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인교회 예배실. ⓒ이준모
기도는 선교의 동력이다. 해인교회가 1997년 말 하반기에 이미 IMF를 맞아 1/3의 교인들이 실직을 하고 교회가 전체적으로 침체되던 시기에 제일 먼저 시작한 것은 '실직자를 위한 기도회'였다. 기도회가 시작된 지 몇 개월 후에 교우들은 한 가정을 빼고는 모두가 취업했고 이로부터 얻은 자신감이 지역사회의 '실직자를 위한 자활 및 쉼터'로 발전했다. 이것이 '내일을여는집'으로 만들어졌다.

지금 뒤돌아보면 기도는 선교의 동력이었고, 기도 없이는 하나님의 사업은 시작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때로 교우들 중에는 교회가 이런 저런 일들을 해야 한다고 제안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러한 제안이 교회의 선교 과제가 되지 않고 아이디어 수준으로 끝나는 것은 기도의 문제다. 교회에서 일을 한다고 하는 교우일수록 기도하는 사람이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기도하지 않고 일을 하는 것은 자칫 잘못된 곳으로 흐를 수 있다. 하나님을 배척하고 자기 중심으로 일을 하게 되거나 갈등의 소지를 낳을 수 있다. 함께 기도하면서 선교의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고, 기도의 능력을 체험하는 것은 선교를 위해 폭발적인 힘을 갖게 한다.

▲ 해인교회 교우가 찬양을 드리고 있다. ⓒ이준모



해인교회 교인들이 그렇게 힘들고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노숙인 쉼터로부터 무료급식, 가정폭력의 문제 등 다양한 선교사역을 계속 할 수 있었던 것은 기도의 능력을 체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도의 능력은 개인을 변화하고 교회를 변화시킨다.

내가 기도의 능력을 체험한 것은 중학교 여름수련회 기간이다. 여름수련회 기간 중에 점심식사 후 성경공부를 통해 기도에 관해 배운 뒤, 각자가 다른 장소에서 기도의 시간을 가졌다. 찬양(Adoration)-고백(Confession)-감사(thanksgiving)-간구(Supplication)로 이어지는 기도는 사도행전(ACTS)에서 펼쳐지는 선교의 사명을 갖게 한다고 배웠다. 그야말로 배운 대로 실습한 시간이었다. 석양이 지는 무렵 버드나무 아래서 기도를 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그 때는 교회의 분위기가 그러하듯 다들 통성으로 기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기도를 잘 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리 크지 않은 소리로 기도를 하고 있었는데, 나의 기도는 전혀 의도하지 않았지만 내면의 죄 성을 돌이키는 기도로 나아갔다. 지난날의 잘못이 필름처럼 지나가고, 눈물이 쏟아지더니 콧물과 범벅이 되어 주체할 수 없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내심 "이거 정말 창피한데… 왜 이럴까?" 했지만 이미 나는 기도에 몰입해 있었다.

어쨌든 그 사건 이후 내 생활이 크게 변화했다. 나는 기도하기 시작했다. 어머니와 새벽기도를 다녔고, 아침 등교 길에도 교회로 뛰어가 교회의 문고리를 잡고 잠깐씩 기도했다. 나는 비오는 날을 제외하곤 거의 자전거로 통학을 했는데, 그 추운 겨울에도 소양강을 자전거로 건너면서 거의 습관적으로 기도와 찬양을 했다. 하교 길에도 역시 교회를 먼저 들러 기도를 한 후 비로소 집으로 왔다.

겨울이면 종종 한얼산 기도원으로 동절기 수련회를 갔는데, 거의 빠짐없이 참석하여 소나무를 부여잡고 산기도를 했다. 방언기도를 하기 시작한 것도 중학교 때 부터이고, 산기도를 다닌 것도 이 때부터다.

교회의 분위기가 그래서였는지 모르지만, 이런 생활이 내게 특별한 것은 아니었다. 춘천 성시화(聖市化)를 위한 모임이 학생들 간에도 만들어졌고, 그 모임은 각 학교에서 신앙심이 좋다는 학생들이 모였으며, 약간은 특별한 멤버십을 갖게 했다. ' 나 자유 얻었네, 너 자유 얻었네'는 찬양에 맞추어, '나 목사 되겠네 너 목사 되겠네' 하며 찬양할 정도로 목회자의 꿈은 날이 갈수록 굳어졌다. 놀라운 것은 지금 그 멤버의 대부분이 각 교단의 목회자로 사역하고 있는 일이다.

기도방법에 대한 경험은 교회의 분위기에 달려 있는 듯하다. 나는 춘천 Hi-CCC의 순장이 되기 전에는 명상기도를 배운 적이 없다. 아마도 내가 있던 감리교회가 매우 열광적이고 뜨겁게 성령운동을 하던 곳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 해인교회 어린이주일예배 때 찬양하는 모습. ⓒ이준모

내가 해인교회로 부임하기 전 다른 민중교회에서 잠시 전도사로 사역할 때의 기도경험은 사뭇 다르다. 그 교회는 통성기도를 하는 적이 거의 없었다. 단지 내가 새벽제단을 쌓을 때 잠시 마음 놓고 통성기도를 할 뿐이다.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겠지만, 내 경험에서 받는 느낌은 민중교회에 출석하고 있는 대학 출신의 교인들은 교회의 회의나 분위기를 압도하는 것 같다. 이런 분위기는 기도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가슴에서 터져 나오는 기도보다는 지적인 사람들에게 비교적 어울리는 관상기도나 명상기도가 선호되는 듯 했다. 소리 내서 기도하는 것은 왠지 억제되는 듯 했고, 순복음과 같은 보수적인 교회에서나 통하는 것으로 터부시되는 듯 했다. 십일조라는 헌금 명칭도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교회 예배 후 회식 자리에서 판이 벌어지면, 그 때는 머리보다는 가슴으로 걸쭉하게 놀았다.

해인교회에 부임한 이후 교회의 중요지표를 세우면서 신앙공동체 교육공동체 생활공동체로 큰 틀은 만들었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신앙공동체에 담겨지는 예배, 찬양, 기도 등 구체적인 요소다. 신앙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예배는 가장 중심적이고, 예배에서 찬양과 기도는 중요하고 예민한 일이다. 여기에 에둘러 던져진 화두는 '다양성'이다. 비록 통성기도의 부작용은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민중의 정서를 무시하지는 말자는 것이었고, 상호 다름을 인정하자는 것이 결론이다.

교우들과 오랜 토론을 걸쳐 공적인 예배 시에 하는 죄책 고백은 묵상기도로 하고, 설교 후 결단기도는 종종 통성기도를 경우에 따라 도입했다. 통성기도의 문제는 이지적인 교우들에게는 좀 거부반응을 일으켰다. 청년들 또한 교회가 좀 보수적으로 가는 것 아니냐는 우려를 했다.

그러던 중 노동운동을 열심히 하던 한 교우의 형님이 암으로 사형 선고를 받고 교회를 나오기 시작했다. 그 교우는 투병하는 형님을 위해 교우들 모두가 간절하게 기도하는 모습에서 감동을 받았다. 교우들도 예배 전에 다 같이 합심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스스로 깨지기 시작했다. 교우들도 기도의 능력으로 치유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실직의 문제에 이어 암 투병을 하는 교우로 인해 교회는 늘 열정적으로 기도하는 교회로 점점 변화하고 있었다.

또 하나의 기도 문제는 공예배시에 나타났다. 예배를 위해 기도하는 교우들 중 일부 교인이 사회적인 이슈를 자신의 개인적 느낌대로 표출하면서 입장이 다른 분들에게 부담을 주기도 하고, 지나치게 공예배와는 어울리지 않게 개인적인 기도로 탄식을 하거나 가르치는 식의 기도를 하곤 했다.

종종 장로님들의 설교식 기도를 비판적인 예로 들어 논하듯이, 이런 기도의 문제는 비판의 대상이 됐다. 결국 교우들과 오랜 토론 끝에 공예배에서 기도순서를 맡은 이는 가능하면 전 교우들이 공감하는 기도를 글로 써서 준비하도록 교육했다. 그러나 그것도 권면 정도였지 어떤 틀을 강요할 수는 없는 일이다. 여전히 기도는 자신이 가장 편한 방식대로 하나님과 대화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 번은 어느 집사님이 주일예배 대표기도를 하는데, "하나님… 얼마나 오랜 만에 불러 보는 당신의 이름입니까?" 하고 한참을 흐느끼다 그냥 내려 온 적이 있었는데, 새로이 교회에 등록한 교우에게는 참 당황스러운 일이지만 그 분을 아는 교우들은 큰 은혜가 되기도 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건강한 교회는 기도하는 교회다. 기도는 흔히들 영적인 호흡이라고 말한다. 호흡이 멈추면 생명이 끊기듯, 기도가 끊기면 교회는 생명력을 잃어버린다. 기도는 남을 정죄하거나 교육하거나 어떤 이슈를 선언하는 것 또는 과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겸손한 마음으로 죄 된 자신을 드리는 시간이다.

기도는 하나님을 향하여 자신의 요구를 일방적으로 쏟아 놓거나 하나님을 겁박(劫迫)하는 것이 아니다. 기도는 오직 하나님을 향하여 나누는 대화요, 자신을 성찰하는 시간이다. 기도는 우리를 변화시킬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기적을 일구워 나간다.

기도는 주님과 나누는 대화다. 우리는 거룩하신 주님과 감히 '아빠'라 호칭하며 대화를 한다. 그 분과 대화를 하다보면, 한없이 지극하신 그분의 사랑을 체험하기도 하고, 그 분 앞에 두려움에 떨기도 한다. 그 분에게 간절히 소리 높여 울부짖으면서 간구하기도 하지만, 때로 침묵 속에 그 분의 음성을 듣는 것만으로도 온통 사로잡히기도 한다. 때로 내 열망을 그 분 앞에 부끄러운지도 모르고 그냥 토해 내기도 하지만, 그 분이 무엇을 위해 기도했는지 생각하며 그 분의 기도를 닮아간다.

기도가 특별한 시간을 내어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것만은 아니지만, 예수님이 무리를 떠나 한적한 곳에 가셔서 기도를 한 것처럼 그렇게 기도하는 것도 유익하다. 우리의 생활 그 자체가 기도이어야 하겠지만, 한 걸음 물러서 겸손하게 나를 돌아보는 기도의 시간을 갖는 것도 중요하다. 때로 우리가 전철을 타고 이동을 하거나 거리를 걸으면서 기도할 수도 있지만, 특별한 시간을 정기적으로 내어 기도하는 생활도 우리의 생활에 큰 도움을 준다.

기도의 방식에는 소리를 내어 기도하는 방식, 관상기도나 명상기도, 그룹으로 모여 합심하여 기도하는 돌림기도, 다른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중보기도 등 다양한 방식이 있지만, 기도는 어떤 방식이 좋고 나쁘고 또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만남에 그 목표가 있다. 그래서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품는 '자기비움' 이기도 하다.

기도가 단순히 반성이나 자기성찰과 다른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영으로 기도하는 사람에게 임해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신다.

"주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주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셔서,
포로 된 사람들에게 자유를,
눈먼 사람들에게 다시 보게 함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주고,
주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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