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우리 기독교를 바라보면서 걱정하는 이들이 많다. 지각 있는 교계 지도자들도 염려하고 젊은 목회자들도 걱정하며 많은 신학생들은 분통을 터트리기도 한다. 기독교를 교회 안쪽에서만 염려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 밖에서도 비판이 끊이질 않는다.

19세기말 이 땅에 들어와 뿌리내리고 가지쳐 뻗어나갈 때, 기독교인이든 아니든 지대한 관심과 사랑을 받아온 교회다. 교회는 구한말 수직적 유교사회에서 수평적인 공동체로서 뿌리를 내렸다.

계급과 신분, 그리고 나이와 남녀를 구분하고 차별한 수직적이고 닫힌 사회질서에서 이 모든 것이 '사람이 만든 질서'이고 타파되어야할 '우상들'이라고 선포한 것이 교회다. 계급과 신분차이를 넘어, 나이와 남녀 구분을 넘어, 모두가 함께하고 모두가 평등한 새로운 공동체가 바로 교회였다.

유교사회와 교회 사이에는 이른바 '창조적 긴장'이 있었다. 그러기에 교회는 유교사회 질서를 혁파하려는 개혁적인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고 이들의 공동체가 됐다. 일제시대 교회는 어떠했는가. 이른바 '천황제'에 뿌리를 둔 일본군국주의의 지배를 받아야했던 식민사회에서 교회는 '엑소더스'를 소망하는 조선 사람들의 조직공동체로서 가지쳐 뻗어나갔다.

조선 사람들이 모든 것을 잃고 절망하고 있을 때 교회는 문을 열어 이들을 감싸 안았다. 이들을 위로하고 '새 하늘과 새 땅'의 소망을 갖게 한 공동체였다. 어느 때는 식민통치세력과 맞서기도 하고, 어떤 때는 소망의 교육을 시키면서 '새 예루살렘' 건설을 준비하기도 했다.

일제시대는 식민통치세력과 교회 사이에 항상 '긴장'이 있었다. 이 긴장이 예리할수록 소망을 목말라했던 조선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고 이들의 공동체로 굳게 성장했던 것이다.

우리 민족에게 소망을 안겨다준 이 땅의 교회가 왜 요즈음 비판의 대상이 되고 비아냥의 표적이 되었는가. 이 문제는 여러 시각과 수준에서 논의되어야 할 것이지만 그 원인의 한 가지는 오늘날 교회 안에 들어서기 시작한 '우상들' 때문이다. 교회가 민족에게 소망을 안겨 주면서 성장하는 과정에서 비대해 지고 '개발독재시대'에 경제주의와 짝하면서 세상의 이런 저런 '우상들'이 서서히 교회에 들어와 자리했다.

성장우상, 강남우상, 돈 우상, 출세우상, 성공우상과 같은 세상 사람들이 섬기는 우상이 교회에 들어섰다. 설교에서도 기도에서도 이런 우상 섬김을 갈파하고 기원한다. 강남의 큰 교회가 우리가 바라는 교회의 모습이 됐고 돈이 넘쳐나는 교회가 축복받은 교회가 됐다. 출세하고 성공해야, 그래서 남들보다 앞에서고 남들 위에 앉는 이가 되는 것이 예수 잘 믿는 것으로 가르치는 곳이 요즈음 우리의 교회다. 그러니까 이 세상과 교회 사이에는 차이가 없고 '긴장'이 없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예수 믿는 이들이 자기들과 별로 다른 가치를 추구하고 살고 있는 이들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의 눈에는 예수 믿는 이들도 자기네들처럼 출세와 성공을 우상처럼 쳐다보고 돈을 섬기고 있는 것으로 본다. 그러니까 예수 믿는 이들을 별다른 사람들이라 생각하지 않고, 이들의 공동체인 교회도 별다르게 여기지 않는다.

▲ 박정신 편집인. ⓒ뉴스앤조이 신철민
오히려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나라를 그려야 하는 교회가 세상 사람들의 우상을 모시고 있다며 비판하고 비아냥거린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의 갱신을 이야기하고 개혁을 부르짖는다. 세상 가치를 우상처럼 모시고 있는 우리 교회에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모시고, 세상 가치를 우상으로 모시고 있는 우리 교회에 하나님의 나라, 그 나라의 가치를 다시 가르치고 그 나라의 법도를 다시 세우자. 오늘의 우리 교회를 바라보며 두려운 마음을 감출 수 없다. 우리의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시오 질투하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박정신 / 뉴스앤조이 편집인·숭실대 기독교학과 교수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