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가 점점 탈정치화되고 탈역사화 하면서 역동성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뉴스앤조이 신철민
요즘 미군들의 이라크 포로 학대에 관한 기사로 연일 시끄럽다. 아무리 자백을 위한 것이라 하지만 놀이 삼아 웃으면서 벌이는 그들의 야만스런 행동에서 매스꺼움과 함께 분노마저 일어난다. 이게 어디 사람이 할 짓인가 심히 의심스럽기까지 하다.

우리가 미군들이 저지른 포로 학대에 다소 민감하게 반응하는 소이도 우리 땅에 미군이 여전히 주인 행세하면서 진주하고 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또한 일제시대에는 일본군인에 의해, 군부독재 시대에는 보안법에 의해 숱한 고문이 일어났다. 우리 민족의 역사는 고문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50년 넘게 주둔하고 있는 주한미군들의 범죄를 기억할 땐 더욱 몸서리쳐진다. 미군들이 진주한 곳에는 늘 이런 문제들이 뒤따랐다. 2002년 효순이 미선이 사건 때도 그랬고, 윤금이 씨가 미군에 의해 잔혹하게 살해당할 때도 그들의 웃음 띤 표정을 우리들은 약자로서 그저 바라봐야 했다. 어디 이뿐이랴! 그 동안 그들이 한반도에서 자행한 범죄들이….

이라크 포로 고문 속에서 우리 땅에서 저지른 그들의 범죄가 겹쳐 보이는 것은 나만의 착각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이라크민들에 대한 미군의 태도에서 어떤 역사적 교훈도 찾지 못하고 있다. 우국지사를 자칭하는 대형교회 몇몇 목사님들은 국경일만 되면 시청 앞에서 성도들을 동원해 '미국 없인 못 산다'며 성조기를 높이 휘날린다. 우리 앞에서 미군들에 의해 처참하게 죽어 간 꽃다운 젊은이들의 신음소리는 외면한 채 말이다.

필자도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어 주어야 했지만, 결국 외면한 채 자기 살길로만 걸었던 유대 종교지도자들 중의 하나로 살아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자괴감이 없지 않다. 교회와 주님을 믿는 모든 기독인들은 강도 만난 사람을 극진히 보살펴 주었던 사마리아인이 되어야 하며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지대한 관심을 가져야 할진데, 그런 모습은 간 데 없다.

얼마 전 우리 교회가 소속된 교단 노회에 참석했다. 노회 회기 도중 군선교 지원에 관해 담당목사님의 보고가 있었는데 중요 골자는 이런 것이었다. 금년 예산 중 대부분을 이라크 파병을 위해 지원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한 목사님이 반론을 제기하며 '군선교 지원은 군선교를 하는 목사님의 고민들을 경청하여 실질적으로 사용될 수 있도록 재조정하자'고 했지만 그 의견은 그 자리에서 제지당하고 말았다. 이런 현실은 우리 교단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우리는 왜 개신교 성장이 멈췄는지 진지하게 물어야 한다. 왜 교회 안에 젊은이들이 사라지고 교회 성장이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는가? 비상식적인 의견과 판단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위장하여 둔갑시키는 일 때문이지 않은가! 뿐만 아니라 왜 교회가 점점 더 탈정치화 되고 또 탈역사화 되어 역동성을 잃어버렸는지, 세상을 변혁시키기는커녕 세상 법칙의 먹이로 전락하고 있는지 뼈저리게 반성해야 한다.

이라크 땅에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이라크인들이 간절히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천착 없이 막무가내식 이라크 파병에 교회 전체가 부화뇌동하는 것은, 그리고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 바친 헌금까지 지원해야 한다는 것은 도무지 하나님의 말씀에도 세상 이치에도 닿지 않는 몰지각한 행동일 뿐이다.

예수님의 몸된 교회는 세상이 흘리는 눈물을 닦아주어야 하며 세상을 구원해야 한다. 아직 늦지 않았다.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 하신 예수님 말씀을 귀로만 들을 뿐 아니라 실제 행해야 할 것이다. 함께가는공동체교회는 이 땅의 수다한 교회가 이 문제를 잘 풀고 올바른 해답을 내기를 하나님께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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