마리아가 마중 나왔다. 그녀도 똑같이 말한다. "주님, 주님이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녀의 말이 얼마나 슬픔을 돋아냈는지 그곳에 있던 유대인들까지 울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그들이 우는 모습을 보던 예수, 이제껏 의연하셨던 예수가 비통해하시지 않는가? 그리고 눈물을 흘리시지 않는가? 자신이 말한 대로라면 나사로는 '죽을병에 걸린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것이고, 죽었지만 살아날 것인데' 예수는 도대체 무엇이 비통하고 무엇이 슬퍼서 그렇게 우셨단 말인가! 그것도 잠깐이 아니라 나사로의 무덤에 갈 때까지 그렇게 슬퍼하며 가셨단 말인가! 슬퍼할 이유가 전혀 없어 보이는 상황에서 예수는 눈물을 참지 못하고 슬픔을 표현하셨다. 그 슬픔에 젖은 눈빛이 벌써 죽은 지 나흘이 지나 냄새나는 나사로를 살리신다.

"나사로야, 나오너라."

가슴에 담긴 사랑과 눈물이 함께 복받쳐 오른 소리다. '나사로야! 너는 죽지 않았어! 그렇게 죽어 있을 수 없어! 어서 나와!' 이렇게 외칠 때 예수는 어떤 표정이었을까? 슬픔이 걸러내진 냉철한 사랑, 전능한 능력으로 감정 없는 표정? 혹은 비통함이 정제된 사랑? 아니다! 그것을 어찌 사랑이라 말할 수 있겠는가! 예수의 사랑은 그런 사랑이 아니었다. 냉혈한 사랑이 아니라 따스한 인간의 사랑이었고 그래서 부활을 믿음에도 불구하고 눈물을 흘리신 것이다.


애통(愛痛)해 하시는 예수는 겟세마네 동산에서도 눈물을 흘리셨고, 예루살렘을 바라보면서도 눈물을 흘리셨다. 슬퍼하고 눈물을 흘리신 예수를 보고 어느 누가 하나님에 대해 믿음 없다고 말하겠는가? 나사로, 혹은 예루살렘은 아픔과 상처받은 사람과 공동체를 상징한다. 예수는 지금도 나를 보고, 우리를 보고 눈물을 흘리고 계신다.

슬픔을 절제하라고 하는 한국교회

한국교회의 장례문화를 보면 참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모습이 있다. 사랑하는 가족 혹은 성도가 죽어서 장례를 치르는데 장례예배나 입관예배를 집례하는 목사들은 한결같이 "죽어서 하늘나라에서 만날 테니 슬퍼하지 마라"고 설교한다. 더 좋은 하나님나라에 가셨는데 뭐가 슬프냐고 되묻는다. 이것이 진정한 위로일까? 아마 예수도 처음 나사로의 병 소식을 들었을 때 그런 마음이었는지 모른다. 어떤 목사는 슬퍼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을 나무라기까지 한다. 자기가 사랑하는 부모님, 아내나 남편 혹은 자녀가 죽어서 슬퍼하는 가족들과 함께 슬퍼하고 비통해하는 것 자체를 믿음 없는 행동인 듯 바라본다. 그래서 가족들은 슬픔을 참아내다 오히려 가슴에 한이 맺힌다.

이런 모습은 예수의 종교도 아니고 우리의 장례문화도 아니다. 장례식에서는 실컷 울고 슬퍼하도록 해야 한다. 사랑에 차서 슬퍼하는 자신을 보도록 해야 한다. 죽은 사람에게 못다한 사랑, 죽은 이로부터 제대로 못 느낀 사랑을 새삼 깨달으면서, 그가 육신으로 더 이상 함께 하지 못하는 슬픔을 표현하는 것이 어찌 비기독교적이란 말인가! 오히려 슬퍼함으로써 새로운 생명과 위로를 맛볼 수 있다.

그럴 때 그 슬픔은 슬픔으로 끝나지 않는다. 장례식에서 슬픔을 절제하라고 강요하는 목사는 "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라는 예수의 복된 말씀을 깨닫지 못한 사람이다. 예수는 이 세대를 '곡을 해도 울지 않는 세대'라고 비판하셨던 분이다. 그리고 슬퍼하는 자와 함께 눈물을 흘리라고 말씀하신 분이다. 사랑이 없어 슬퍼하지 않고, 사랑이 없어 슬퍼하는 자와 함께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냉혹한 세태를 비판하신 것이다.

유학에서 돌아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나는 나이는 많지만 함께 신학을 공부한 동료 목사님이 돌아가셨다는 슬픈 소식을 들었다. 사십대 초반에 처자식을 남겨놓고 암으로 그렇게 하나님 품으로 갔다는 사실로 더욱 마음에 슬픔이 맺혔다. 장례예배를 치르고 있는 지방교회로 내려갔다. 그 목사님이 담임하고 있는 교회여서 모든 장례절차를 교인들이 힘을 모아 치르고 있었다. 장례예배에서 여느 교회와는 다른 분위기를 느꼈는데 왜 그랬는지 그때는 잘 몰랐었다.

장례예배를 마치고 근처에 있는 또 다른 친구 목사의 교회에 들렀다. 거기에서 나는 믿기 어려운 이야기를 들었다. 암으로 죽어가던 목사는 더 이상 병원에서조차 손을 쓸 수가 없어서 집으로 데려가라는 진단을 받았고, 이 친구 목사가 그의 죽어가는 몸을 차에 싣고 교회로 돌아왔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안 몇몇 장로가 죽어가는 목사를 맞이하기를 거부했다. 교회와 붙어 있는 사택에 죽어가는 사람을 놓아둘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하나님의 전(展)에 암으로 죽어가는 더러운 몸을 놓아둘 수 없다는 그들의 생각에 기가 막혔다. 짧지만 그래도 자신의 교회에서 목회했던 담임목사가 아닌가? 친구 목사는 이 죽어가는 목사를 차에 싣고 이틀을 떠돌아다녔다. 이곳저곳 알아봤지만 병원에서도 받아주지 않았다. 겨우 한 기독병원에서 받아줘서 잠시 머물다가 '죽어도 교회에서 죽겠다고 외치는 목사'의 청을 도저히 뿌리칠 수가 없어 다시 죽어가는 몸을 싣고 교회로 돌아왔는데 교회에 도착하자마자 죽었다는 것이다. 그제야 나는 장례식 분위기를 이해할 수 있었다.


▲ 팔복의 영성. ⓒ뉴스앤조이

나는 이 이야기를 떠올릴 때마다 슬픔을 가누지 못하고 말할 때마다 목이 메인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나의 눈가에는 눈물이 맺힌다. 남의 아픔과 고통을 슬퍼할 줄 모르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닌 것은 둘째치고 사람이 아니다. 애통할 줄 모르는 교인, 애통할 줄 모르는 목사, 애통할 줄 모르는 교회이기에 하나님의 위로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위로를 맛보지 못했기에 남을 위로할 수 없는 것이다.

믿음이 있으면 슬퍼하지 않고, 슬퍼하는 것은 믿음이 없는 것이라는 말에서의 슬픔은 현상적인 슬픔이지만, 예수의 슬픔, 애통의 영성은 사랑함으로 말미암은 존재의 자연스러운 드러남이다. 그래서 애통의 영성은 사랑의 영성이다. 사랑의 크기나 깊이에 따라 느끼는 슬픔의 강도도 다르다. 예전에 대구 지하철 참사를 보면서 우리는 슬퍼했다. 그들의 억울한 죽음에 얽힌 갖가지 사연을 들을 때 우리의 슬픔은 더 커졌다. 그러나 그런 고통을 당한 사람들 중 자신의 가족이 있었다면 그 슬픔은 더욱 컸을 것이다. 곧 자신과 사랑의 관계 정도에 비례해 슬픔의 강도도 달라진다는 것이다.

사랑하지 않으면 절대로 슬퍼할 수 없다. 다른 사람, 나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는 남을 위해서, 자신을 위해서 울 수 없다. 이웃의 고통을 알고 슬퍼한다는 것은 이웃을 그만큼 사랑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슬퍼하는 자가 복이 있는 이유는 그 슬픔이 하나님과 자신, 그리고 이웃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런 슬픔을 지닌 사람은 오히려 슬픈 감정에 빠져 헤매거나 절망하지 않는다. 오히려 현실을 직시하기 때문에 연민에 빠지지 않는다.

주위의 아픔을 사랑으로 돌아보라

우리가 느끼는 슬픔이 하나의 존재의 깊은 영성으로 피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주위의 아픔을 사랑으로 돌아보지 않기 때문이다. 슬픔이 부정적인 감정의 찌꺼기로 남는 이유도 자신의 문제에 매몰되어 남의 아픔을 알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남에 대한 배려 없는 삶이 지속되다보니 이제는 그럴 여유도, 시간도 없다고 착각하기도 한다. 그래서 점점 슬픔은 개인화하고, 또 감정의 슬픈 현상만 지속될 뿐 '아래로부터 오는 영성'이 되지 못한다. 그런 우리에게 마더 테레사가 들려주는 다음의 일화는 애틋한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어느 날 저녁, 한 신사가 우리 집에 와서 말했습니다.

'자식이 여덟 명 있는 힌두교 가정이 있는데 오랫동안 제대로 먹지 못했습니다. 그들을 위해 무언가 해주십시오.'

나는 쌀을 조금 가지고 곧장 달려갔습니다. 아이들은 굶주림에 지친 표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쌀을 받은 아이들의 어머니는 얼른 반으로 나누어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녀가 돌아왔을 때 나는,

'어디에 갔었어요? 뭘 하고 왔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녀는 한마디로 대답했습니다. '그들 역시 배가 고프답니다.'

그 여자에게는 이슬람교도인 이웃이 있었고 그들 또한 배가 고프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나는 그날은 더 이상 쌀을 가져다주지는 않았습니다. 그 가정이 '주는 기쁨'을 누리게 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놀란 것은 그 여자가 쌀을 나눠준 것 때문이 아니라 이웃이 배고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이웃의 아픔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알 시간은 있습니까? 심지어 누군가에게 따뜻한 미소 한번 지을 시간은 있습니까?"

애통의 영성을 일으키는 것은 비단 사람의 상처나 아픔만이 아니다. 이 우주 속에 고통받는 모든 피조물에 대한 애통 또한 우리의 영성을 북돋는다. 성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 김진 목사 / 크리스챤아카데미 선임연구원. ⓒ뉴스앤조이 신철민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오늘날까지 다함께 신음하며 진통을 겪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피조물만이 아니라 성령을 하나님의 첫 선물로 받은 우리 자신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날과 우리의 몸이 해방될 날을 고대하면서 속으로 신음하고 있습니다."(롬 8:22∼23)

우리의 애통이 모든 피조물의 신음과 진통에 대한 사랑에 찬 슬픔으로 넓혀질 때 하나의 영성이 될 것이다. 피조물의 아픔이 나의 아픔으로, 온 자연의 아픔이 나의 아픔으로 느껴지는 생태적 감수성과 영성이 동시에 일어날 때 애통의 영성은 더욱 넓어질 것이다.

엔크리스토출판사에서 출간한 '김진의 영성이야기' 시리즈 중 「팔복의 영성」을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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