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동안 늘 느림의 사회적 의미에 관해서 생각해 보았다. 요즘 느림이란 주제가 사회적 관심을 끌고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호기심의 차원이거나 단순한 그리움의 차원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느림은 목가적 차원이 아니다   

삶에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느림을 실천하는 사람들, 여러 가지 삶의 자리에서 자신의 방법으로 삶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느림이란 폭발력을 가진 주제가 보다 큰 힘을 가지려면, 어느 정도 체계화가 되고 사회변혁의 기본적인 방법론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느림이란 참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앞만 보고 달려가던 우리들에게, 잠시 멈추어서 주변을 둘러보고 생각을 하게 만들어 주기도 한다. 느림은 삶에는 또 다른 형식으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기도 한다. 그리고 때로 문득, 혹시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삶의 형태를 다른 방식으로 조직할 수는 없는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렇게 생각해 보면 '느림'이란 단순히 목가적 차원의 의미를 벗어나서 굉장한 폭발력을 가진 사회변혁의 힘이 될 수 있다. 또한 느림은 반드시 현대사회를 주도하고 있는 '빠름'의 문화를 뒤엎을 수 있는 변혁운동의 중심점이 되어야 한다. 모든 시대에는 그 시대가 필요로 하는 변화에 대한 요청이 있기 마련이다.

우리가 사는 시대. 효율과 비교우위, 경쟁력을 강조하는 시대의 주도적 이데올로기는 '빠름'이다. 이 시대를 주도하고 있는 이 강력한 이데올로기에 대해, 효율적으로 이의를 제기하는 대항 이데올로기는 아직 출현하지 않은 듯하다. 나는 '느림'이야말로 '빠름'에 대해 가장 효율적인 대항논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너무 빨라서 경제가 무너진다

오늘날 빠름은 여러 가지 형태로 우리 주위에 포진하고 있으며,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다.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린 것은 '동방정책'의 결과라기보다는, 서독의 경제흐름이 더욱 빨랐고 그래서 더욱 효율적으로 많은 산물을 만들어 내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강력한 블록을 이루어 세계를 양분하고 있던 러시아를 무너뜨린 것도 이념의 실패라기보다는 그 이념이 만들어 낸 경제의 효율성, 즉 빠름의 속도가 더 느렸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오늘날 빠름은 그렇게 국가와 체제를 무너뜨리고, 마음만 먹으면 취약한 국가 한둘쯤의 경제를 망가뜨리는 것은 쉽게 할 수 있다.

그 빠름은 자신의 빠름의 속도를 더욱 거침없이 강화하기 위하여 '경쟁력 최우선의 원칙', '사람의 가치 높이기', '시장 최우선 주의'등 그때그때의 상황에서 자신의 목표를 관철하기에 가장 적절한 구호를 내세우며 자신의 모습을 바꾸어간다. 오늘날 빠름은 '신자유주의'라는 모습으로 우리에게 자신의 모습을 나타나고 있다. 느림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왜 신자유주의를 들먹이는가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조금만 자세히 생각해 보라. 신자유주의가 주장하는 그 모든 경제원칙들이 결국은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더욱 더 빨라져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는 것을 금새 알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느림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느릿느릿 달팽이처럼 오늘 하루를 살아가며 삶이 우리에게 허락한 모든 순간들을 사랑하며 살고 싶어 한다. 그러나 나는 또한 언제나 모든 것을 사회적인 차원에서 바라보는 시각을 함께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빠름'을 향해 도전하는 것이고 감히 빠름과의 싸움을 걸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또한 한 가지 발칙한 주장을 하는 것이다.

바로 진정으로 느림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신자유주의와 싸워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들을 빠르게 사는 삶으로 몰아가고 사회 전체가 빠름에 미쳐가게 만드는 '빠름'의 하수인인 신자유주의와 정면대결을 하지 않고서는 결코 우리가 '빠름'이라는 이름의 아우슈비츠를 향한 행렬에서 빠져 나올 수가 없기 때문이다.

혼자서 느린 삶이 아닌 여럿이 함께 느린 삶

혼자서 은거하는 생활을 할 수는 있다. 몇 명의 사람들이 모여서 세상의 빠름을 비웃으며 살아 갈수는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그 자신은 느린 삶을 살 수 있을지 몰라도, 결코 세상을 장악하는 빠름을 이길 수는 없다. 그는 빠름을 이긴 것이 아니라 그저 빠름을 피해 숨어버린 것일 뿐이다. 이 즈음에서 눈치 빠른 사람들은 이런 비판을 제기할 것이다.

오늘날의 세상을 장악하고 있는 너무나도 강력한 힘인 '빠름' 혹은 신자유주의를 이기려는 노력이 성공하기도 어렵겠지만, 그러한 것을 이기려는 노력을 하기 위해서는 ‘반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의 또 다른 종류의 빠름의 노예가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정확한 지적이다. 빠름을 이기기 위해서는 아마도 빠름에 뒤지지 않는 속도의 대응이 필요할 것이다. 혹자는 다른 방법의 싸움이 보다 효율적이라 주장할 것이다. 예전에 간디가 물레질을 하거나 바닷물을 손으로 말려 소금을 만드는 방법으로 영국을 이긴 것 같이, 마틴 루터 킹이 비폭력을 호소하며 미국흑인들의 인권을 신장시킨 것과 같이. 빠름과 싸우기 위해서는 미련하고 느린 방식의 싸움이 빠름의 방식보다 더 효율적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간디나 마틴 루터 킹의 투쟁들은 다시 살펴보면 그들은 투쟁의 대상과 직접 싸운 것이 아니다. 그들은 단지 세상의 여론을 환기함으로써 대상에게 압박을 가한 것일 뿐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싸워야 할 대상인 빠름은, 이미 전 세계를 점령하고 온 세상에 퍼져 있다.

우리가 빠름을 이기기 위해서 해야 할 것은 우리들의 삶의 방법을 바꾸는 것이다. 그리고 바꾸되 자신 혼자서 조용히 느린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의 비슷한 사람들과 느림의 중요성에 대해 교류해야 한다. 그래서 어떻게 우리가 함께 느린 삶을 영위하면서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함께 의논하고 함께 노력해 나가야 하는 것이다. 오늘의 빠름은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 세계적인 현상이다. 때문에 세계와 교류를 하지 않으면 살아가지 않을 수 없는 우리로서는, 단지 한두 사람만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다른 삶의 방식을 택하려면 세계와 교감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세상을 잘 모르고 미련하지만 나도 안다. 세상은 만만하지 않고, 끊임없는 투쟁이 벌어지는 장소라는 것을. 세상에는 강자의 빈자에 대한 수탈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조그만 것을 두고 싸우는 빈자와 빈자와의 싸움 또한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지금 우리가 사는 삶이야말로 세상에서도 가장 빠른 삶 중의 하나이고, 그러기에 느림으로 전환을 하면 가장 큰 타격을 받는 대상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느린 삶이 가득히 퍼져있는 사회를 꿈꾸기를 멈추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는 영원히 꿈꾸기를 멈추지 않는 꿈이고, 그런 사회는 참 어렵기는 하지만 가능할 수 있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느림은 단순한 삶의 조그만 변화가 아니라 삶의 방식의 혁명이다. 조그만 생활혁명이기도 하지만 일단 느린 삶을 시작하고 보면 우리가 그토록 열심히 살아왔던 빠른 삶이란 것만이 결코 유일한 삶의 방법이 아니란 것을 깨닫게 되는 의식의 혁명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작은 삶 하나하나가 전염되고 또 전염되어 온 사회를 느리게 물들일 때. 우리는 세상을 바꾸는 동인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오늘 그런 꿈을 꾸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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