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차를 따라가다 밀려 횡단보도에서 차가 멈추게 되어도 범칙금을 물어야한다는 교통법이 보행자를 위해 세워졌다. 운전을 하며 제일 당황 되는 것은 신호등에서 차가 밀려 좀 기다려 주면 뒤차가 빵빵거릴 때다. 앞으로 갈수도 없고 가만있자니 뒤통수에서 난리가 난다.

횡단보도에서 건너는 사람을 기다려 주려고 서행을 하거나 멈추게 되면 어느새 뒤차가 앞지르기를 해 오히려 내가 위험을 유발하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영국에서 운전을 배워 안전이 제일우선이었는데 이제는 제법(?) 약삭빠르게 운전하는데 익숙하다. 어쩌다 횡단보도에 멈추었더라도 미안한 마음도 덜하고 당연한 것처럼 여겨진다.

우리는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TV, 신문, 컴퓨터, 영화, 광고, 등 이미지와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살아간다. 그리고 아무리 '느림'을 강조해도 일상은 빠르다. 삶에 밀려가다 보면 머리는 "정신을 차려야지"하고 다짐하지만 몸은 가속도에 밀려가고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우리의 신앙도 그저 밀려가듯 잘못된 습관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개인이나, 한 공동체가 좋은 습관을 지녔을 경우 그것을 지켜야 하겠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그것에서 벗어나야 한다.

교회 안을 들여다보면, 개신교가 유대교와 세 가톨릭의 형식을 무분별하게 따라 가는 것이 많다. 목회자와 평신도의 차별화, 기도의 형식화, 예배의 의식화, 신앙생활의 율법화 등이 그것이다. 또한 강대상을 구약의 제사 드리는 제단으로 여겨 권위적으로 높게 하거나 거룩함(?)을 부여하려 한다. 제사는 예수께서 자신을 단번에 십자가에서 드림으로 완전한 속죄 제사가 드려졌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주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종교개혁의 근본정신은 의식 중심이 아니고 말씀중심이라는 사실을 잊지말아야한다. 신앙의 습관이 선배들과 다른 사람들이 하니까 의미도 모른 채 그냥 답습하기 때문이라면 점검해야 한다. 중세 교회 건물 구조가 멋있어 보이고, 성도들을 압도하기 때문에 교회 외형에 의존하면 권위주위나 물질숭배에서 비롯된 것이다.

▲ 방인성 목사. ⓒ뉴스앤조이 신철민

이솝 우화에 나오는 이야기에 토끼가 야자나무 밑에서 낮잠을 자는데 갑자기 야자열매가 나무에서 떨어지는 요란스런 소리가 났다. 토끼는 소스라치게 놀라 깨어나 영문도 알아보지 않고 세상에 종말이 왔나보다 하고 도망쳤다. 토끼가 목숨을 걸고 달리는 것을 보고 여우도 달리고, 사슴과 원숭이도 뒤따르기 시작했다.

이렇게 온 산의 동물들은 토끼를 뒤따라 죽을힘을 다해 달렸다. 한참을 달리다, 한 짐승이 무슨 일이냐고 묻자 짐승들은 저마다 앞에 짐승이 달리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아무도 왜 달리는지 알지 못하고 무작정 따라갔던 것이다.

우리는 지금 누구를 따라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 예수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신앙인이라면 잠시 가던 걸음 멈추고 한 번 생각해 보자. 무조건적인 꼬리물기식의 따라가는 건 더 이상은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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