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안에 이혼하는 교인들이 늘고 있다. 그러나 교회는 이에 대해 쉬쉬한다. 혹시나 교회에 부정적 영향이 있지 않을까, 교인이 상처를 받고 떠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목회자들도 교인들 가정사에 개입하는 것을 꺼리게 된다.

내일을여는집 가정폭력상담소에 들어오는 가정폭력과 이혼에 관련된 상담이 매월 150건이 넘는다. 폭력을 피해 함께 살고 있는 여성들이 평균 10여 명에 이른다. 그들이 당한 폭력의 내용도 끔찍하고 안타까운 것이 너무 많다.

베트남에서 70넘은 노인에게 팔려온 '상아'

한 번은 베트남 여성이 쫓기듯 찾아 왔다. 맹수 앞에서 떨고 있는 사슴처럼, 그 여성은 온몸을 바르르 떨고 있었다. 몸을 웅크리고 한 쪽으로 비켜 선 채 쳐다보는 눈빛이 너무 가엾다. 상담을 시작했지만 한국말이라고는 '여보' 한마디만 할 줄 안다. 더 이상 상담이 불가능해 일단 병원으로 보내 진찰을 받게 했다. 예상대로 심각한 상태였다. 두개골이 두 곳이나 깨졌고 발목은 부러진 상태였다.

'상아'라는 이름의 이 여인은 베트남 농촌에서 집안일을 돕다가 가족을 위해 500만원 정도를 받고 71살 먹은 한국인과 결혼해 한국에 온 지 3개월 된 분이었다. 팔려 온 셈이다. 나이가 무려 40년 차가 났다. 한국인 남편은 상아를 노예 부리듯 했다. 언어가 다르기 때문에 상아 입장에서는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이 당연했지만, 말귀를 알아듣지 못한다며 때리기 시작했다. 빗자루로 머리를 때렸고 심지어 가위를 들고 발가락을 자른다고 위협했다.

상아는 따뜻하게 대해주는 우리 교우들이 너무 감사했다. 한국말을 하지 못하니까 늘 두 손을 합장하고 감사 표시를 했다. 우리 교우들은 한국인의 위장결혼과 폭력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상아에게 더욱 잘해 주었다.

가정폭력상담소는 이 사건의 죄질이 나빠 상담보다 처벌을 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비록 일흔이 넘은 노인이었지만 구속한 후 협상을 시작했다. 모든 교우들의 기도와 더불어 상아는 보상금을 받았고 이혼 후 강제귀국의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상아는 하나님에 대해 배우기 시작했고 교우들과 더불어 신앙생활을 했다. 몸이 빠르게 회복되었고 마침내 취업하여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뉴스앤조이

별 다른 이유 없이 이혼하는 사람들

한 번은 한부모가족들만 그 자녀들과 함께 초청하여 식사했다. 혹시 교우들과 신앙생활하면서 상대적으로 좀 위축되는 것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기 때문에 마련한 자리였다. 아니나 다를까 남편과 사별했거나 이혼한 가정들만 모이니깐 처음에는 좀 서먹서먹했지만 시간이 무르익으면서 흥겹고 자유롭게 그동안 쌓인 이야기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노숙인 쉼터를 통해 교회에 정착한 창규 엄마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일을여는집을 통해 해인교회에 처음 참석했을 때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는 것이다. 아이들 둘을 데리고 남편의 폭력을 피해 집을 나와 갈 데가 없는 상황에서 내일을여는집을 통해 교회를 알게 되었고, 교회에서 소리 질러가며 울부짖다 보니 이곳이 쉴 곳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나중에는 이 모든 과정이 하나님의 도우심이었다는 믿음도 생기게 되었다. 다만 아이들이 아버지를 찾을 때가 제일 힘들고 부부가 온전하게 있는 가정을 볼 때, 자신이 최선을 다하지 못한 것처럼 느껴질 때 가장 괴롭다는 것이다.

한부모가정에 대한 사역이 어느 정도 되었을 때의 일이다. 나는 전혀 뜻하지 않은 곳에서 또 다른 시련을 겪게 되었다. 교회에서 총망 받던 젊은 부부집사 가정의 이혼이었다. 너무 충격적이었다. 이 부부는 두 사람 모두 유능했고 성격도 원만해서 좀처럼 다투지도 않아 젊은 청년들에게 인기가 '짱'이었다.

이혼의 사유도 특별한 것이 없다. 지금까지 서로의 인생을 존중해서 여성도 사회생활을 잘 하는 것이 옳다고 믿고 살았는데, 지나고 보니 그런 생활이 별로라는 것이다. 그리고 마음이 떠났으니 정을 끊으려면 폭력적으로 끊어야 한다며 일체 만나 주지 않는 것이었다. 대화를 포기한 것이다.

최근에 경제적으로도 이미 부도가 난 상태라 분할할 재산도 없었고 자녀에 대해서는 원하는 대로 할 테니 알아서 하라는 것이었다. 자녀를 생각해서 그래도 다시 한 번 생각해야 하지 않겠냐고 했지만 그건 자녀의 몫이라며 그럴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고 답했다.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었다. 평상시 나보다 더 부부에 대한 이해가 반듯했던 부부였기에 그들이 이혼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목사도 이혼합니다

이혼이라는 사건은 이렇게 질병처럼 느닷없이 다가온다. 가정사역자로 유명한 K씨도 이혼을 했다. 이혼가정을 돌보며 치료하던 사역자도 이혼을 한다. 비록 아이의 엄마는 아이 때문에 마지막까지 이혼을 해 주지 않았지만, "빨리 이혼해야 새장가 가서 위자료라도 챙겨 주지 않겠냐"며 점점 인간이하 수준으로 비굴하게 굴더니 결국 이혼 도장을 찍게 만들었다. 남자는 이혼도장을 찍은 지 3개월도 지나지 않아 새 장가를 갔다.

목회자라고 이혼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동기 목회자 중에서도 이혼을 한 목회자가 몇몇 있고 최근 후배 목회자도 이혼을 했다. 미국의 경우에도 목회자 이혼 가정이 늘고 있고 한국사회의 전반적인 이혼가정의 증가추세에 비례해 한국 목회자 가정이 흔들리고 있다. 특히 경제나 교회의 규모 면에서 부익부빈익빈 현상이 심화되면서 목회자 가정은 위기에 놓이고 있다.

한 번은 사모가 가정폭력으로 상담을 청했다. 남편 목사의 가정폭력이 도가 지나쳐 더 이상 방치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남편은 개척교회를 시작했지만 교회는 통 부흥을 하지 못하고 급기야 경제적으로 너무 어려워진 가운데 막노동일에 나가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 일로 남편의 자존감은 무너질 대로 무너져 이전에는 그냥 넘어 갈 수 있는 일도 아내가 무시한다고 생각하여 생트집을 잡았다.

그러더니 결국 폭력이 습관화되고 자신을 하나님께 버림받은 목회자로 자학하며 끝없는 밑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부흥하는 교회들이 쌍끌이로 어린 치어를 잡듯 버스로 골목골목에서 교인을 낚아 가는 동안, 임대교회들이 무너져 내리고 목회자 가정은 파멸로 치닫고 있는 단면이다.

이제 교회는 이혼가정에 대해 구체적인 프로그램을 마련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이혼가정 구성원들도 이혼으로 주눅들지 말고 자신의 이야기를 담담히 공동체에서 나눌 수 있어야 한다. 이혼 문제를 "하나님이 짝 지워준 것을 세상의 어떤 힘으로도 둘로 나눌 수 없다"는 교리로 접근하는 것은 가정폭력의 피해자 여성을 방치하는 것이다.

이준모 목사 / 해인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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