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복의 영성을 지탱하는 두 기둥은 '존재론적 영성'과 '실천적 영성'이다. 전자는 나를 '꼴 짓는' 영성이며 후자는 '움직이게 하는' 영성이다. 존재론적 영성은 나의 존재의 틀을 만들고, 내용을 채우며 나의 존재를 존재답게 하는 영성이다. 실천적인 영성은 존재론적 영성에 살을 입힌 영성이다. 그리스도교 영성은 현실에서 성육화 할 때 비로소 그리스도교 영성이라고 할 수 있다. 영성은 내면의 성숙이나 상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서 행위와 실천으로 살을 입고 구체화되는 것이다. 예수의 팔복 가르침에는 이 두 기둥이 함께 공존한다.

▲예수의 팔복 가르침에는 존재와 실천이라는 두 기둥이 함께 공존한다. ⓒ뉴스앤조이 신철민

우리 삶의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존재론적 영성

그리스도인은 먼저 존재가 변화된 사람들이다. 곧 새로운 피조물로서 변화를 경험한 사람들, 변화된 존재로서 하나님나라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은 존재의 변화를 토대로 실천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 존재 변화는 '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의 아들'로 다시 태어남에 대한 믿음과 체험으로 말미암는다. 존재가 새로워졌다면 그 새로워진 존재가 살아가기 위한 양식(糧食)이 필요하다. 곧 변화된 새로운 존재인 하나님의 자녀로서 새로운 창조세계인 하나님나라의 삶을 살아가게 하는 기운(氣運)이 필요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존재론적 영성, 곧 '됨(Being)의 영성'이다.

우리는 팔복 선언에서 우선 어떤 윤리적 행위를 위한 실천 덕목들이 아니라 존재의 변화, 변화된 존재의 모습을 지향하고 있음을 발견해야 한다. 팔복 선언은 인간의 외향적인 '행위'가 아닌 내면의 '존재됨'을 우선 선언하는 것이다. 존재와 행위가 이분법적으로 분리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영성은 결국 총체적으로 하나의 존재가 드러나겠지만, 적어도 삶의 양식에서 이 양자는 구분되는 것이다. 존재의 변화에 따른 행위의 변화, 행위의 변화에 따른 존재의 변화가 반복되지만 그 출발은 존재의 변화에 있다.

팔복 선언은 우리가 무엇을 행하고 그에 따른 보상으로 복이 주어진다는 논리가 아니라 팔복의 영성으로 총체적 존재의 변화를 보여주고 그것에 따른 영성생활의 행복을 노래한 것이다. 그래서 팔복의 가르침이 지닌 영성의 샘물을 마시려 할 때 가장 중요한 출발점은 팔복의 영성을 됨의 영성으로 보는 것이다.

존재의 변화를 일으키지 못하는 영성은 그리스도교 영성이 아니다. 예수를 만난 사람들은 그 사람이 병자든 사회적 죄인이든 간에 외형적인 치료나 용서만 받은 것이 아니라 자신들 삶의 근본적인 변화를 체험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새로운 존재가 된 것이다. 하나님의 성육신으로서 예수는 지금도 우리의 삶에 육화됨으로써 우리를 변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됨의 영성으로서 팔복 영성은 우리 생활의 한 부분을 개선하거나 윤리적·도덕적 행위를 촉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우리의 전 존재에 획기적인 변화를 요구한다. 팔복 영성은 존재의 변화로 말미암아 삶의 구조와 양식이 근본적으로 변화되도록 추동하는 것이다. 단지 여덟 가지 신앙 덕목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 존재의 여덟 가지 측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팔복의 내용을 읽을 때 우선 존재의 변화에 집중해야 한다.

존재의 변화는 행위의 변화로 이어져야

영성은 존재론적 영성에만 머무르지 않고 나를 역동적으로 '움직이게' 한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오늘도 우리 가운데 계속 성육신하고 계신다는 진리를 다시 한 번 상기시킨다. 곧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영성을 통해서 자신을 육화 하신다. 영성은 나를 움직여서 그리스도를 오늘의 상황에 육화되도록 이끈다. 육화되지 않는 영성은 그리스도교 영성이 아니다. 영성 자체가 인간의 삶에 통전적으로 관계하고 있는 것이기에 그것이 아무리 존재론적인 변화를 지향할지라도 존재의 영성을 제대로 추동해내는 실천적 영성이 상호 교류되지 않는다면 그 영성은 그리스도교 영성이라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존재로서의 영성이 토대가 되지 않은 채 우리를 움직이는 영성, 곧 영성의 육화, 실천적 영성은 오래가지 못한다. 존재 변화로서의 팔복의 영성은 삶의 실천적이고 활동적인 영성의 측면과 짝을 이룬다.

팔복의 영성이 지닌 '됨의 영성'이 '함(Doing)의 영성'으로 성육화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아름다운 존재로서 변화를 이끌어냈다 하더라도 그 변화는 시들고 말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해서 만약 우리가 존재의 변화를 가져온 영성을 체험하고 지녔다면 그 존재와 영성의 화육은 하나의 영성으로 이어지는 자연스러운 표현이어야 한다. 팔복의 내용을 영성적으로 바라볼 때 비록 그것이 우리의 존재 변화에 집중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에 상응하는 실천적인 영성을 함께 언급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팔복 영성은 실천적인 영성이다.

존재의 영성이 삶의 실천적 영성으로 이어지고 또 반대로 실천적 영성이 존재의 영성으로 맺어지는 과정은 계속 순환, 반복되어야 한다. 그러나 존재의 변화가 행위의 변화로 직접적으로 단시간 내에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곧 존재의 변화가 시작되었더라도 넓게는 그 존재를 둘러싼 사회적 관계나 구조, 좁게는 가까운 사람과의 관계, 혹은 개인적인 습관과 사고방식 등은 아직 변화되지 않기 때문에 '됨의 영성'과 '영성의 육화' 사이에는 시차가 날 수밖에 없다. 또한 내용에서도 '됨의 영성'이 곧바로 '함의 영성'으로 발현되지 않을 수도 있다.

▲김진 목사 / 크리스챤아카데미 상임연구원. ⓒ뉴스앤조이 신철민

특히 '아래로부터의 영성'으로서 팔복의 영성, 곧 삶의 주변부 사람들의 삶의 모습으로 치부되는 영성을 존재로 받아들이고 그것들을 다시 사회적이고 공동체적으로 실천한다는 것은 이상적인 이야기로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다시 우리는 예수가 팔복의 영성을 '권유'하는 것이 아니라 '선포'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팔복의 영성을 그리스도인으로서 지나치거나 포기할 수 없는 강력한 존재와 행위의 토대를 위한 명령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예수는 우리가 도달하지 못할 이상적이고 추상적인 이론이나 세계를 언급한 적이 없다. 이 팔복의 영성도 마찬가지다. 팔복의 영성은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변화된 존재에 드러나는 엄연한 신앙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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