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가 다르게 날이 푹하다. 어제 개나리가 오늘은 장미로 옷을 갈아입는다. 활짝 핀 장미 골목이 눈부시다. 산에 올라 연둣빛과 초록빛이 빚어내는 화려한 마술에 동참하면 그만인 계절이다. 이제 슬슬 여름이 올 것이다. 긴 바지와 긴 팔 옷이 점점 짧아지기 시작하는 아들놈의 의상에 이미 여름은 왔다.

물총을 난사하며 기분이 좋은 그 놈의 호방한 웃음에도 이미 여름은 있다. 찰나에 봄을 벗어버린 계절이 마냥 신기해 어리둥절해진다. 그러나 벌써 달력은 5월의 끝자락을 넘어 이제 6월로 넘어가려 한다.

도시의 여름은 특별하다. 아스팔트가 뿜어 올리는 아지랑이도 특별하고, 버스며 승용차가 토해내는 뜨거운 배기가스도 특별하다. 이제는 죽은 말이지만, '불쾌지수(不快指數)'가 높아지는 도시의 여름은 특별하다.

그러나 이런 특별함 말고도 도시의 여름을 특별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 있다. 바로 교회의 여름 행사들이다. 연고가 있는 어린이 선교 단체는 벌써부터 부산하다. 아이들 율동을 준비하며, 성경학교 찬양들을 만들기 시작하는 일꾼들의 사역이 밤 깊도록 끝날 줄 모른다. 대도시 전역을 순회하는 교사강습회는 막바지 준비가 한창이다.

'함께가는생명공동체' 역시 매년 여름 가족캠프를 떠난다. '가족캠프'라는 말은 '전교인가족수련회'라는 말 대신에 사용된다. 장애아들과 함께 하는 가족수련회이기에 장애인을 고의로 배제한 여타의 전교인가족수련회와는 다를 수밖에 없고, 실제 다른 것을 지향한다.

세대든 장애든 통합을 염두에 두면서 일의 구상이 시작된다. 우리 상황(context)이란 자궁에서 잉태되고 탄생한 열매야말로 우리 것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맞는 '전교인가족수련회'를 구상하고 그 구상에 부합한 실천이야말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지고(至高)의 선(善)임을 믿는다.

캠프를 위해 강화도로 답사를 다녀왔다. 뜻하지 않았던 수확이 있었다. 바로 '흙벽돌 생태 어린이집'과의 만남이었다. 물론 동행한 이웃사랑교회 목사님의 추천이 있었지만, 예기치 않은 만남에 기대 이상의 소득이었다. 이곳을 운영하는 사람은 1970년 후반에 총신대학교 근처 달동네에서 빈민탁아활동을 하고, 지금은 감리교 목사의 아내로 살고 있다.

이 분의 생태적 삶이 도시의 소비 순환에 길들어 사는 우리들에게 큰 울림을 주었다. 흙벽돌을 쌓아 올린 어린이집에 자연을 닮은 아이들이 생명과 호흡하는 곳이었다.

흙벽돌 생태 어린이집은 나에게 특별한 공명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 공명은 단순히 자연과 더불어 사는 이상적인 살림살이에 대한 막연한 동경 때문만이 아니다. 그보다는 장애와 비장애 통합 문제의 종착점이 '생명 중심의 공동체'임을 믿기 때문이다.

자신의 장애를 극복하고 비장애인 중심의 사회에 안착하는 것이 우리 사회 장애인들의 유일하다시피 한 바람이나 이런 흐름은 장애인들이나 그들의 보호자들이 품고 있는 막연한 철부지 '엘리티즘(elitism)'의 변종일 뿐이다.

진정한 능력은 장애인을 비장애인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허물없이 함께 사는 데 있다. 함께 살 각오를 하지 않으면서 함께가는공동체를 운운하는 것은 모순이다.

나는 '함께가는생명공동체'의 오래된 미래를 흙벽돌 생태 어린이집에서 발견한다. 산과 새와 흙과 물, 바람과 바위와 나무와 꽃들은 제각기 아름다울 뿐이다. 장애가 있는 자연은 그 장애가 깊을수록 더 아름다운 자연일 뿐이다. 사람도 하나님의 자연이니 서로가 어울려 아름다운 자연이 될 수 있지 않겠는가!

이번 캠프는 '함께가는생명공동체'의 푸른 비전이 강화도 푸른 땅 속 깊은 곳에 굳세게 심기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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