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들이 한자리에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었다. 주님 주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나라를 되찾아 주실 때가 바로 지금입니까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때나 시기는 아버지께서 아버지의 권한으로 정하신 것이니 너희가 알 바가 아니다. 그러나 성령이 너희에게 내리시면 너희는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에서 그리고 마침내 땅 끝에까지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 이 말씀을 하신 뒤에 주께서 그들이 보는 앞에서 들려 올라가시니 구름에 싸여서 보이지 않게 되었다(행1: 6-9). 

갑돌이가 길을 가다가 벼락을 맞았습니다. 갑돌이는 왜 벼락을 맞았을까요? 이에 대한 해석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부류의 해석은 자연 현상과 인간의 행사를 연결지어 설명하는 것입니다. 갑돌이가 평소에 알게 모르게 죄를 많이 지어서 하늘의 노여움을 샀기에 그 날 천벌을 받은 것이라는 해석이 가능합니다. 자연 현상의 이면에는 어떤 의지(섭리)가 담겨 있다는 시각입니다. 이러한 해석은 인간이 겪게 되는 모든 사건에 나름대로 어떤 의미가 숨겨져 있다는 전제를 깔고 있습니다.

두 번째 부류의 해석은 갑돌이가 재수가 없어서 그런 일을 당한 것이라는 견해입니다. 갑돌이는 단지 그 시간에 그곳을 지나갔기 때문에 그런 일을 당했다는 시각입니다. 갑돌이가 평소에 어떤 행동을 했는가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다만 갑돌이가 그 시간에 그 곳을 지나갔다는 것이 문제일 뿐입니다. 자연 현상은 나름대로의 법칙에 의해 발생하는 법인데, 그 날 그 곳에 벼락이 치게끔 이미 여러 조건이 조성되어 있었습니다. 갑돌이로서는 그 시간에  맞춰 그 곳을 지나간 것 외에는 다른 어떤 잘못도 없습니다. 설령 죄 많은 갑돌이 대신에 만인의 추앙을 받는 성자가 그 곳을 지나갔더라도 마찬가지 일이 벌어졌을 것입니다. 오늘날 과학이 견지하는 입장은 후자입니다. 자연현상은 인간의 행사와 무관하게 움직인다는 전제하에 자연의 법칙을 찾으려는 시도가 과학이 하는 작업입니다.

신앙을 가진 자의 눈에는 자연 현상이 인간의 행사와 전혀 무관해 보이지는 않습니다. 자연의 움직임은 자연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의중에 따를 수밖에 없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갑돌이는 지은 죄가 많아 심판을 받은 것일까요? 꼭 그렇다고도 할 수 없습니다.  설령 벼락을 맞은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믿더라도 그렇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결코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심판의 권한은 오로지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고사 성어 중에 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 것이 있습니다. 인생의 길흉화복은 변화가 많아서 예측하기가 어렵다는 의미로 통용되고 있는 말입니다. 이 말에 얽힌 고사는 이렇습니다. 옛날 중국 변방에 새옹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기르던 말이 어느 날 국경을 넘어 오랑캐 땅으로 달아났습니다. 이를 보고 사람들은 귀한 말을 잃어버려 안 되었다며 그 노인을 위로하였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달아났던 말이 준마를 한 필 끌고 돌아왔습니다. 그 바람에 노인은 잃었던 말도 찾고 새로이 훌륭한 말을 하나 더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이번에는 그 노인은 복도 많다고 목청을 높이며 부러워했습니다. 그러기도 잠시 어느 날 그 노인의 아들이 새로이 얻은 준마를 타고 놀다가 그만 말에서 떨어져 다리가 부러지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공짜로 얻은 그 말이 불행을 가져 왔다며 혀를 끌끌 찼습니다. 그런데 얼마 안 있다가 전쟁이 터지고 마을의 젊은이들은 전부 전쟁터로 징발되어 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노인의 아들만은 다리를 다친 덕에 전쟁에 끌려가지 않게 되어 죽음을 면했다는 얘기입니다.

식견이 좁고 유한한 인간의 눈에는 불행으로 보이던 일이 나중에는 복으로 뒤바뀌고, 또 복이라 여겼던 일이 후에 재난을 가져오는 일이 비일비재한 게 인생입니다. 백년도 채 살지 못하는 인간, 한치 앞도 알지 못하는 인간, 내 배속으로 낳은 자식의 생각도 제대로 가늠하지 못하는 인간, 이런 인간이 판단하는 인생의 가치가 과연 얼마나 의미 있는 판단이 될 지 사실 의심스럽기 그지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끝없이 인생의 가치를 매기며 나름대로 인간의 삶을 심판하는데 익숙해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명심할 바는 우리가 겪는 재해나 행운이 하나님의 심판인지의 여부는 우리가 알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심판의 권한은 오로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예수의 부활이 제자들에게는 기사회생의 사건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 못 박혀 죽으신 후에 모든 것이 무너지고 끝난 줄 알았습니다. 더 이상의 희망은 없어 보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에 예수께서 다시 나타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를 확인한 제자들은 자신들이 절망 속에 빠져 있지 않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동안 자신들이 받았던 수모를 이제 되돌려 줄 수 있으리라는 기대도 들었을 것입니다. 예수를 핍박하고 정죄하던 무리들을 이제 소탕하고 심판할 때가 이르렀다는 생각을 할 만도 합니다. 이제 다시 예루살렘을 입성하며 군중들의 환호를 받았던 지난 시간의 영화가 되살아나고, 도도하던 유대 종교지도자들을 로마의 군인들을 심판할 때가 왔다고 믿었을 것입니다. 그들의 가슴은 벅차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심판의 시기는 너희의 알 바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때는 하나님의 권한으로 정한 것이니 너희와는 상관없는 일이라며 분명하게 선을 긋습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던 그들이 번갯불에 맞아 죽고, 몹쓸 병에 걸려 신음하고, 가업이 망해 재산을 다 날려 버리게 된다면, 그들에게 심판이 임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들이 오히려 승승장구하며 권력과 부를 누리고 자손들마저 더욱 번성하게 된다면, 그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이미 면했고 오히려 복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사람들은 그리 말할 지 모르나 예수께서는 아니라고 하실 것입니다. 심판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인간의 입으로 이렇게 저렇게 속단할 바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심판의 시기나 때는 하나님의 권한에 속한 바입니다. 심판의 여부는 인간이 말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우리는 심판이라 단언할 수 없습니다. 성공과 실패의 판단은 온전히 하나님의 영역에 속한 일입니다. 삶의 성공과 실패를 인간의 입으로 아무리 평가하고 논의해도 다 소용없는 짓입니다. 인간의 평가는 인간의 권한 남용에 불과합니다. 자신의 처지를 망각하고 행하는 주제넘은 판단일 뿐입니다.

원수처럼 여기는 사람에게 닥친 재난을 보며 하나님의 심판이 임했다고 말하는 이들이 간혹 있습니다. 아주 두려운 일입니다. 하나님의 권한을 넘보는 행위이기에 그렇습니다. 그 일이 하나님의 심판인지 복인지를 우리는 알 수가 없습니다. 감히 단정해서도 안됩니다. 우리의 권한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얻어 땅끝까지 내 증인이 되라."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마지막 가르침입니다. 세상을 심판하는 일은 우리의 몫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몫은 증인으로서의 삶입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서 살아 내신 삶을 입으로 증거하고 세상에 알리는 것입니다. 입으로 알릴 뿐만 아니라 우리가 몸소 삶으로 재현(증거)하여 예수의 삶이 지속적으로 이 땅에 살아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예수의 제자된 우리는 예수께서 하신 대로, 병든 자를 고치고 굶주리는 자에게 먹을 것을 주고 억눌린 자에게 자유를 주고 고통 속에 신음하는 자와 함께 고통을 나눌 뿐입니다. 여리고로 가던 길에서 사마리아인이 강도 만난 유대인(원수)을 이웃처럼 보살피고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자기 것을 나누어주었듯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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