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간수흐형제가 병원에 있던 모습과 회복해서 야외예배를 드린 모습.

"목사님, 간수흐예요" 눈이 보이지 않는 나에게 언제나 간수흐는 그렇게 자신을 알린다. 내 손을 덥석 잡는 그의 손에 힘이 느껴진다. 간수흐는 내게 큰 충격과 감동을 준 몽골형제다.

몽골사람 간수흐는 1년 전 즈음 9층 높이의 공사현장에서 추락했다. 말이 9층이지 그곳에서 아래를 내려보는 것만으로 이미 졸도할 지경인 나로서는 그 사건은 충분히 놀랄 일이다.

간스흐는 그곳 9층에서 떨어졌다. 그러고도 그는 죽지 않고 살았다. 물론 몸은 엉망진창이 됐다. 목뼈가 부러지고, 팔과 다리는 온전하지 못했다. 그가 목숨을 부지하고 살아났다는 것만으로 충분히 놀라운 일이었다. 9층에서 떨어졌음에도 살아났다는 사실이 놀라운 일인 것이다. 정말 가능한 일일까? 나는 지금도 그때 간수흐가 한참이나(?) 떨어지면서 느꼈을 공포와 절망감을 상상할 때마다 전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극단의 절망감이 그를 성숙시킨 것일까.

사고가 난 후 우리 선교회의 몽골 사역팀을 비롯한 그를 아는 모든 사람들이 함께 기도하고 염려했다. 이것을 기적이라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 정말 기적처럼 그는 건강을 회복했다. 죽지 않고 살아난 것도 놀라운 일이었지만 그의 회복의 속도는 가히 모든 사람들에게 큰 간증이 됐다.

몇 달이 지난 어느 주일 오후, 그는 교회에 나올 수 있었다. 기브스를 한 모습이었고, 제대로 서 있기에도 힘들어 했지만 그는 분명 살아서 교회에 나왔다. 그 날 그는 내 손을 잡고 그렇게 한참이나 울었다. 나도 울었고, 주변의 몽골인들도 함께 울었다.

그 날 우리는 그가 살아왔음에 감사했고,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 주님의 은혜에 감격했다. 언젠가 그는 몽골인 예배에서 간증을 했다. 죽었다가 살아온 사람의 간증은 정말 우리 모두에게 살아계신 하나님을 느끼게 했다. 그는 울면서 때론 강한 어투로 자신의 생명을 구원하신 그분의 은혜를 간증했다.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분명 가슴으로 그리고 영혼으로 나는 그의 간증을 들을 수 있었다.

간수흐가 지난주일 아침예배에 참석했다. 물론 매주일 예배에 참석하지만 몽골인 예배가 아니라 한국인 예배에 참석하는 간수흐에 대해 새삼 감사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정말 죽었다가 부활한 사람처럼 믿음의 깊이와 넓이를 더해 가고 있다.

간수흐는 이제 또 한 명의 내 친한 친구가 되었다. "목사님, 간수흐예요." 그는 매번 나에게 그렇게 자신을 소개한다. 죽었다가 살아온 간수흐라고 말한다. 눈이 보이지 않는 내게 대한 깊은 배려다.

간수흐를 보면 마음이 행복해진다. 예수처럼 부활한 간수흐를 보면 예수를 보는 것 같아 가슴이 뛰고 내 목소리에도 힘이 들어간다. '반가워, 간수흐' 나도 그렇게 그를 부르고 손을 마주 잡는다.

나그네가 내게 예수를 가르쳐 주고, 믿음을 가르쳐 주고, 살아계신 그분을 알려준다. 내가 그들을 선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은 스스로 선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그분을 발견한다. 선교는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들에게 직접 하시는 것이다. 오히려 나는 그들에게 역사하는 하늘의 은총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놀라고 또 놀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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