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뉴스앤조이 신철민
비움의 영성은 예수가 이 땅에서 사셨던 삶의 방식이었고 또 내용이었다.

예수는 자신을 비워 철저하게 가난한 자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셨고 모든 것을 내어주시는 비움과 낮아짐의 삶을 보여주셨다. 사람들은 인간으로서 철저한 비움을 보이신 예수에게서 하나님을 보았다.

기독교는 그런 예수를 믿는 믿음에서 출발했다. 그러나 오늘날 기독교는 더 이상 자신의 기득권을 내놓으려 하지 않는다.

가진 것이 많은 교회, 가진 자들의 기독교가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가난한 교회는 있어도 가난해지려는 교회는 별로 많지 않다.

개인도 그렇다. 삶, 마음, 생각을 나누지 못해 자기 안에 쌓아놓는다. 그리스도를 믿지만 그의 낮아짐은 보지 않는다. 아니, 아예 그분의 낮아짐에는 애써 눈감으려 하고 그로부터 나오는 능력, 복과 영광만을 좇는다. 가난한 사람은 많아도 가난을 실천하는 사람 또한 많지 않다.

자신의 것을 내놓지 않는 종교나 사람은 결국 예수의 종교도, 예수의 사람도 아니다. 성육신 사건은 바로 하나님의 자기 비움 사건이었고, 이 땅에서 예수의 비움의 삶은 그리스도인이 지녀야 될 자기 비움의 표본이다. 곧 비움은 예수의 존재방식이었고 오늘 우리의 존재방식이어야 한다.

비우지 않으면 예수를 보지 못한다

"나를 따라 오라"고 말씀하신 예수를 좇아나섰던 제자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버리고 떠나는' 비움의 영성의 시작을 본다. 제자들은 존재의 변화를 일으키고 있는 비움의 영성을 향해 첫 발을 내딛었다. 예수 제자들뿐 아니라 우리 또한 예수를 믿고 그를 좇기로 한 후, 제자들처럼 그렇게 버리고 떠난 사람들이 아닌가! 사실은 '버리고 떠난' 모습이 그리스도인의 당연한 정체성이 아니던가.

그런데 성서를 통해 예수를 묵상하고 그의 삶을 바라보면 비움의 삶이 무엇인지 확연한데도 불구하고 그 삶으로부터 애써 눈을 돌리고 있지 않은가. 비움의 영성을 향해 출발한 우리의 삶인데 오늘 우리는 그 출발조차 잊고 살아간다.

이사할 때마다 우리는 '언제 이렇게 살림살이가 많아졌는지' 의아해한다. 이 방 저 방 보이지 않는 곳까지 무엇인가로 채워져 있는 것을 보면서 굳이 필요하지 않은 것, 쌓아두고 채우지 않아도 될 것들을 너무 많이 가지고 있다는 생각에 부끄러움이 먼저 일어난다.

나의 신앙생활도 예외는 아니어서 그 속을 들여다보면 어느덧 버릴 것이 너무도 많아져 있음을 보고 당혹감을 갖게 된다. 마음을 가득 채운 미래에 대한 생각과 불안함, 더 많이 가지려는 욕심, 때로는 남에 대한 미움과 원망의 그물들이 뒤엉켜 있다. 이럴 때면 다시 자기를 비우고, 주님 향한 삶으로 떠나기가 더욱 어려워진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예수를 만나면 '낮아지려는' 마음이 필요없다

'비움'이 힘겹게 느껴진다는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다. 한 가지는 아직도 예수의 부르심의 뜻이 삶에 올곧게 배어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제자들의 삶뿐 아니라 내 삶을 통해서도 주님은 지금 '사람을 낚는 일'을 하고자 하신다는 뜻이 있음을 발견하지 못한다. 그것은 제자들처럼 예수를 제대로 못 만났든지 아니면 그의 부르심의 뜻이 점점 희미해지고 있다는 표시다.

그래서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사람의 생명이 아니라 일이고, 돈이고, 업적이다. 궁극적으로는 남을 위한 삶이 되리라 믿고 시작한 일조차도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은 없고 '성과'에 매여 있는 우리 자신을 보게 된다. 그래서 '비우고 떠나는' 삶이 힘겨워지고 있다.

자신을 비우지 못하는 또 다른 이유는 자신 속에서 끊임없이 차 오르는 수많은 갈망과 욕심을 제대로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예수를 계속해서 만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제자들처럼 생업에 바빴던 사람들이 자기의 재산과 가족까지 버리고 떠날 수 있었던 것은 '제대로' 예수를 만났기 때문이다.

사실 예수를 제대로 만나면 굳이 낮아지려는 마음다짐도 필요하지 않다.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만나면 굳이 비우려고 애쓸 필요도 없다. 예수의 뜻이 나타내는 강력한 이끌림에 비우게 되고 따라가게 되는 것뿐이다.

비우지 않으면 예수를 보지 못한다. 비우지 못하면 예수를 만날 수 없고, 예수를 만나지 못하면 비우지 못한다. 그러나 예수가 우리를 비우게 하시고, 비운 마음에 다시 예수가 찾아오신다. 은총의 점화(點火)로 인한 비움과 예수와의 만남은 우리의 삶을 늘 새롭게 하는 계기가 된다.

'무엇으로 가득 찬' 생각과 영혼으로는 '하나님의 신비'를 만날 수 없으며, 비움의 영성을 통해서 하나님의 신비를 맛볼 수 있다. 자신을 비우고 하나님 앞에 그대로 내어놓는 완전한 의탁 없이 하나님을 체험할 수 없다. 그렇지 못한 자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시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부요함'이 오시는 하나님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가난한 자는 가난함의 영성으로 

비움의 영성은 내 소유의 일부분을 비우는 것이 아니라 나의 전 존재 자체가 가난함과 자유함과 열림의 존재로 변화됨을 의미한다. 비움(가난함)의 영성은 소유한 물질의 많고 적음으로 이해되기 이전에 대면하는 모든 존재 앞에서 취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곧 나의 존재가 다른 존재 앞에서 어떤 집착에서 자유롭고, 겸손하고,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순수한 마음을 잃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가난함의 영성을 지닌 자의 모습이다. 물질세계에 살면서 물질에 욕심 없는 가난함을 지향하는 것은 이러한 존재의 가난함의 토대다.

그렇다고 물질적으로 가난하다고 모두가 가난함의 영성을 지녔다고 확신할 수 없다. 가장 불행한 사람 중의 하나는 자신이 경제적으로 가난한 것도 서러운데 오히려 그 가난을 가난함의 영성으로 발화시키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없는 것도 고통인데 상대적 박탈감에 가난이 건네주는 행복도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에게 예수가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라고 말한 것은 해방의 선포이기 이전에 걸림돌이 되기 쉽다. 가난함의 영성에서 '가난한 자'의 반대말은 부자가 아니라 교만한 사람, 욕심을 부리는 사람, 자유롭지 못한 사람, 순수하지 못한 사람으로 표현될 수 있다.

▲ 김진 목사 / 크리스챤아카데미 선임연구원. ⓒ뉴스앤조이

그래서 신학자 도날 도어는 이렇게 말한다. "원시 그리스도교 시대부터 교회는 가난의 신학과 영성을 지니고 있었다. 자발적으로 가난을 택하는 것은 속죄와 자기 부정에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 세상의 사물에서 초탈하여 개인적인 영적 자유를 성취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그리고 과거에는 자발적인 가난에 대한 요청은 특별히 요청된 비교적 소수의 사람들에게 제한된 것으로 여겨졌다. 헌데 오늘 이 시간에도 자발적으로 가난을 맞아들일 사람들이 요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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