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러세력의 잔인함을 극명히 보여준 의인의 죽음, 마땅히 국립묘지로…."
"이라크선교를 꿈꾸다가 순교한 고귀한 죽음이다."
"죽음을 두려워하면서 전도도 하지 못한 아주 부끄러운 죽음이다."

요즘 고 김선일 씨의 죽음을 둘러싸고 보여준 일부 목회자들의 갖가지 해석은 한국교회의 처참한 수준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아 한없이 안타깝다. 정말 그럴 교회나 안 그럴 것 같은 교회나, 그럴 분이나 안 그럴 것 같은 분이나 왜들 그러시는지 모르겠다. 이 기회에 나는 정말 우리가 믿는 신앙, 우리가 고백하는 교회가 무엇인지 십자가 앞에서 정직히 물어야 할 때라고 믿어 이 글을 쓴다.

상대방 무시한 일방적 선교

단적으로 말한다면 요즘 김선일 씨를 순교자로 추앙하며, 이걸 기회로 당장 복음의 불모지 이라크에 교회를 세워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분들을 보면 나는 그 분들이 정말 복음이 무엇이며, 교회가 무엇인지 아는 분들인지 솔직히 의심스럽다. 문제의 핵심은 이라크 선교를 할 것이냐, 말 것이냐가 아니다. 목숨 걸고 할 것이냐, 흉내만 내다가 여의치 않으면 포기할 것이냐도 아니다. 우리가 복음의 내용과 방식을 너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 김선일 씨의 죽음을 보면서 지금 당장 이라크 선교를 하자는 시각은 점령군 미군의 시각과 조금도 다를 바 없다. 그러한 시각으로 이라크를 찾아들어간다면 복음의 전령이 아닌 또 하나의 정신적 점령군이 될 뿐이다. 사진은 한 조문객이 영구차에 걸린 김 씨의 영정사진을 바라보는 모습. ⓒ뉴스앤조이 이승규
첫째, 우리의 선교(목회·전도)는 너무나 일방적이다. 받아들이는 사람의 입장이나 형편을 고려하기보다는 전하는 자의 열정만이 전부인 것처럼 생각한다. 지금 서둘러 이라크 선교를 말하는 분들의 머리에는 자기들 나름대로의 역사와 생각과 감정을 가진 구체적인 한 사람이 보이는 게 아니라, 그저 불모지 이라크땅의 선교대상이 살고 있다는 생각만 있을 뿐이다. 그들이 이번 전쟁을 어떻게 생각하며, 미국과 그 동맹국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따위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9·11테러가 일어나기 전부터 이슬람과 기독교문명 사이의 충돌은 충분히 예고된 일이고, 부시 대통령을 비롯한 미국의 수뇌부들은 이 전쟁이 '악마 이슬람'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임을 기회 있을 때마다 암시해왔다. 당연히 이라크를 비롯한 이슬람 사람들도 이 전쟁이 미국을 등에 업은 기독교문명의 침략으로 생각한다. 그렇다면 옳든 그르든 이슬람에게 기독교선교는 미국 제국주의의 힘을 정당화시켜주는 이데올로기에 다름 아니다.

유사 이래 언제든 자기희생적 십자가가 아닌 힘(권력·무력·경제력 등)을 업고 들어갔던 십자가는 실제로 제국주의의 이데올로기가 되어 갔다. 중세의 십자군운동이 그러했고, 근세 유럽 국가들에 의한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 침략이 그러했다. 한사코 싫다는 여인을 쫓아다니며 우악스런 손길로 붙잡고 "난 너를 사랑해. 나랑 결혼하자"고 외치는 사람은 그 여인과 법적인 부부가 될 수 있을지는 모르나 진정으로 사랑을 얻지는 못한다.

음치의 3대 조건은 음정무시, 박자무시, 청중무시다. 무분별한 자기열정에 도취한 기독교인들은 목소리를 높여야 할지 낮추어야 할지 모르니 음정을 무시하며, 쉬어야 할 때인지 말해야 할 때인지 모르니 박자를 무시하며, 사람들이 좋아하든 싫어하든 억지로 들어라 하니 청중을 무시한다. 이것은 싫다는 사람을 억지로 객석에 앉혀놓고 무대에서 춤을 추며 박수를 치라는 것과 같다. 지금 당장 이라크선교를 하자며 목 놓아 외치는 분들의 시선을 보면 거의 하나같이 점령군 미군의 시각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것을 발견한다. 그러한 시각으로 이라크를 찾아 들어가면 복음의 전령이 아닌 또 하나의 정신적 점령군이 될 뿐이다.

건물에 목숨 거는 기독교인들

둘째, 우리의 교회론은 아직도 너무 건물 중심적이다. 우리는 교회가 단지 그럴 듯한 시설을 갖춘 건물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을 공유하는 성도의 공동체임을 믿는다. 그러나 선교조급증에 빠진 분들의 교회론을 가만히 살펴보면 우려할 정도로 '건물 중심적'이다. 하나님의 주권에 복종하려는 마음도, 자기부인도,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실제적인 평화(샬롬)가 없는데도 강대상에 가운 입은 목회자가 있고, 십자가를 매단 그럴듯한 건물이 세워져 있으면, 그것이 한사코 교회라고 자부하는 습관이 우리에게 있다. 주님의 마음과는 전혀 다른 마음이다.(마 5:21∼24)

지금 이라크 바그다드 한복판에 교회건물이 서고, 신학교가 세워진다고 하자. 그러나 그 건물들은 분명히 5공화국시대 민정당사처럼 무장한 군인들이 철통같이 지키고, 출입하는 모든 사람을 일일이 검사하는 건물일 것이다. 그것은 분명 교회가 아니다. 기독교는 강자의 이데올로기요, 교회는 그 선전무대라는 시각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데, 그럴듯한 건물을 지어놓고 십자가 얹어놓는 것이 그토록 시급할까?

나도 목사다. 그래서 목회자들의 생리를 잘 안다. 목회자들이야말로 설교단상에서는 "교회는 하나님이 세우신다"라고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돈과 사람만 있으면 교회는 얼마든지 세울 수 있다"고 믿기 쉬운 사람들이다. 그렇게 세운 건물을 보며 우리 주님이 분명히 하실만한 말씀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선생님, 보십시오, 얼마나 굉장한 돌입니까! 얼마나 굉장한 건물들입니까!"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 큰 건물들을 보고 있느냐? 여기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질 것이다."(막13:1~2 「표준새번역」)

진정한 복음, 진실한 선교는 때로 뼈를 깎는 아픔을 갖고 참고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한다. 진정한 교회는 때로 스데반처럼 분노한 군중들이 던지는 돌멩이를 맞을 줄도 알아야 한다.(행 7:54∼60) 가진 힘을 바탕으로 혈기가 펄펄 살아서(마26:51, 눅9:54) 별로 느껴지지도 않는 '하나님의 사랑'을 강요할 것이 아니라, 원하시면 열 두 명도 더되는 천사를 동원할 권세를 갖고 계시면서도 그저 묵묵히 당하신 예수님처럼(마26:53∼54) 우리도 당할 때 그들도 우리 속에 있는 복음의 진심을 깨달을 날이 있을 것이다.

창백한 부활사상을 넘어서

요즘 기독교인 김선일 씨가 죽음 앞에서 두려워 떨며 전도하지 못 했다고 설교에서 꾸짖은 어느 목사님이 그 설교로 인해 곤욕을 치르고 있다고 한다. 나는 목사다. 천국을 확신하며 영생을 믿는다. 그러나 나는 아직 죽고 싶지는 않다.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으면 가급적 살 길을 찾고 싶다. 그리고 신앙을 따랐지만 갑작스럽게 요절한 청년의 부모님께 "천국 갔는데 뭘 슬퍼합니까? 울지 마십시오"라고 꾸짖는 게 영생의 믿음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우리 믿음 좋은 그리스도인은 너무 쉽게 비약한다. 김선일 씨는 그저 살고 싶어 했다. 그러면 안 되나? 애국자다 아니다, 순교자다 아니다 딱지를 붙이기 전에 그저 한 사람으로서 살고 싶어 한 마음을 그것 자체로 볼 수는 없을까? 겟세마네동산에서 밤을 새워 "가능하다면 제가 십자가를 지지 않을 수 없겠습니까?"하며 기도하셨던 주님,(마26:36∼44) 십자가 고통의 절정에서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마27:46) 하고 외친 주님의 절규를 굳이 인류 전체의 소외감을 대변하는 표현일 뿐이라는 신학적 해석으로 생각해야만 속이 시원한가?

물론 나는 주님이 그러한 죽음의 권세 자체를 극복하셨고, 죽음 너머의 완전한 승리를 보여주셨다고(요11:33, 38∼40) 믿지만, 그럼에도 주님은 인간의 죽음이 갖는 절망적인 느낌을 또한 철저히 받아들이셨음을 믿는다.(요11:35∼36)

우리는 큰 사명을 위해 마땅히 죽을 수 있다. 그러나 한 인간으로서 살고 싶은 것이 왜 비기독교적인가. 인간으로서 살고 싶은 심정이 정말 사무칠 때 그리스도의 복음을 사모하게 된다는 면에서 믿음 좋은 그리스도인은 한 인간으로서 더 많이 성육신되어야 한다. 삶에 대한 갈망과 부활에 대한 소망은 결코 모순되지 않는다. 부활의 권세를 전하기 위해서도 우린 이걸 더 배워야 한다.

민심을 떠난 선교란 없다

예수님의 생애 전체를 한 편의 선교이야기로 생각해 보자. 조금 단순하게 말하자면 예수님은 그 짧은 33년 중에서 무려 30년이라는 상대적으로 긴 세월을 그저 이웃과 함께 하는 좋은 유대인으로 사셨다. 천상에서 유대 땅으로 새로 이사 온 분으로서 자기가 자리잡은 땅을 배우려고 철저히 유대인이 되어 그들의 민족감정, 정서, 습성 등을 체득하셨다. 그래서 그 분의 설교, 비유, 활동을 보면 보통의 유대인들이라면 누구나 쉽게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소재들과 사건들로 가득 차 있다. "공중 나는 새를 보라, 들에 핀 백합화를 보라" "어느 씨 뿌리는 농부가 있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떨까? 욕심은 지극히 세상적이면서도, 삶의 자세에 관해서는 세상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 아니 사람들이 뭘 생각하고, 어떻게 살아가는지에 대해 도통 관심이 없다. 단지 걸어다니는 우리의 선교(전도) 대상일 뿐이다.

주님은 유대인으로서의 준비기간을 거쳐 때가 차매, '비로소'(마4:17) 본격적인 사역에 '겨우' 3년을 투자하셨다. 그리고 제자들이 주님의 말씀을 받을만한 신앙고백이 되는 것을 보시고서야 비로소 교회 세움을 말씀하셨다.(마16:13∼20) 그런 면에서 지금 우리의 공산권선교, 북한선교, 이슬람선교는 어떤가? 싫다는 사람을 완력으로, 돈으로 억지로 열어젖뜨리는 그런 것은 아닌가? 그러나 우리 주님이 보이신 교회, 주님이 선포하신 복음은 낮아질 대로 낮아지고, 죽을 대로 죽어서 상대방이 스스로 마음 문을 활짝 열어젖뜨리는 그런 것이었다. 그러니 복된(좋은) 소식(Good News)이 아닌가.

진리운동은 민심을 잃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기독교를 표방한 미국의 강압정책으로 인해 대테러전쟁 후 중동땅에서는 기독교에 대한 인식은 더 나빠졌고, 선교의 가능성은 더욱 좁아졌다. 국내적으로나 세계적으로도 이슬람에 대해서는 동정심이, 기독교에 대해서는 적대감이 더 높아졌다.

그러면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때까지 가만히 앉아서 때만 기다리라는 말인가? 결코 아니다. 때로는 목숨을 건 모험도 필요하다. 오해를 불사한 과감한 시도도 필요하다. 그러나 언제, 누가, 무엇을 하든지 예수님이 가지셨던 마음, '남을 죽여서 내가 이기기보다는 내가 죽어서 그를 품었던' 마음과 자세만큼은 잃지 말아야 한다.(빌2:6∼8) 반복하지만 민심을 잃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지금 기독교는 여론의 십자포화를 맞고 있다. 너무 가슴이 아프다. 숨기고 싶다. 변명하고 싶다. 그러나 이 아픔을 무작정 회피하기보다는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으로 거듭나는 기회로 삼는다면 보람된 아픔이 될 것이다.

▲ 김선일 씨의 살해 소식이 알려지기 전날인 6월 22일 강남교회에서 열린 '김선일 씨 무사귀환과 이라크평화를 위한 기도회'에 참석한 구교형 목사가 간절히 기도하고 있다. ⓒ뉴스앤조이 신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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