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둠이 물러가고 새 날이 밝아 오고 있다. 한 점 찰나의 순간이지만 긴 침묵의 시간이다. ⓒ박철
참으로 오랜만에 혼자 있자니 조용해서 좋다. 이따금 바람 서걱거리는 소리, 창문이 흔들리는 소리가 들릴 뿐. 이렇게 사람 사는 세상이 조용할 수가. 지금 애들은 학교에 갔고 아내는 외출중이다. 아무런 간섭도 성가심도 아무 할 일도 없이 나를 본다. 그리고 내면의 소리를 듣는다. 침묵. 침묵의 소리를 듣는다. 내 자신의 침묵의 세계에 들어가 보아야 한다. 얼마나 많은 말을 하고 살았는가. 의미 없는 말을 하루 동안도 수없이 남발한다. 어떤 때는 도무지 아무 쓸데없는 말을 할 때도 있다.

"내가 말을 너무 많이 했구나!"

자괴감이 꼬리를 물고 나를 괴롭힐 적도 있다. 말이 적은 사람, 침묵을 소중히 여길 줄 아는 사람에게 신뢰가 간다. 초면이든 구면이든 말이 많은 사람에게는 신뢰가 가지 않는다. 나도 어쩔 수 없이 많은 사람을 만나지만 말수가 적은 사람에게 오히려 내 마음을 열어 보이고 싶어진다. 사실 인간 사이의 만남에서 말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병에 물을 가득 채우면 소리가 나지 않는다. 그러나 물을 반쯤 채우면 소리가 난다. 국민학교 시절 나는 30리 길을 통학했다. 학교에서 도시락을 다 먹고 책보에 싸서 메고 돌아오면 '달그락'하고 소리가 난다. 뛰면 '달그락 달그락…' 더 요란한 소리를 낸다. 우리의 인격도 마찬가지이다. 꼭 필요한 말만 할 수 있어야 한다. 안으로 말이 여물도록 인내하지 못하기 때문에 밖으로 많은 말을 쏟아내고 만다. 좋지 않은 습관이다.

생각이 떠오른다고 해서 불쑥 말해 버리면 안에서 여무는 것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 내면은 텅 비어 있다. 말의 의미가 안에서 잘 여물도록 침묵의 여과기에서 걸러 받을 수 있어야 한다. 오늘날 인간의 말이 소음으로 전락한 것은 침묵을 배경으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말이 소음과 다름없이 다루어지고 있다. 우리들은 말을 안 해서 후회하는 일보다 말을 해버렸기 때문에 후회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 황산의 해돋이 풍경. 해가 지는 순간, 인간의 허명도 사라지는 듯 하다. ⓒ박철
인간은 강물처럼 흐르는 존재이다. 늘 변한다. 날마다 똑 같은 사람일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남을 함부로 판단 할 수 없다. 말로 비난하는 버릇은 버려야 우리 안에 사랑의 능력이 자란다. 이 사랑의 능력을 통해서 생명과 행복이 움트게 된다.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잡다한 지식의 홍수에서 어떻게 자유한 삶을 살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가정에서나 사회에서나 또는 여행길에서도 우리들은 조용히 자기의 내면을 관찰할 기회가 별로 없다.

오늘 이 시대는 말의 홍수시대이다. 가스와 연기로 세상이 더러워지고 공해가 생기는 것보다 무책임한 말, 언어의 남발로 세상이 질식할 만큼 오염되었다. 아첨하는 말, 중상 모략하는 말, 공갈협박, 남을 흉보고 헐뜯는 말… 길을 걷거나 자동차를 운전해 가노라면 온통 울긋불긋 써 붙여 놓았다. "나를 사세요" "나를 잡수세요" "나 좀 타세요" "나하고 같이 자요" 수많은 광고판이 우리의 눈을 어지럽게 한다.

TV의 약 광고, 화장품 선전이 골치가 아프고 쑤신다. 신문을 보더라도 "사기 당했다. 고소했다. 간음했다. 도둑질했다. 살인했다. 떼먹었다" 현기증이 난다. 남의 밑구멍을 들여다본 기분이 든다. 그런 것을 읽고 그런 것을 듣기 보다는 차라리 백지 한 장을 들여다보는 것이 독방에서 잠시 침묵을 지키고 있는 시간이 얼마나 명쾌한 시간이겠는가.

▲ 때론 열광적인 음악보다 그윽한 풍경소리가 사람의 마음을 더욱 강하게 흔들어놓는다. ⓒ김민수

맑은 샘물에 얼굴이 비치듯이 침묵을 지키고 있는 시간이 우리의 참 모습을 비추는 것이다. 침묵하는 시간은 우리의 속사람을 살찌게 한다. 우리의 내면적인 삶을 풍요하게 만들어 준다. 내가 벙어리가 아니라고 소리치고, 내가 이만큼 안다고 떠드는 동안, 실은 자신이 올라가고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얼간이가 되며 주책이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 단순한 진리를 망각하고 살아간다. 이것은 외부적인 소음 때문이다. 이러한 저질 문화의 홍수에 맹종할 것이 아니라 분명한 자기 질서를 갖고 그것을 극복할 수 있어야 한다.

말은 가능한 적게 해야 한다. 한 마디로 충분할 때는 두 마디를 피해야 한다. 인류역사상 사람답게 살다간 사람들을 한결같이 침묵과 고독을 사랑한 사람들이었다. 현대인의 특징은 조용히 사색하고 명상하며 기도하는 침묵의 시간을 잃은데 있다. 그 시간을 잃어버림으로 천박한 생각, 얕은꾀만 늘었다. 그 천박하고 얄팍한 생활을 살아가려하니 스스로 자신의 올무에 넘어지게 되는 것이다. 약은 사람이 늘 잔꾀에 넘어진다.

사람들을 만나 떠들고 집에 돌아왔을 때 그렇게 마음이 공허하고 허전할 수가 없다. 공연히 지껄여 댄 자신이 한없이 부끄럽고 후회스러울 때가 있다. '침묵은 금이다'라는 속담은 말의 중요성을 역설적으로 강조하는 선조들의 가르침이라 생각된다. 의미 없이 쏟아놓는 말보다는 무언(無言)이 향기롭고, 책임지지 못할 말을 할 바에야 아예 말을 하지 않는 편이 훨씬 낫다는 뜻으로 보여진다. 표현력과 발표력으로 지식의 척도가 측정되는 요즘, 말을 못하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 같다.

그런데 말을 못하지 않는다는 것이 말 잘한다는 것과 반드시 일치하는가? 말을 잘한다는 것은 무수한 표현력을 구사해 말을 많이 한다는 것이 아니라 농도 짙은 말을 아껴서 하는 것일 게다. 또한 말을 잘한다는 것은 그 말이 현실성을 담고 있을 때이고, 표현된 말이 진짜 가치를 발휘할 때는 그 말에 책임이 따를 때이다.

이레네우스 사상가가 "내가 말한 다음 후회한 적은 있어도 침묵을 지킨 것을 후회한 일은 없다"고 했다. 가톨릭 수도원에서는 수도원생들에게 침묵훈련을 시킨다. 신부들은 1년에 한 차례 개인피정을 하면서 하루 동안은 하루 종일 침묵하는 수행을 한다고 한다. 내가 존경하는 이 아무개 목사님은 올 한 해 동안 말씀을 한마디도 안 하시고, 글도 한 줄도 안 쓰시고 침묵수행을 하시고 계신다. 사모님께도 손짓 발짓으로 의사소통을 한다고 전해 들었다. 인도의 간디는 월요일은 "침묵의 날"로 정해놓고 누구와도 대화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조용히 자연을 산택하거나 침묵의 훈련을 했다고 한다.

▲ 자고 났더니 꽃이 활짝 피었다. 아무도 모르게 은밀하게 이루어진 일이다. ⓒ박철
위대한 사상, 위대한 인격과 신앙은 침묵의 산물이다. 야고보 선생은 "혀를 재갈 물리는 사람은 온 몸을 다스리는 사람이다"고 했다. 침묵하기를 배운 사람은 자기 인격과 삶을 통제하기를 배운 사람이다. 속에 든 것이 없는 사람일수록 더 떠들어대고 자기를 선전한다. 참 높은 인격, 참 무게 있는 사람은 함부로 입을 벌려 떠들지 않는다. 침묵 속에 오히려 많은 것을 말한다. 침묵은 말보다 강하다. 나는 가끔 설교를 할 때마다 차라리 침묵으로 이 시간을 메웠으면 하는 때가 있다. 공연히 진리를 설명하느라고 긴말을 하다보면 오히려 하느님의 말씀을 값싸게 만들고 왜곡시킬 때가 있기 때문이다.

"최상의 것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괴테) 진리는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자체로 이해되어야 한다. 설명하다보면 비슷한 모조품이 된다. 시방 나는 구도자(求道者)의 길을 제대로 걸어 왔는가. 사람들에게 말로 가르칠 것이 아니라 몸으로 본을 보여야 할 것 아닌가. 가급적 말을 적게 하고 그러나 따스한 가슴은 지니고 살아야 할 것 아니겠는가.

나는 좀 어리석어 보이더라도
침묵하는 연습을 하고 싶다.
그 이유는 많은 말을 하고 난
뒤일수록 더욱 공허를 느끼기 때문이다.
많은 말이 얼마나 사람을 탈진하게 하고
얼마나 외롭게 하고 텅 비게 하는가?
나는 침묵하는 연습으로
본래의 나로 돌아가고 싶다.
내 안에 설익은 생각을 담아두고
설익은 느낌도 붙잡아 두면서
때를 기다려 무르익는 연습을 하고 싶다.
다 익은 생각이나 느낌 일지라도
더욱 지긋이 채워 두면서
향기로운 포도주로 발효되기를
기다릴 수 있기를 바란다.
침묵하는 연습 비록 내 안에
슬픔이건 기쁨이건
더러는 억울하게 오해받는 때에라도
해명도 변명조차도 하지 않고
무시해버리며 묵묵하고 싶어진다.
그럴 용기도 배짱도 지니고 살고 싶다.
(유안진. 침묵하는 연습)

(이 글은 기독교사상 2004년 6월호에도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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