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정말 나라들이 있다. 유엔 가입국이 200개 국을 훨씬 넘는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가만히 세상을 보면 생각지도 못한 나라들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곤 하기 때문이다. 특히 태평양의 자그마한 섬 국가들, 중미와 카리브해의 국가들, 아프리카의 중앙부에 있는 국가들, 그리고 구소련에 속한 땅이었던 중앙아시아의 나라들은 우리들의 관심에서 사실상 가려져 있는 나라들이다.

가끔씩 중앙아시아 나라들에 대한 기행담이 소개되고, 아프리카 국가들의 처절함이 뉴스에 간간이 흘러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그 나라들의 실제 상황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그 나라들이 그런 상황을 겪게 되는 원인은 물론이고 앞으로 그 상황에서 빠져나오기 위한 대책에 관한 분석은 전혀 만날 수가 없다. 제발 그 나라들에 대해 관심이 없는 것이 단지 우리나라만의 특수한 사정이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다른 나라들 역시 사정은 크게 다른 것 같지 않다. 유럽 국가들은 한 때 자신들의 식민지였고 지금도 상당한 자금을 투자하고 있는 아프리카나 중미에 대해 어느 정도의 관심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그것은 자국의 이해관계라는 관점에서의 관심일 뿐, 그 나라 일반인들이 가지고 있는 인식 수준은 그렇게 높지 않은 것이다. 태평양이나 중앙아시아의 잘 알려지지 않은 나라에 사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 역시 마찬가지다.

국제사회에서 인식되기를 거부 당하는 많은 나라들

그런데 인도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조그만 소국, 티벳에 관해서는 상당히 많은 것이 알려져 있고 사람들이 많은 관심을 끌고 있다. 외국을 돌아다니며 티벳 독립의 당위성을 주장하는 달라이라마의 정치적 역량과, 물질보다 영혼을 중시하는 그들의 생활방식은 사뭇 감동적이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그런 식의 정신우위의 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티벳인들 외에도 많다. 특히 고통 받는 사람들이 사는 곳들은 거의 한결같이 정신을 보다 우위에 두는 삶이 존재하는 곳들이다.

그런데 왜 티벳인가? 바로 티벳은 중국과 다투고 있기 때문이다. 구소련의 붕괴 이후 중국 견제를 가장 큰 장기적 국가적 목표로 삶고 있는 미국의 이해에 부합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헐리우드에서 티벳의 영화들이 만들어지고, 티벳에 관한 저서들이 봇물을 이루는 것이다.

나머지 나라들. 나머지 사람들의 삶은 우리들에겐 인지되지 않고 있다. 그들은 지금도 분명히 존재하고 있고, 그들의 나라에는 분명히 무슨 일들이 일어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들은 주류 언론에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혹, 그런 나라의 사정을 아는 사람들이 기사를 만들어 언론사에 송고하더라도,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 없다는 이유로, 혹은 그런 기사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 없다는 이유로 실리지 않기 마련이다.

한번 주류 언론사의 인터넷사이트에 들어가서 국제란을 클릭해보라. 그곳에서 아프리카나 중남미 같은 란을 클릭해보라. 아마도 절반 이상의 기사들이 지진으로 몇 명이 죽었고, 대형 교통사고가 나서 얼마가 죽었고, 유럽인이나 미국인이 인질로 잡혀서 어떤 일이 일어났다는 등의 기사들일 것이다. 혹은 에이즈가 얼마나 창궐한다든가, 그 나라의 지도자가 아직도 민주화를 하지 않고 있다든가 하는 등의 기사를 접할 수 있을 것이다.

왜 인질사건이 일어나며, 왜 에이즈에 감염된 인구 비율이 높은지, 그 나라의 에이즈 대책이 부실한 이유는 무엇인지, 그 나라의 지도자가 민주적인 길을 걷지 않는데 어떻게 권력을 유지할 수 있는지, 왜 그 나라의 지도자는 비민주적인 길을 걷는 것인지…, 왜 국제사회는 그들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것일까. 많은 나라들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도대체 그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왜 궁금하지 않은 것일까. 별별 일들에 호기심 많은 내가 이상한 것일까.

언론의 관심은 '이라크인이 왜 저항하는가' 보다 '미군의 미사일이 얼마나 정확한가'에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이든 그들은 이 시간에도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 그들은 존재하고 있지만 우리들의 인식에 들어오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잊혀진 존재들이다. 아니, 우리사회의 복잡한 시스템에 의해 체계적으로 인식되기를 거부당하고 있는 존재들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우리들이 그들에 대해 관심이 없고, 그것을 간파한 언론이 그들에 대한 뉴스를 다루지 않고, 그들에 대한 기사가 실리지 않기에 취재도 하지 않는 순환이 자연스레 이루어지는 것이다.

한 때 피골이 상접한 얼굴의 검은 피부의 아이의 사진이 우리의 뇌리를 장식했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그들을 잊어버렸다. 그들이 지금은 배불리 먹고 있기 때문에 잊은 것일까? 그것은 아닐 것이다. 체첸이 간간이 뉴스에 나는 것은 그들이 죽음을 각오하고 벌이는 처절한 투쟁이 감동적이어서가 아니라 흥미롭기 때문이다. 이라크가 중요한 것은 국제유가에 미치는 영향과 함께, 그들의 뉴스가 재미있기 때문이다.

이라크인이 왜 미국에 순종하기를 거부하고 그들 내부에는 어떤 대안들이 존재하는지, 미군과 싸우다 숨진 이들의 가족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중상을 입은 이들의 앞으로의 삶은 어떻게 이루어질지, 가끔 다루어지긴 하지만 결코 그것들이 뉴스의 헤드라인을 장식하진 않는다. 뉴스의 초점은 항상 미군의 헬기가 떨어졌다, 미군이 몇 명이 사망했다는 것에 관한 것이다. 이라크 전 초기에는 미군의 미사일이 얼마나 정확한가가 관심의 초점이었다.

그러다. 지금도 이라크와 비슷한 일들이 벌어지는 아프가니스탄과 팔레스타인이 잊혀져 있다. 그것은 그들의 뉴스가 이미 재미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희생과 투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재미와 그 재미를 소비하는 산업이 중요한 것이다. 그 그늘에서 많은 이들이 잊혀지는 구조를 가진 사회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잊혀진 이들. 우리가 애써 잊고 살고 있는 사람들. 그들의 삶의 실상은 과연 어떤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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