챠트를 본다. 낯 익은 이름이다. 기억력이 나쁜 나에게 익숙한 이름일 정도라면 병원을 제집처럼 드나든 사람임에 틀림없다. 역시 내 생각이 맞았다. 그래서 아는 체 하며 인사를 한다. “아이구. 왜 이렇게 자주 오세요.” 순간 환자의 얼굴에 스쳐가는 표정을 본다. 무척 당황하는 인상이다. ‘아차. 실수했구나.’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기억력이 나쁜 것은 물론 재치나 사람을 재미있게 하는 재주도 없는 나는 평소에 하지 않던 일은 가급적 하지 않는 것이 가장 좋다. 그러나 늘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자꾸만 실수를 하고야 만다. 그저 점잖게 않아서 평소에 하는 대로 차분하게 진찰하고 설명하고 처방하는 것이 나에겐 가장 어울린단다. 내 주변에서 나를 관찰하는 사람들이 한결같이 하는 말이다.

그래 그게 맞는 말이다. 나도 그런 것을 경험하고 그때마다 내가 실수한다는 것을 깨닫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자꾸만 같은 실수를 되풀이 한다. 소아환자가 온다. 벌써 며칠째 병원나들이를 하고 있다. “아이구. 왜 이렇게 안 나을까.” 나는 안타까워서 하는 말이다. 그러나 때로는 아이를 데리고 온 보호자들의 얼굴이 어두워질 때가 있다.

혹은 무슨 큰 병이 있는 것을 내가 감추고 있으며 혼자서 걱정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을 하기도 한다. 때로는 내가 하는 그 말투에 ‘집에서 아이를 어떻게 보살피기에 이렇게 안 낫느냐는 질책성의 표현이 들어있다’고 느끼는 사람들도 있는가 보다. 물론 그런 것들을 깨닫게 되기까지는 실로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참으로 오랜 시간이 지나고 환자들이 나를 세상의 누구보다도 더 신뢰 할 수 있는 사람으로 인정하게 되었을 때 비로소 예전에 자신들이 가졌던 느낌들, 인상들을 이야기하면서야 알게 된 내용이다. 물론 그들의 표정에서 나는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낄 수는 있었다. 그러나 잘못된 그 무언가가 무엇인지를 알게 된 것은 정말 한참의 세월이 지난 후다.

그토록 많은 시간이 지난 후에, 환자들은 서서히 내 마음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내가 말하는 것이 과장된 표현이나, 서운한 감정의 표현이 결코 아니란 것을. 환자와 의사가 서로를 신뢰하는 것은 그렇게도 어려운 일이다. 한번의 만남으로도 좋은 인상을 남기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 사람을 믿을 수는 없다.

그 사람이 설사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해도, 누가 그 사람이 무슨 말을 했다고 나에게 이야기를 해 주어도, 그 사람이 그럴 리가 없다는 믿음을 갖기에는 장구한 시간과 많은 경험이 필요한 것이다. 사랑이란 그렇게 어려운 것이다. 아무런 어려움 없이 그저 찾아오는 사람에게 좋은 말 한마디 해주는 것마저 오해를 받기 쉬운 것이 세상살이다.

복잡하고 다단한 세상에서 그런 소극적인 것이 아닌, 진정한 사랑을 실천하면서 살아가는 삶이란 얼마나 힘든 것인지, 인생을 살아가면서 더욱 절실하게 느끼고 있다. 무엇이 옳은지도 불분명한 것이 많다. 분명히 옳은 일을 행하는 데에도 싫은 소리를 하거나 구체적으로 방해를 하는 사람도 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이해관계가 얽힌 일들에 참견하는 것이 진료실에서 아픈 사람을 대하는 것보다 더 쉽기야 하겠는가.

온실속의 사랑과 야전 전쟁터에서의 사랑은 그토록 다른 차원의 것이다. 세상에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터무니없는 일들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너무 많은 사람이 너무 큰 고통을 당하고 있고, 너무 많은 사람이 너무나 강하게 눈과 귀를 꼭 막은 채 살아가고 있다. 이렇게 글을 쓰는 나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아마 오늘도 이렇게 글을 쓰는 것으로 내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하며 다리를 뻗고 편안한 잠을 잘 것이다.

내 존재의 한계는 그곳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레지던트 시절, 나는 어떤 과장님으로부터 어떤 말을 듣고 무척 놀란 일이 있었다. 철부지 의사시절에 나는 호감을 가진 과장님에게 엉뚱한 질문을 한 적이 있다. “언젠가 모든 병을 다 낳게 하는 약이 나오면 의사들은 어떡하죠?” 나의 질문에 그 과장님은 미소를 지으며 망설임 없이 답을 했다.

▲김광진. ⓒ뉴스앤조이
“세상에 의사가 다 없어져도 그런 약이 나오면 좋겠다.” 그리고는 이렇게 덧붙여서 말씀했다. “나는 택시운전이라도 하면 밥은 먹고 살아. 그러나 중한 병을 앓는 것은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이야?” 나는 그 말이 내포하고 있는 무시무시한 의미를 깨닫는데 상당히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너무 명백한 말이었지만 너무 의외의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후 나는 길을 가는 중에 유심히 거리를 보는 버릇이 생겼다. 혹시 내가 택시 운전을 하게 된다면 이렇게 큰 서울의 길에서 어떻게 올바른 길을 빨리 찾을까하는 걱정이 생겼기 때문이다. 덕분에 나는 서울의 길을 좀 더 잘 알게 되었다. 그렇다. 무엇을 한들 밥을 먹고 살지는 못하겠는가. 그 힘든 막노동도 익숙해지면 혹 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진정으로 기도한다. 아프지 말라. 고통에서 벗어나라.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여.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