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더 패션 오브 더 크라이스트(The Passion of the Christ)'는 엄청난 흥행에 성공했습니다. 실물 예수의 육체적 고통을 부각시키는 데에는 끔찍할 만큼 성공했지만, 그의 영적 고뇌와 실존적 고독을 드러내 보이는 데에는 실패한 것 같습니다. 잔인한 고문으로 인한 육체의 아픔은 너무 자세하게 영상화되었으나, 그의 내적 고독은 무시당한 듯 합니다. 고통은 있으나 고뇌가 없는 영화였습니다.

역사적 예수께서 경험하셨던 아픔 중에는 육체적 아픔보다 정신적이고 사회적인 아픔이 더 깊고, 길고, 컸을 것입니다. 고난의 핵심에는 언제나 처연한 주님의 고독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실물 예수의 짧은 생애에서 그의 고독과 고뇌는 참으로 길었던 것 같습니다.

지난 2천 년 동안 기독교와 제도 교회는 예수를 끊임없이 고독으로 몰아치면서 괴롭혀왔습니다. 제도 교회가 예수의 이름으로 끔찍한 반(反) 인륜적 범죄를 저지를 때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이름으로 억울하게 고통 당했던 많은 사람들의 아픔을 함께 아파하며 말할 수 없는 고독과 고뇌를 느꼈을 것입니다. 예수의 이름을 빙자하여 '이단자'를 처형하고, '마녀'를 화형시켰으며, 토착주민들을 마구 학살했던 서구기독교의 행패는 예수의 몸을 계속 부관참시하는 것과 같은 끔찍한 짓이 아니라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같은 신성하고 전지전능하신 분이 고독하다니, 말도 되지 않는다고 항변하실 분들이 적지 않겠습니다만, 그의 영적 고독과 실존적 고뇌를 이해하고 역지사지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고독과 고뇌와 고통을 치유해 주는 영적 효험이 된다는 사실 또한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의 고난은 오늘 우리의 고난을 근본적으로 고쳐주는 능력임을 확신하는 동시에 기독교의 잘못으로 인해 그가 더욱 외로워졌음을 회개하는 마음으로 그의 고독을 다시 음미해봐야 합니다. 그리고 장구한 교회사의 관점에서도 그의 고뇌의 의미를 살펴봐야 합니다.

▲ 예수님과 같은 분이 고독하다니, 말도 되지 않는다고 항변하실 분들이 적지 않겠습니다만, 그의 영적 고독과 실존적 고뇌를 이해하고 역지사지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고독과 고뇌와 고통을 치유해주는 영적 효험이 된다는 사실 또한 잊어서는 안 됩니다. ⓒ뉴스앤조이 신철민
자신을 따르겠다는 사람들 앞에서 더욱 처연한 고독을 느끼다

예수의 공생애는 고독과 고뇌로 시작됐습니다. 서른쯤 되어 광야에서 겪은 시험은 지독한 고독 속에서 겪은 시련이었습니다. 성령충만하여 고향땅 나사렛에 돌아와 회당에서 첫 말씀을 증거한 뒤, 그는 고향사람들에 의해 죽임을 당할 뻔했습니다. 예수의 하나님, 곧 아빠같은 사랑의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만을 편애하시는 부족신(tribal God)이 결코 아님을 대담하게 증거했기 때문입니다. 고향사람들은 분개하여 벼랑 끝까지 예수를 끌고 갔습니다. 그는 그러한 아픈 경험 속에서 "선지자는 자기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한다"는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시대를 앞서 보고 앞서가는 존재는 언제나 외로울 수밖에 없음을 증거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가는 곳마다 '하나님 지배'(하나님나라)를 설파하시고, 그 구체적 프로그램으로 열린 밥상공동체와 무상의 치료를 베푸셨습니다. 이때마다 당시 기득권층은 예수의 행동과 말씀을 불온한 짓거리로 보았습니다. 그들은 예수의 증언과 행동마다 딴지를 걸거나 말꼬리를 잡고 물고 늘어지려 했습니다. 때로는 함정을 파놓고 질문도 했습니다. 이런 도전을 받을 때마다 예수는 분노에 앞서 연민과 고적함을 더 심각하게 느꼈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제자들의 우둔함과 한심스러움을 목도할 때마다 그의 가슴에는 고독의 찬바람이 불고 지나갔을 것입니다. 제자들의 면면을 보면 한심하고, 답답하고, 유치하고, 기가 찬 일이 어디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는 자신의 제자가 되어 어디든지 따르겠다고 다짐하는 율법학자를 보고 이렇게 대꾸했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조차 없다."(마 8:21)

머리 둘 곳 없다는 표현은 단순히 한 몸 둘 곳 없다는 뜻 뿐만 아니라 마음 둘 곳도 없을 정도로 외롭다는 뜻이겠지요. 몸과 마음은 머리에 있지 않습니까. 주님은 자신의 삶이 집 없는 노숙자의 뿌리 뽑힌 삶임을 그에게 각인시키면서 그 같은 삶을 도무지 살아낼 수 없는 율법학자의 청을 정중하게 간접적으로 거절했던 것입니다. 예수의 삶을 감당해낼 수 없는 사람들이 감히 예수를 따르겠다고 우길 때, 예수께서는 더욱 처연한 고독을 느꼈던 것입니다. 편안한 주택을 갖고 사는 현대인들은 더더욱 예수의 이 같은 떠돌이 삶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만큼 우리도 예수를 외롭게 하고 있는 셈입니다.

한심한 제자들로 둘러싸여 이미 충분히 외로운 터에, 육신의 부모형제마저 예수를 정신 나간 사람으로 취급했으니 얼마나 더 외로웠겠습니까. 예수가 마귀의 괴수가 되어 그 초능력으로 다른 마귀들을 쫓아낸다고 조작된 소문을 듣고 어머니와 형제들이 달려 왔습니다. 그 전갈을 받았을 때 예수님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세상이 아무리 우리를 왕따 시켜도 보듬어 줄 따뜻한 가족의 손길이 건재하다면 그 아픔은 쉽게 이겨낼 수 있습니다. 예수는 그러한 가족의 보살핌마저 누릴 수 없었습니다. 그는 그만큼 고독한 실존이었습니다.

정치적 탐욕에 사로잡혀 예수를 외롭게 했던 열 두 제자

예수를 따랐던 제자들은 대체로 예수를 세속적 메시아로 착각하여 제자들은 예수께서 로마제국의 마력을 물리치고 이스라엘을 정치적으로 해방시킬 것으로 기대하고 예수께서 왕이 되시면 왕의 좌우에 앉아 세상을 호령할 정치권력을 탐했습니다. 정말 천박한 동기로 예수를 따르게 된 셈입니다. 어느 날 주님께서는 베드로·요한·야고보를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 가셨습니다. 그 산꼭대기에서 주님은 유대인의 최대·최고 영웅이요 지도자인 모세와 엘리야와 영적인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너무나 감격적인 황홀경이었습니다. 정치적 탐욕에 사로잡힌 제자들을 깨우치기 위한 일종의 영성 훈련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영적 감동에 사로잡혔던 베드로는 즉석에서 엉뚱한 제안을 합니다. 일종의 경망한 호들갑이지요.

"여기가 좋사오니, 천막 셋을 짓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관심은 산 아래에 있었습니다. 산 아래에서 억울하게 고통 당하는 밑바닥 인생들에게 절박하게 필요한 삶, 곧 온전한 삶을 살 수 있게 해 주는 예수운동(하나님나라 건설운동)을 펼쳐나가려 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황홀한 산꼭대기의 영성 체험 속에 영원히 안주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는 어두운 역사 속에서 치유와 정의의 삶을 외면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곧 산에서 내려오셔서 정신질환으로 고통 당하는 어린이부터 치유해 주셨습니다. '여기가 좋사오니'를 외쳤던 베드로의 한심한 모습을 보고 주님의 심경은 어떠했겠습니까? 자신의 속마음을 이토록 알아주지 못하는 이른바 수제자의 경박한 제안을 들으며 썰렁한 고독의 바람을 마음 속 깊이 또 한번 느꼈을 것입니다.

공생애의 마지막 단계에 이르러 주님은 예루살렘을 향한 외롭고 괴로운 길에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때까지도 어리석은 제자들은 예수가 세속적 영광과 종교적 축복의 길로 힘차게 나아가고 있다고 착각했습니다. 자기들끼리, 누가 더 똑똑하고 나은가, 누가 더 높은가를 시비할 정도였으니까요. 이 같은 낮은 수준의 권력 투쟁을 지켜보신 예수님의 심정은 어떠했겠습니까? 하루는 주님께서 마음의 문을 열고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이 결코 종교적 영광과 정치적 승리의 길이 아니라 고난과 죽음의 길임을 알려주셨습니다. 이 때 베드로는 한심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주님, 안됩니다. 결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이렇게 강력하게 말렸던 베드로의 심중에는 '내 신세 망쳤구나' 하는 이기적 탐욕이 도사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 때 예수님의 고독은 마침내 분노로 이어졌습니다. 갑자기 주님은 베드로의 얼굴에서 오래 전 광야에서 그를 시험했던 마귀의 얼굴을 다시 본 듯 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심하게 나무라셨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장애물이다.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태 16:33∼23)

배신자에 대한 인간적 고독과 연민이 뒤섞인 예수의 얼굴

본격적인 수난의 과정에 들어가게 되면서 당국의 체포를 눈앞에 두고 주님은 최후의 만찬을 베풀었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 '최후의 만찬'을 보면, 슬픈 듯 눈을 아래로 떨어뜨리고 있는 예수님의 표정에서 그의 고독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 그림에서 가룟 유다는 돈자루를 쥐고 있습니다. 예수를 팔아 넘기는 대가로 미리 받았던 돈이 그 자루 속에 있었을 것입니다.

이런 절박한 순간에도 예수님의 고독은 그 특유의 인내와 사랑의 모습 속에서 더 돋보이는 듯 합니다. 보통 선생이라면 스승을 돈으로 판 제자를 꾸짖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자기를 배신할 사람이 그 자리에 있음을 암시하셨지만 누구라고 딱 지목하여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이 그림에서는 가룟 유다가 주님을 태연하게 쳐다보고 있습니다. 그의 시선과 마주쳤을 때 예수님의 표정은 배신자에 대한 인간적 고독과 연민, 고뇌와 온정이 뒤범벅된 묘한 표정이 아니었을까요?

베드로의 모습을 처연하게 쳐다보는 예수님의 심정은 또한 어떠했을까요? 목숨 바쳐 끝까지 주님을 따르겠다고 장담했던 베드로의 힘찬 결단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 주님은 그 고백이 갖는 엄청난 치졸함과 성급함을 이미 아셨습니다. 당장 내일 새벽에 세 번씩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잡아뗄 그의 모습이 측은하기도 하여 주님은 속으로 조용히 우셨을 것입니다. 속으로는 연민의 정으로 우시면서 그 경망한 짓거리가 우습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자연히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실존적 아픔을 경험한 예수

겟세마네동산에서의 예수님은 어떠했습니까? 그 고독을 우리는 역지사지할 수 있을까요. 역지감지(易地感之)는 더더욱 어렵겠지요. 주님께서는 체포되기 직전 바로 체포된 그 장소에서 하나님 앞에서 피땀 흘리며 혼신의 힘으로 고투했습니다. 그 실존적 고뇌는 육체의 고통에 비교할 수 없는 큰 아픔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 셋은 스승의 이 같은 고뇌와 고통을 아랑곳하지 않고, 잠에 곯아떨어졌습니다. 스승과 동고(同苦)하지 못했던 우매한 제자들의 한심스러운 모습이라 하겠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오히려 제자들을 역지사지하셨습니다.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구나."

정말 마음이 예수님처럼 절박했다면 제자들이 먼저 스승과 역지사지, 역지감지했을 것입니다. 아무리 그들의 육체가 피곤했다 하더라도, 동고의 기도를 스승과 함께 드렸어야 마땅합니다. 제자들의 이 같은 육체의 연약함을 오히려 역지감지하신 스승의 너그러운 모습이야말로 연약하면서도 독선적인 저희들을 부끄럽게 합니다. 그러나 그 넓은 마음속에서 그의 실존적 고독은 깊었을 것입니다.

드디어 체포의 순간이 다가왔습니다. 무장한 군인들이 예수를 둘러싸고 그를 체포하려 했을 때 제자들의 모습은 스승을 또 한번 곤혹스럽게 했습니다. 급하게 달아나다 보니 체포자의 손에 잡힌 자기 옷을 훌렁 벗어 던지고 벌거벗은 채 맨몸으로 달아난 제자도 있을 정도였습니다. 벌거벗은 채 정신없이 달아나는 제자를 본 예수님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말고의 귀를 칼로 내리쳐 무력으로 폭력을 이기려 했던 베드로의 과격한 모습에서 주님은 더 큰 고독을 느꼈을 것입니다. 사랑만이 궁극적으로 악을 이길 수 있다는 진리를 도무지 깨닫지 못했던 제자들 앞에서 그는 끝없는 외로움을 느꼈을 것입니다.

골고다로 가는 도상에서 주님께서 겪으신 육체의 고통에 더하여 사회적 수치감 또한 극치에 다다랐습니다. 옷을 벗겨 십자가 위에 공개적으로 나신을 노출시키는 것은 사회적, 인간적 수치심을 육체의 고통에 더하여 극대화하기 위함입니다. 게다가 제자들로부터 버림받은 주님은 그 배신의 아픔과 함께 엄청난 고독을 십자가 위에서 온몸으로 느꼈을 것입니다. 제자들과 동족으로부터 배신당했을 뿐 아니라 심지어 하나님으로부터도 버림받았으니, 그 고독의 깊이를 누가 과연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나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라는 이 절규는 억울하게 버림당한 한 인간이 도달 할 수 있는 고독의 극치 수준이라 하겠습니다. 육체의 고통, 사회적 수치감, 정신적 배신감, 영혼의 고독감, 이 모든 실존적 아픔을 어찌 한 인간이 모두 한꺼번에 겪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모든 소중한 것으로부터 철저하게 버림받은 인간만이 내뱉을 수 있는 절망의 절규를 예수께서 쏟아내셨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메시지입니다. 하나님을 원망할 수밖에 없는 모든 고독한 인간의 아픔을 주님은 뜨겁게 대변하셨습니다. 억울하게 죽어가는 모든 이들과 동고하시고, 역지사지하시고, 연대하신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값진 십자가의 은총이라 하겠습니다.

이라크 침략은 예수의 고독을 심화시켜

그런데 역사적 예수의 삶이 이러할진데, 지난 2천 년 가까운 기독교 역사 속에서 예수의 고독과 고통은 더 깊고 심각했음을 우리는 기억하고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기독교가 정치권력 중심부로 이동하게 되면서 교회가 더욱 관료화되었고 또한 교리도 더욱 배타적으로 다듬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추세 속에서 불행하게도 그의 역사적 삶은 점점 희미하게 잊혀지고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역사의 예수는 무시되고 교리의 그리스도가 숭상되기 시작했습니다. 교리의 옷을 입은 왕 중 왕은 거룩, 거룩, 거룩한 경배와 찬양의 대상으로 날로 신격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1980년 중반에 포르투갈의 파티마를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유명한 카톨릭 성지 가운데 하나인데 그곳에서 성모마리아는 숭배의 대상으로 높임 받고 있었습니다. 찬란한 금관을 쓰고 있는 성모상을 보면서 저는 언뜻 성모마리아가 그곳에 와서 자기모습을 보게 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이실까를 상상해 보았습니다. 예수를 잉태한 젊은 마리아의 노래정신으로 본다면(눅 1:46∼55), 휘황찬란한 금관을 쓰고 있는 성모상에 대해 그녀는 이렇게 말씀하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성모상은 나와 전혀 관계 없노라. 이 우상을 제거하라."

지난 1,700년간 기독교와 제도 교회는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격상시키면서 경배의 대상으로 그를 더 높히 우러러보았습니다. 그 때마다 그의 고독은 더욱 깊어갔을 것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교회당국이 다른 종교를 십자군의 주적으로 낙인찍어 씨를 말리려 했을 때, 예수의 이름으로, 교회의 가부장적 관례에 도전하는 여성을 마녀로 낙인찍어 잔인하게 화형시키려 했을 때, 예수의 이름으로, 자유로운 신학적 사고를 해내는 용기있는 신자들을 이단으로 낙인찍어 온갖 억압을 일삼았을 때, 예수의 이름으로, 아프리카·남아메리카·아시아 지역의 토착민을 인종청소하듯 마구 쳐죽였을 때, 그리고 예수의 이름으로, 알 카에다와 관계없는 이라크를 악의 축으로 낙인 찍어 주저 없이 강행했던 침략전쟁을 축복해주었을 때, 자기 이름으로 그 많은 선량한 인간들이 너무 억울하게 고통 당하고 죽어가는 모습을 보시고 주님의 마음은 얼마나 외롭고 괴로웠겠습니까? 피가 마르고 땀이 비 오듯 하지 않았을까요?

예수의 삶 자체가 고통과 고뇌, 고뇌와 고독의 연속이었는데, 부활사건으로 더욱 그를 기리고 경배하려 했던 제도 교회가 역설적으로 오히려 그의 고독을 끊임없이 심화시켜 왔으며, 그의 고통을 악화시켜 왔으니, 어찌 우리 기독교 신자들이 용서받을 수 있겠습니까?

성전이 아닌 베데스다로 가신 예수

오늘 날 예배 때마다 수 억의 기독교 신자들이 높은 교리 성곽에 갇혀있는 예수님을 향해 거룩, 거룩, 거룩하신 만왕의 왕으로 찬양하고 있는데, 과연 예수께서 당신에 대한 이 같은 종교적 영광과 찬양을 보시고 대견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즐거워하실지 생각할 때마다 저는 송구스러워 몸이 움츠러드는 듯 합니다. 꼴찌가 첫째가 되고 첫째가 꼴찌가 될 것을 강조하셨던 주님은 영광 일색의 예배분위기 속에서 오히려 어색해하시거나 외로워하실 것입니다.

저는 매주일 교회마다 예수의 이름을 더 높이고, 주님을 만 개의 입으로도 그 은혜를 다 노래할 수 없다는 식으로 찬양하면서도 실제로는 생각이 다른 사람, 종교가 다른 사람, 인종과 문화가 다른 사람들을 차별하는 기독교 위선의 현실을 목도합니다. 그 때마다 저는 예수님의 고독과 분노를 떠올리며 전율하게 됩니다. 교회 안에서 예수를 거룩, 거룩하신 만왕의 왕으로 더 높이면서도 교회 밖에서는 지극히 작은 사람들을 더 작은 자로 축소시키는 일에 주저하지 않으며, 이미 열등감으로 부당하게 시달리는 꼴찌들을 더욱 잔인하게 꼴찌 자리에 못 박는 일을 서슴지 않고 강행하는 기독교의 현실을 볼 때마다 저는 또한 전율하고 분노하게 됩니다. 예수께서 지금 제도 교회에 오신다면 (저는 오시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만) 이렇게 말씀하시리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도무지 이 사람들이 누군지 알지 못하겠군요. 이들이 나를 믿는다고 하는 기독교 신자라면, 나는 결단코 기독교 신자가 아닙니다. 나는 예수입니다."

이렇게 선포하시고 주일에 교회나 성당으로 가시지 않고 오히려 소경과 절름발이와 중풍병자와 수많은 병자들이 누워 하나님의 사랑의 기적을 기다리고 있는 오늘의 베데스다연못으로 발길을 옮기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치 명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가셨으나 으리으리한 그곳 성전으로 가시지 않고, 절망과 질병으로 찌들어버린 인간들, 지극히 작은 자들, 꼴찌들이 우글대는 베데스다연못가로 가셨듯이 말입니다.

만일 예수께서 제도 교회에 가신다면 어떤 반응을 보이실까요? 그 곳에서 견딜 수 없는 고적감과 수치심과 배신감을 견디어낼 수 없어 통곡하실 것입니다. 마치 선지자가 자기 고향에서 쫓겨나면서 고독으로 목이 메어 울듯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기독교 교회 안에서 당신의 이름과 명예가 그 요란한 찬양 속에서 짓밟히고 있는 현실을 몸소 겪으시면서 통곡하실 것입니다. 뜨거운 사랑으로 자기를 스스로 비워 남을 좋은 것으로 채워주지 않고, 오히려 예수사랑의 이름으로 남의 것을 빼앗아 자기 속을 채우는 크리스천들의 행태를 보시고 주님은 예루살렘과 그 성전을 보시고 우셨듯이 고독에 목이 메어 통곡하실 것입니다.

▲ 한완상 총장 / 한성대학교  ⓒ뉴스앤조이 신철민
이렇게 생각하니 저의 목도 자연히 메어지는 듯 합니다. 그러면서도 저 자신이 그러한 기독교 신자라는 사실에 대해 새삼 부끄러워지면서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어찌 우리 기독교 신자들의 이 위선과 잘못을 용서받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를 믿고 따른다고 하면서 예수로 하여금 오늘도 저 공중의 새보다 더 외롭게 느끼도록 하고, 저 들판의 여우보다 더 고독한 존재로 느끼게 하는 우리의 위선과 독선과 탐욕이 어떻게 용서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저희 죄인들은 자기를 철저히 비우시는 고독한 주님께서 처절하게 고독한 인생들과 주저 없이 동고하시는 사랑의 십자가 은총을 절박하게 목말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한완상 총장 / 한성대학교 wshan36@hansu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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