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말세의 징조

우리 주님은 육체로 계실 때 세상 끝에 대한 제자들의 질문에 답하시면서 이전에 있었던 두 시대를 들어 비교하여 말씀하셨는데 곧 노아의 때와 롯의 때입니다.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더니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였으며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서 불과 유황이 비 오듯하여 저희를 멸하였느니라 인자의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 (누가 복음 17장 26~30절)

마지막 때에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가의 비유로 주신 노아와 롯 두 시대에 대한 주님의 말씀을 보면 그 특징이 시대를 무론하고 평범한 사람들이 그러하듯 노아와 롯의 시대 사람들도 결혼을 하고 일하며 열심히 삶을 구가했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이 제한된 구절에서는 그들이 악하였다는 표현조차도 없어서 평범하게 살았던 그들이 왜 멸망했는지를 납득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여튼 이 시대 사람들이 오늘날 현대 문명의 성도들과 비슷한 일상적인 삶을 살았던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심판 받은 이유나 그 시대의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대의 삶을 좀 더 연구할 필요가 있으며, 이를 위하여 창세기의 말씀들을 좀 더 살펴보겠습니다.

'사람이 땅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 이십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당시에 땅에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여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이 용사라 고대에 유명한 사람이었더라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창세기 6장 1~5절)

언뜻 보아 창세기의 말씀도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피할 수 없는 사악한 인간의 모습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과 혼인하였다고, 복음서의 기자와 같이 일상적인 삶의 형태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새겨 보면 상기의 말씀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은 학자들 간에 약간의 이견이 있겠지만 셋의 후손들로 그리고 '사람의 딸들'은 가인의 후손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는 말씀은 셋의 후손과 가인의 후손이 섞이게 되었다고 이해 할 수 있으며, 뒤에 나오는 "그들이 육체가 되었다"는 말씀은 셋의 후손들이 가인의 후손과 섞이면서 무언가 변화가 있었는데, 그 핵심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버림으로 신령함을 상실했다는 것입니다.

한 가지 주목되는 표현은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하나님의 아들들이 혼인을 하였다" 입니다. 두 말씀을 연결하여 생각할 때 아마 이것은 셋의 후손들이 자신의 주변에 있는 여성들에게서 경험하지 못한 것을 가인의 후손(딸)들에게서 얻을 수 있었으며, 그 것은 그들이 셋 이래로 전수해 온 신앙을 포기할 만큼 매력적이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시간적으로 짧은 순간에 이루어진 상황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몇 가지 질문을 던져볼 수 있습니다. 셋의 후손들이 가인의 후손들과 통혼하게 된 경로와 당대의 사회적 배경은 어떠했는가? 다른 하나는 "딸들의 아름다움"으로 대표되는 가인의 후손들이 이룩한 문화의 성격이 어떠한 것이기에 셋의 후손들은 그들에게 휩쓸려 육체가 되었는가? 다행히도 이런 질문에 대하여 실낱같은 해답을 셋과 가인의 족보에서 감지할 수 있습니다.

'가인이 여호와의 앞을 떠나 나가 에덴 동편 놋 땅에 거하였더니 아내와 동침하니 그가 잉태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였더라 에녹이 이랏을 낳았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았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았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라멕이 두 아내를 취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며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하여 육축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그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동철로 각양 날카로운 기계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이었더라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배일찐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 칠배이리로다 하였더라' (창세기 4장 16~24절)

가인의 족보를 보면 가인이 성을 쌓았다는 것부터 그 후손들에게 이르기까지 뭔가 많은 일들을 한 것처럼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의 내역을 살펴보면 우선 가인이 성을 쌓았다는 것은 특정지역에 밀집해 살아가는 도시문화를 시작했다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으며, 장막에 거하여 육축을 쳤다함은 목초지를 찾아 이동하는 유목생활 대신에 현대인들과 비슷한 형태로 특정 장소에서 짐승을 사육하였다는 것입니다,

수금과 퉁소에 대한 기록은 음악이 발달했고, 하나님을 찬양하였다는 내용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인간의 쾌락의 향유와 관련해 이해 할 수 있으며, 날카로운 기계를 만들었다함은 기계문명이 발달했다는 것이고, 나아마라 함은 현대의 미인대회와 같이 여성들이 외적인 맵시에 지극한 관심을 가졌다는 것으로 이해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표현들을 종합하면 현대 문명과 비슷한 상업과 산업이 발달한 사회를 가인의 후손들이 이룩했던 것으로 이해 할 수 있습니다.

반면 셋의 계보를 보면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 외에 이렇다 할 내용 없이 자녀를 낳았다고 기록합니다. 이러한 기록을 가인의 후손들과 대비하여 생각할 때 셋의 후손들은 전원 속에서 농사와 유목을 하면서 신앙의 삶을 살아 왔다고 보입니다.

이제 앞서 던져진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 우리는 현대의 삶, 즉 문화적 현상을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는 바와 같이 오늘날 기계발달을 통하여 산업화를 이룩하고 그러한 기조 위에서 발달된 나라나 민족의 문화가 전원적인 삶에 머무르고 있는 사람들의 삶을 자극하여 역시 동일하게 산업화의 길로 나가게 하는 것을 우리는 경험했습니다. 마찬가지로 가인이나 셋의 후손들은 점차 그 수효가 많아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노아의 때에 이르러 아니 그 이전부터 이 후손들은 그 지경이 가까워졌을 것이고 그들의 삶의 방식이 서로 다름을 알고서 교류를 통하여 서로의 필요를 충족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가인의 후손들이 이룩한 산업사회와 전원에 머물러 왔던 셋의 후손들의 문화가 교류되면서 혼인을 통하여 서로의 신뢰를 확인할 수 있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셋의 후손들은 기계문명의 이기를 통하여 더 많은 수확을 기대할 수 있게 되었고 이제 나아가 기계문명의 편리함과 유익에 취하여 점점 오늘날과 같이 전원의 생활을 버리고 가인의 도시 문화에 젖어 가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은 문명의 이기와 편리, 그리고 다양한 볼거리나 삶의 패턴에 취하여 신앙을 저버렸을 것입니다.

살펴본 바와 같이 가인으로부터 시작하여 그 후손들이 이룩한 문화의 특징은 현대 문명과 같이 편리성과 안전성이며, 그 저변에는 하나님 없이도 존립하고자 하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셋의 후손들은 이러한 문화의 외적인 화려함과 편리성에 매료되어 서서히 신앙의 순순함을 잃어 갔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가 서 있는 시대에 대한 거울로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2. 하나님의 권고

'네가 들어가 얻으려 하는 땅은 네가 나온 애굽 땅과 같지 아니하니 거기서는 너희가 파종한 후에 발로 물 대기를 채소밭에 댐과 같이 하였거니와 너희가 건너가서 얻을 땅은 산과 골짜기가 있어서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흡수하는 땅이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권고하시는 땅이라 세초부터 세말까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눈이 항상 그 위에 있느니라' (신명기 11장10~12절)

신명기의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권고하시는 성도의 삶의 방식을 가늠하게 합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던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이 이스라엘 민족이 노에로 살았던 애굽 고센 땅과 그 풍토가 사뭇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이 말씀을 좀 더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애굽의 고센 지역을 지도에서 보면, 그곳은 강하구의 삼각주로 나일강 상류로부터 끊임없이 토사가 흘러 내려와 쌓인 충적토로 형성된 땅입니다. 비옥하고 토질이 부드러워서 종자를 파종한 후에 물을 공급하기 위해 크게 애쓰지 않고 말씀에서 '발로 물대기'로 표현한 것처럼 발로만 슬슬 고랑을 내어도 경작이 능한 지역입니다.

그러나 장차 들어가 살아갈 가나안땅은 산과 골짜기가 있다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평야지대가 아니라는 것이고, 이 땅은 더욱이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흡수하는 땅으로 제주도와 같은 토질을 가진 땅이며, 고센 지역은 언제라도 나일강의 풍부한 물을 끌어올 수 있었지만 약속의 땅은 계절에 따라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의지해 농사를 지어야하는 천수답이 즐비한 고장이라는 것입니다.

객관적으로 보아서 고센보다 사람이 살기에 훨씬 더 악조건인 이 땅을 하나님께서는 그가 선택한 민족이 살아가기를 권고하시고 지극한 관심을 갖고 계시다고 모세는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지리적 이해를 토대로 볼 때 애굽 고센의 주변 여건은 하나님 없이도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갖추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 땅은 일찍이 문명이 싹튼 지역이기도 합니다. 이렇듯 고센 지역은 풍족했기에 애굽의 압제가 없었다면 이스라엘 민족은 조상으로부터 전수해온 신앙을 완전히 잃어버렸을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가나안 지역의 환경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 없이 살아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들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야 했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확실한 신뢰 없이는 견딜 수 없는 땅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디아스포라는 본질상 하나님을 덜 의지하고도 살아가려는 유대인들이 고국을 떠나므로 일어난 현상으로 이해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들이 이동을 할 때는 외적으로 보아 충분한 이유가 있었겠지요. 마치 룻기의 나오미가 그 땅을 떠날 때처럼 말입니다.

이렇듯 하늘 보기 삶으로 선민을 인도하시면서 애굽의 문화에 젖었던 한 세대를 광야에서 멸하시고 새로운 세대에게 이러한 삶을 허락하신 것은 혼잡케 됨을 피하는 것이며, 그 본질은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로의 초대이고, 바로 거기에 젖과 꿀이 흐른다는 것입니다.


3. 혼잡에 대한 경계

호세아 7장 8절 -에브라임이 열방에 혼잡되니 저는 곧 뒤집지 않은 전병이로다

고린도후서 2장 17절 -우리는 수다한 사람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

고린도후서 4장 2절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궤휼 가운데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천거하노라

저는 이전 글에서 성도는 두 세계를 경험하는 유일한 존재라고 논증한 바 있습니다. 즉 신본과 인본의 세계, 달리 말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 하나님 중심의 안목으로 보는 세계와 아담이 깨달은 자기중심의 세계가 그 것입니다.

즉 성도는 빛과 어둠을 품고 있다는 것이며 이것은 마치 회색지대에 서 있는 것 같아서 깊이 있는 신앙적 분별력이 없으면 빛과 어둠이 비슷해 보이는 딜레마에 빠진다는 것입니다. 바로 성경은 이점을 끊임없이 경계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를 돌아보면 종교적 신념과 신앙이 분별되지 않고 뒤섞여 있습니다. 점점 신앙의 본질을 도외시하고 기독교라는 종교적 형식이 신앙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통한 하나님과의 깊은 영성을 구한다면서도, 어느 순간에 세속적인 성공이나 물질적인 풍요를 성공적인 신앙생활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 오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된다고 자랑스럽게 말합니다. 그 내면은 황폐해 있으면서도 헌금과 전도의 숫자 등으로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는 것으로 자위하려 애를 씁니다. 가정, 직장, 친구, 교회 속의 인간관계에서 많은 상처를 받지만 그러한 것을 표현하면 신앙인  답지 못한 것으로 생각하며, 오직 은혜만을 받아야 하고 받은 것처럼 해야 인정받는 분위기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회색지대의 딜레마를 표현하는 어리석은 신앙표현이라 하겠습니다.

열왕기상 13장에 언뜻 보아 납득하기 힘든 사건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즉 이름이 없는 선지자의 이야기입니다. 앞 뒤 장의 상황에 비추어 이렇게 자세하게 한 사람의 이야기를 진행하면서 이름을 밝히지 않은 경우는 성경에서 찾기 힘듭니다. 이로 미루어보아 하나님께서 그 이름을 부끄럽게 여기신다고 생각합니다. 이 장에서의 하나님의 경고는 혼잡에 대한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사람이 선지자로 부름을 받았음에도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에 서지 못하고 상황적 필요에 의해서 세상과 섞이면 하나님께서 그를 부끄러이 여기시는 것입니다.

4. 좁은 길로의 초대

주님의 말씀처럼 하나님과 깊은 관계로 가는 길은 쉽지 않습니다. 혹자는 말하기를 우리가 말씀을 몰라서 신앙생활을 제대로 못합니까? 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한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러나 저는 단언합니다. 성도가 신앙생활을 잘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분명 의식적이던 무의식적이던 자신이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것을 위하여 행하며 시간과 재물을 사용합니다. 그러므로 겉으로는 말씀을 존중하는 것 같지만, 그 내면의 깊은 곳에서는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인도하심이 중심 가치로 자리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신앙생활이 힘이 없는 것입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완전함이 아니라 신앙이 성장하고 있는가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것은 간단하고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오직 말씀을 통하여 나오시며 말씀 안에서만 일하시는 성령님께 집중하였을 때, 그 분의 인도하심으로만 가능합니다. 그러기 위하여 성경을 펴고 마음을 드리며 많은 시간을 내야 합니다.

갓난아이가 한순간에 성인이 되지 않듯이 감각 있는 성도로서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자신의 본질이 의존적 존재임을 깨닫고 인정하며, 자신을 인도하실 주님께 모든 것을 던져 버리는 위험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러할 때 분별력을 얻게 되고 세속과의 혼잡을 피하며 성령님의 강권하시는 인도를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엡 1장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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