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뉴스앤조이 신철민
흔히 작은 교회를 말할 때 그 교회의 기준을 자립이냐 미자립이냐로 평가합니다. 자립교회는 다른 교회나 사람의 도움을 받지 않고 스스로 교회의 본래 일을 하는 교회를 말합니다(사실 우스운 이야기 같지만, 목사 사례비를 온전히 지불하면 자립이라고 하고 그렇지 못하면 미자립으로 분류한다).

벧엘교회가 창립한 이후 12년 동안 자립교회의 모습을 가진 적은 몇 해 없고 지금은 소위 미자립교회입니다. 도움을 주기보다는 도움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미자립교회로서 가장 마음이 아픈 것은 누군가가 우리 교회에 도움을 요청할 때 도움을 주지 못할 때입니다).

하나님의 돈이니 나의 돈도 된다?

저는 지난 13년 동안 목회를 하면서 남에게 도움만 받았습니다. 아직 경제적으로 자립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도움만 받으면서 때론 그 도움이 힘겹고 부담스러울 때가 있었습니다. 그럴때마다 세상의 모든 돈이 하느님의 돈이니, 하느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나의 돈도 된다며 위로를 삼기도 했습니다.

윤기 엄마는 자기가 돈 벌어 먹여 살릴 테니까, 소신껏 목회를 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지금 천연염색을 배운다고 적지 않은 돈을 쓰고 있습니다. 꾹 참고 기다리려 합니다.

목사는 평생 경제적으로 미자립한 자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교인들이 드린 헌금에 의존해 있으니까요. 이런 의미에서 목사도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는 것이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농사를 짓든 나무로 숟가락이나 그릇을 만들든 빵을 만들어 팔든 자기 스스로 경제적 자립이 어느 정도는 있어야 설교가 변질되지 않습니다.

제가 빵공장을 만들어 빵을 만들려고 하는 것도 빵을 팔아 북한의 어린아이들을 돕겠다는 취지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제가 스스로 노동을 하여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는 자립을 하고자 하는 의미도 있습니다.

교인들이 낸 헌금으로 먹고 살다보니 교인들이 구미에 맞는 설교만 하게 되고 참 말씀이 증거되기가 쉽지 않습니다.

물질에 의존, '대형교회 지성전교회'가 반증

사실 한국교회는 물질적으로 철저하게 의존되어 있습니다. 돈이 없으면 교회가 될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돈으로 교회를 세우고 돈이면 교회도 되는 시대입니다. 대형교회가 체인점 식으로 전국에 소위 지성전교회를 세우는 것도 물질에 의존된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요즘 자립(自立)이라는 말을 가지고 씨름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선다'는 이 말은 사람에게 있어서 최고의 경지에 이른 말이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살아간다는 것만큼 온전한 삶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기술적으로 발전했다고 하는 현대인들일수록 자립적이고 자급자족하는 삶을 살지 못합니다. 철저하게 다른 존재에 의존해 있습니다. 컴퓨터가 없으면 살지 못하고, 자동차가 없어도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석유에 의존해 있고 주식이나 은행에 의존해 있습니다. 식량도 자급자족하지 못합니다. 어느 한 나라에서 기상이상으로 어느 한 품종을 생산하지 못하면 전 지구적인 혼란이 옵니다.

그러나 옛날은 비록 물질적으로 풍요롭지 않고 누리지 못했어도 자급자족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자기 손과 발로, 들과 산으로 가서 노동을 해 얻은 양식으로 충분했습니다. 커다란 가뭄이나 홍수가 나지 않는 한 자급자족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식량 자급률은 35% 밖에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식량 문제에 있어서는 철저한 식민지 상태인 셈입니다. 우리 농업의 최대 목표는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자기 스스로 생산해 내는 자급자족의 농업경제일 것입니다.

요즘 자살하는 이들이 참 많습니다. 일반 서민들은 물론이요 최고위층에 있는 사람들까지 자살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삶이 자립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어떤 외부적인 것에 의해 철저하게 의존적인 삶을 살다가 그것이 끊기거나 없어지면 절망하고 삶을 자포자기 하고 마는 것입니다.

기계나 물질에 의존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현대인들은 어디에도 의존하지 않고 자기 몸으로 스스로 살아가기 위해 귀농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무엇이 참다운 삶인지를 이제야 비로소 알기 때문일 것입니다. -스콧 니어링

인간 삶의 궁극적 목적은 자립입니다. 이것은 물질적인 자립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정신적인 자립까지 의미합니다. 옛 성인들은 물질적으로는 물론이요 정신적인 자립을 통하여 한결같이 자기완성을 이루려고 노력하였습니다. 하늘의 진리를 터득하여 사람 본연의 삶을 살고자 했던 것입니다. 공자가 그러하고 소크라테스나 노자가 그러했습니다.

신앙인의 궁극적 목적은 '참 자유'

우리 사람은 물질적으로는 물론이요 정신적으로 자립을 하여야 영혼이 '참 자유' 할 수 있습니다. 신앙인의 궁극적 목적도 자립입니다. 그것은 물질적 정신적 자립을 통해 영혼이 자유하는 것입니다. 어디에도 흔들리지 않고 진리 안에서 참 자유를 누리는 것입니다. 간디가 그러했고 성 프란치스코가 그러했고 마더 테레사 수녀가 그러하였습니다.

모세가 하느님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물으니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스스로 있는 자'(공동번역은 '나는 곧 나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은 어느 누구에게도 의존하여 계시지 않는 스스로 계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있으신 하느님은 완전하신 분이십니다.

기독교의 궁극적 목적도 물질적, 정신적으로 자립하여 영혼이 참 자유를 누리며 그로서 자기완성을 이루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마태복음 5장 48절의 말씀을 보면 주님께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자기 완전을 이룬 사람은 물질이나 권력이나 명예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어떤 외부적인 힘에 의존하거나 끌려가지도 않습니다. 그 사람은 참 사랑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느님의 아들은 원수를 사랑하기까지 사랑하는 사람, 자신을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참 사랑의 사람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자기를 핍박하고 박해하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야말로 어디에도 흔들리지 않은 참 사랑으로 완전에 이른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완전이란 흔들리지 않는 마음

또한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느님은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 주시는" 사랑의 하느님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기독교인에게만 사랑을 베풀어주시고, 비기독교인들에게는 사랑을 주시지 않은 분이 아니라 모든 대지에 햇빛과 비를 내려주시듯 하느님의 사랑은 모든 이들에게 베풀어집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사랑의 하느님이시요 완전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 채희동 목사. ⓒ뉴스앤조이

완전이란 높고 낮음, 많고 적음, 밖과 안에 좌우되지 않고 흔들지 않고 한결 같은 마음, 곧 사랑의 마음만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완전한 사람이란 사랑 안에 거하는 자입니다.  로마서 13장 8절을 보면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미 율법을 완성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사랑은 사람을 완전하게 합니다. 사랑은 바로 사람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신의 영역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사랑만이 그 사람을 참 사람이 되게 합니다.

자립하는 사람은 '스스로 있는 자' 곧 하느님 안에 거한 자입니다. 자립하는 자는 어디에서 의존하거나 막히거나 흔들리지 않는 진리 안에서 자유한 자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완전한 분이시기에 우리도 완전에 이루어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완성은 사랑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잊지 맙니다.

사랑은 사람이 하느님께서 속한 것 중에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사랑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자기완성을 이룰 수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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