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본문(마 5:13-16)은 산상설교의 맨 처음에 나오는 행복선언에 이어서 나오는 중요한 부분이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그들이 세상의 소금이며 또 세상의 빛이라고 선언한다. 이 구절 때문에 사람들은, 빛과 소금이라는 말을 하나의 짝처럼 여기며 크리스천의 삶에 지침이 되는 것으로 여긴다.

이를테면, 빛은 어둠을 밝히는 것이며, 하나님이나 예수님 또는 하나님 나라를 가리킨다고 본다. 그래서 빛을 비추는 삶은 대개 착한 일을 하는 것이나 복음을 전파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또, 소금은 부패를 방지하는 것이요 필수 영양소이기에, 크리스천은 세상을 썩지 않게 하고 세상에 없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식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이런 해석은 은혜롭기는 하지만 상투적인 도덕이나 교리 설교로 떨어질 수 있다.

빛에 관한 말에서, 마태 마가 누가에 공통적으로 나오는 것은, 등불은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둔다는 것이다(15절; 막 4:21; 눅 8:16). 마가와 누가에서는 이 구절 다음에,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라는 내용이 나온다. 그리하여 전체적으로는 등불  ―흔히 이것은 하나님 나라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된다―은 지금은 숨겨져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곧 온 세상에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 주제이다. 그런데 마태 기자는, '숨겨진 것이 드러난다'는 구절 대신에 '너희의 빛을 사람들에게 비추라'는 구절을 넣었다. 그리고 15절 앞에는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는 구절을 첨가했다. 그리하여 전체적인 주제는 '등불'에서 '사람들이 내는 빛'으로 바뀌게 되었다.

성서에서 하나님이나 예수님을 빛으로 묘사한 예들은 많지만, 사람을 빛이라고 하는 경우는 드물다. 특히 '빛을 비추어라'(lampsato)고 하는 명령형은 성서의 다른 곳에서는 나오지 않는 독특한 것이다. 마태의 본문을 해석할 때는 이런 표현들에서 나타나는 독특함이나 파격성을 잘 살리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주석가들은 대개 이러한 표현들에서도 윤리적 교훈을 끌어내기에 급급하다. 이를테면, 해그너(D.A. Hagner)는, "세상에 빛을 비춘다는 것은 곧 하나님 나라의 임재를 드러낼 수 있는 삶을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한다(WBC주석). 그는 이런 결론은, 본문의 맨 끝에 나오는,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는 구절에서 더욱 분명해진다고 한다.

하지만 그리스어 성경을 보면, '너희의 착한 행실'은 '너희의 그(ta) 착한 행실'이며, 절의 맨 앞에는 hopos(그리하여)라는 접속사가 나온다. 그리하여 전체 문장은 이렇게 된다. "너희의 빛을 사람들에게 비추어라. 그리하여 그들이 너희의 그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여라." 이런 문장 구조에서, '그 착한 행실'의 의미는 '빛을 비추는 것'의 의미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지, 그 반대일 수가 없다. 그러므로 '빛을 비추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밝히기도 전에 '착한 행실'을 어떤 종교적 또는 도덕적 삶을 사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옳지 않다.

오늘의 본문은 크게 소금에 관한 말과 빛에 관한 말로 나눌 수 있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서 이 두 가지가 따로 나오는 것을 보면, 본래는 따로 떨어진 것인데, 마태 기자가 어떤 의도에서 결합시킨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소금에 관한 말을 결합시킴으로써, 빛에 관한 말이 지니는 모호함을 좀 더 분명하게 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너희의 빛을 사람들에게 비추어라"는 구절의 본래적 의미를 밝히려면, 그것이 소금에 관한 말과 어떻게 관련되는지 유의해야 한다.

소금과 빛이 어떻게 어울릴 수 있는가? 소금에 관한 말에서 그 핵심은 짠맛에 있다. 짠맛은 소금만이 갖고 있는 특징이자 고유함이다. 마찬가지로 "너희의 빛"이라는 말에서 핵심은 그들만이 낼 수 있는 어떤 특징이나 고유함, 곧 그들의 '빛깔'일 수 있다. 마태 기자는, 소금에 관한 말과 빛에 관한 말을 결합시킴으로써, "너희의 빛"이, 추상적이거나 관념적 의미의 빛이 아니라, 그 사람에게서 드러나는 고유한 빛임을 암시하고 있다. 소금에서 나는 것이 그 고유한 '맛'이라면 그 사람에게서 드러나는 빛은 그 고유한 '멋'이라 하겠다. 그만의 멋, 그만의 빛깔을 드러내는 것, 바로 이것이 '그들의 빛을 사람들에게 비추는 것'이다.

예수는 바로 앞의 행복선언에서 가난하고, 슬퍼하고, 목마른 사람들에게 위로를 선포했다. 그것은 그들을 최대한으로 격려하는 말이다. 그런 다음에 이제 그들에게, '여러분은 숨길래야 숨길 수 없는 세상의 빛이다'고 하면서, 위축되지 말고 열등감에서 벗어나서, 당당하게 세상 사람들 앞에서 '자기의 빛을 비추라'고 말하고 있다. '그 착한 행실'(ta kala erga)은 '그 좋은 일'이라는 뜻도 되는데, 그것은 이제 자기의 빛을 당당하게 사람들에게 비추는 것을 의미한다. 자기를 당당하게 드러내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나 교만한 것이 아니라, '좋은 일'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이다.

얼마 전 뉴욕 매트로폴리탄 박물관에 갔을 때, 한 코너에서 고호, 모네 등의 그림을 만난 감동을 잊을 수 없다. 하루 종일 낯선 곳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느라 지쳐있는 상태였다. 그런데 그 동안 사진으로만 보아 온 고호와 모네의 그림 앞에 서는 순간 마치 마법에라도 걸린 것같이 피로감이 사라져버렸다. 그건 그저 그림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그림을 그린 이와 만나는 경험이었다.

그 방에서 나오니까 아까 본 고호의 그림보다 열 배는 커 보이는 웅장한 그림들이 걸려 있었다. 고전적인 기법으로 아주 정교하고 세련되게 그린 그림이었다. 들리는 말로는, 그 그림들은 고호의 시대에 아주 잘 나가던, 무슨 미술학원 원장의 것이라고 했다. 고호는 그 당시에는 별로 유명하지 않았고, 그림도 한 점밖에 못 팔았다고 한다. 그건 그가 당시에 유행하던 풍이나 관습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날, 당시에 그렇게 유명하고 성공한 화가들의 100호짜리 그림 앞에는 한산한 반면, 아무도 알아주지 않던 고호의 20호짜리 그림 앞에는 끊임없이 사람들이 밀려드는 것을 어떻게 볼 것인가. 어찌 보면, 고호의 그림은 자유분방하고 거칠고 서투르게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도 그것은, 그것을 보는 사람을 그것을 그린 이와 만나게 해 주는 어떤 신비한 매력이 있다. 그것은 그의 그림에서 그가 느낀 아름다움과 그만의 빛깔이 있는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일 것이다. 그야말로, "너희의 빛을 사람들에게 비추어라" 하는 예수의 말씀을 그 누구보다도 충실하게 따른 사람이라 하겠다.

그에게서 자기의 빛을 드러내는 것은 자기 자신의 재능을 드러내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그는 친구 라파르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긍정적인 이유가 있어서네. 예술은 우리의 기술, 지식, 교육보다 더 위대하고 고차원적인 것이라는 인식 말일세. 예술이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졌다는 말은 사실이지만, 단지 손에 의해서만 이루어졌다고 할 수는 없네. 더 깊은 원천으로부터, 바로 사람의 영혼으로부터 솟아나온 것 아닌가."

자신의 작품이, 자기 재능만으로 된 것이 아니라, 자기 안의 더 깊은 원천, 어떤 영원한 것에서부터 솟아나온 것이라는 생각은 그로 하여금 당당하게 자기 느낌과 색깔을 드러내게 했을 것이다. 또 그림이 안 팔려서 타협하고 싶을 때도 참고 견디며 꿋꿋하게 자기의 길을 가게 했을 것이다. 그가 자기의 느낌과 색깔을 포기하고 그저 잘 팔리는 그림을 그리는 데 몰두했다면, 좀 더 편하게 살았을지는 모르나, 그 아름다운 작품들은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그가 자기 느낌을 소중히 여기고 자기의 빛을 깊이 드러낸 만큼 그는 또한 어떤 영원한 빛을 드러낸 것이다.

오늘날 학교나 교회에서 교육의 이름으로 사람들이 자기 느낌을 억제하게 훈련하고 자기 빛깔을 내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심각한 문제다. 흔히 '끼'라고 하는 것, '끼를 발산하는 것'은 사람들이 받은 자기 느낌과 자기 빛깔을 드러내는 것일 수 있다. 그것은 은사일 수 있다. 하지만 그런 것에 대하여, 학교는 '날라리 짓'으로 매도하여 공부나 하라고 하고, 교회는 방탕한 것으로 간주하여 회개하라고 하곤 한다.

또 교회는 자기 속에 있는 것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을 '정욕'으로 정죄하기도 한다. 그리하여 신자들은 자기 속에서 자기 느낌 자기 색깔이 드러날 때마다 화들짝 놀라며 회개하고 기도하며 그것들을 억누르려고 한다. 그래서 대개 그들은 고분고분하고 개성 없는 사람들이 되는 경우가 많다. 그들은 그렇게 자기의 빛을 억제하고, 반대로 목사의 가르침이나 교리를 외우다시피 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그대로 전하는 것이 진정으로 '빛을 발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자기 빛을 죽이는 사람은 절대로 그 누구에게도 빛을 비출 수가 없다. 예수는 자기 빛을 죽이고 부정하고 나서 무슨 영원한 빛을 반사하여 비추라고 하지 않았다. 산상설교를 듣는 제자들, 그리고 그들과 같은 처지에 있는 가난하고 슬퍼하고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에게, 열등감과 죄의식과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서, 기죽지 말고 당당하게 자기 빛을 비추라고 하였다. 그는 우리에게 태양이 되거나 밤거리의 가로등이 되라고 하지 않는다. 태양을 반사하는 별이나 달이 되라고도 하지 않는다. 작고 은은하지만 자기 빛을 내는 반딧불이처럼, 자기의 빛을 내라고 한다. 그것이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너희 빛을 사람들에게 비추어라" 하는 말씀의 진정한 의미이다.

(이 글은 월간 홀씨 2004년 3월호에도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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