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숲에 들어가 자연을 통해 숲의 음성을 들으려면 침묵하는 것이 좋다. ⓒ박철
세상에 나와 늘 제자리에 맴도는 우리들의 생은 어쩌면 한그루의 꽃나무에 불과했다. 꽃잎이 떨어지는 아픔까지 감수하면서 늘 그리운 쪽으로 손을 뻗어보지만 우리들이 질 수 있는 것들이란 언제나 한 줌의 햇빛 한 줌의 허무일 뿐 정작 목마르게 그리운 것들은 우리들 손가락 사이로 모래처럼 흘러내린다.

하지만 좀처럼 버릴 수 없는 건 절망보다 끈질긴 미련이라서 무언가 알 수 없는 대상을 향해 또다시 손을 내 밀어보지만 손을 내민 그 거리만큼 우리들의 존재는 시들어 간다. 그때마다 우리가 흘린 눈물은 소리 없이 증발하여 구름의 몸으로 태어나지만 구름이 슬픔을 채집하기 위해 꽃나무 숲 위를 배회하는 건 아니다.

한 번 상처받은 사람들이 영원히 지상의 사랑을 저버리듯 목이 타는 갈증 앞에서도 두 번 다시 손을 내밀지 않는 자들의 가슴을 탈지면처럼 하얗게 감싸주기 위해 구름은 꽃나무 사이로 난 길을 오늘도 그처럼 서성거리는 것이다.

교동 섬에 들어온 지가 7년째이다. 횟수가 중요한 건 아니다. 사람이 어디서 살던지, 자기가 사는 터에서 삶의 의미를 깨닫고 신의 음성을 들으며 살아야 한다. 내가 이 자리에 얼마나 오래 머물렀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왜 이 시간 이 자리에 있는가를 스스로 캐물어야 한다.

▲ 숲 속에 들어가 있으면 가장 솔직한 기도를 할 수 있다. ⓒ박철

또한 나는 이 자리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거듭 확인해야 한다. 그리고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스스로 다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디에 있든지 마찬가지이다. 시간과 공간과 인간이 마주치는 삼간(三間)의 접점에 왜 내가 존재하는가를 끊임없이 묻지 않고서는 나는 확인되지 않는다. 7년 전 교동에 이사 와서 교회주보 귀퉁이에 이사 온 소감을 간단하게 적었다.

"지금부터 11년 전, 강원도 정선에서 목회 첫발을 내딛으면서 서리 전도사로 파송을 받아 첫날밤을 지내고, 새벽기도회 시간이 되어 새벽종을 울리기 위해 나왔는데 간밤에 함박눈이 소복이 쌓였고, 달밤 온 산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저는 너무나 감읍(感泣)하여 종탑 앞에 눈밭 위에 오체투지(五體投地)를 하고 펑펑 울었습니다. ‘아 여기서 살아야 하겠구나?’ 그때 왜 눈물이 쏟아졌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중략)

교동에 와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이곳으로 오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하느님이 이곳으로 보내주셨습니다. 하느님이 앞으로 이 부족한 사람을 어떻게 사용할지 모르지만, 적어도 일신상의 작은 변화나, 대수롭지 않은 일로 삐쳐서 이곳을 떠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마라토너의 심정으로 살겠습니다. 마라토너처럼 오버페이스를 하지 않고 은근하게 달아올라 진리를 향하여, 삶의 참된 가치를 향하여 달려가겠습니다. 바람을 타고 윙윙거리는 대남방송 사이로 뻐꾸기 울음소리가 간간히 들리고 있습니다. 조용한 아침입니다."

내가 가장 자주 가는 곳은 교동에 있는 산이다. 야트막한 산이다. 숲이라고 해도 좋다. 산속 나무숲에 들어가 있으면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고프지 않다. 숲 속에 나를 맡기면 덕지덕지 달라붙어 있는 세속의 모든 욕망이 사라진다. 숲 속에 들어가 있으면 가장 솔직한 기도를 할 수 있다. 그리고 자연을 통하여 자신의 내면의 실체를 거울 들여다 볼 수 있듯이 볼 수 있다.

그래서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선각자들이 산으로 들어갔는가 보다. 숲에 들어가 자연을 통해 숲의 음성을 들으려면 침묵하는 것이 좋다. 마음의 평화가 찾아오고 욕망의 모든 찌꺼기가 내 속에서 떨어져 나가면, 자연의 소리, 물이 흐르는 소리, 들꽃들의 인사소리를 듣는다.

▲ 숲의 계절은 여름으로 들어서 있다. ⓒ박철
'노영희'라는 시인이 있었다. 그는 80년대 민주화 운동을 하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운동이란 것이 끝내 허무와 환멸을 그에게 안겨다 주었다. 그 뒤로 사람 만나는 것을 포기하고 혼자 운둔하며 살았다. 일주일에 두 번 가량 산을 오르면 혼자 생각에 잠겼다. 3년쯤 된 어느 날, 그는 너무 놀라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분명 말을 건 것은 꽃이었다. 그때의 희열을 그는 잊을 수 없었다고 한다.

'성 프란치스코'는 새와 대화를 했다. 나는 처음에는 그 이야기를 듣고 그냥 혼자 소리거니 했다. 그러나 아니다. 실제적인 대화이다. 우리는 노력만 하면 얼마든지 다른 피조물과 대화를 나눌 수 있다. 인간의 내면에 덮어져 있는 더러운 것들을 제하여 버린다면 이 자연은 바로 하느님의 모습이며 우리들의 친구이다.

그것은 새로운 생명의 세계이다. 그 깨달음은 바로 신비이며 경외감이다. 이 깨달음을 얻지 못하게 하는 것이 바로 내 속의 죄(罪)이며, 세속적인 욕심이다. 세상적인 지식들이 우리를 덮어씌우면 우리는 장님이 되고 만다.

지금 우리는 말과 글의 포화상태에서 살아간다. 짐짓 나의 글과 말이 또 하나의 공해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나는 산과 바다와 사람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한 사람의 자연인이다. 아직 깊은 깨달음이나 영성(靈性)의 깊은 세계에 이르지 못했다.

다만, 내가 가야 할 길을 자연을 통해 배운다. 모름지기 자연은 삶의 교과서이다. 나는 산과 숲에서 영감을 받는다. 나무 한 그루, 돌멩이 하나에서도 하느님의 생명의 신비와 숨결을 느낀다. 망종(芒種)이 며칠 남지 않았다. 모내기를 마친 논마다 여린 모들이 세상 구경을 나온 것처럼 인사를 하고, 물이 그득한 논에는 햇빛에 반사된 산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계절은 여름으로 들어섰다.

나 홀로 걷는 그 숲에 당신이 왔습니다.
어린 참나무 잎이 지기 전에
그대가 와서 반짝이는 이슬을 텁니다.
그대에게 닿을 것만 같은
아슬아슬한 마음의
가장자리에서 이슬이 반짝 떨어집니다.
산다는 것이나 사랑한다는 일이나
그러한 것들이 때로는 낯설다며
돌아다보면 이슬처럼 반짝 떨어지는
내 슬픈 물음이 그대 환한 손등에 젖습니다.
사랑합니다. 숲은 끝이 없고
인생도 사랑도 그러합니다.
그 숲 그 숲에 당신이 문득
나를 깨우는 이슬로 왔습니다.
(김용택. 그 숲에 당신이 왔습니다)

(이 글은 2003년 여행스케치 7월호에 실렸던 글을 재 송고해 온 글입니다.)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