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어느새 남의 얘기를 하게 된다. 그것도 칭찬보다는 허물을 들추는 것이기 쉽다. ⓒ박철

세치 혀가 탈이라고 하지만 한마디 말로 천 냥 빚을 갚기도 한다. 그러나 듣기 좋은 말도 자주 들으면 귀에 거슬린다. 이처럼 말은 적을수록 좋고 많을수록 흠이 많게 마련이다. 그래서 침묵은 금이라고 하는 것이다.

예로부터 임금이 권력을 쥐고 있던 때도 말의 길이 막히면 세상이 어지럽고 썩어간다고 여겼다. 임금에게 올리는 상소가 그러한 언로를 트는 하나의 장치였던 셈이다. 그렇다고 항상 올바른 말이 올려졌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간신들의 입질이 임금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하는 경우가 더욱 심했다. 간신들의 입질이 늘어나면 옳은 말을 하는 입은 다물어지거나 아니면 재갈이 물리게 된다. 아니면 옳은 말을 하자면 목숨을 걸고 비장하게 해야 하는 경우가 빚어진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시끄럽다는 속담처럼 조선조에 문정왕후가 섭정을 보던 무렵 세상은 썩을 대로 썩고 있었다. 희대의 간신 윤원형이 문정왕후를 잘못 인도하면서 천하의 올바른 생각을 짓밟고 있었던 때 남명(南溟) 조식(曺植)은 엄청난 간언을 했다.

“정숙한 대비께선 다만 깊은 궁궐에 사는 한 과부일 뿐이고 임금은 어려서 선왕의 외로운 아들에 지나지 않습니다. 수만 가지의 재변과 억만의 인심을 어찌 감당할 것입니까? 음악이 슬픈 곡조를 띠고 흰 옷을 입으니 이미 망할 징조가 보입니다.”

남명은 이렇게 간언을 올렸다. 할 말을 하고 있을 뿐이지만 간신들에게 말거리를 던진 꼴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초야에서 흠 없이 살았던 남명을 해하면 해를 입으리란 생각이 들어서 좌정승이 변명을 하게 되었다.

조식은 옛날 중국의 구양수도 어진 황후를 궁궐의 한 부인이라고 일컬은 적이 있었다고 아뢰고 옛 사람이 임금에게 고한 말을 인용해서 나라의 위기를 자극하게 말한 것이라고 둘러댔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지리산에 내려가 사약을 기다리고 있었던 남명에게 사약은 오지 않았다는 소문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간언(諫言)은 대개 귀에 거슬리기 쉬운 말로 짜여지게 마련이다. 무엇인가 잘못되고 불만이 있어야 간언이 생겨나는 까닭이다. 간언은 하되 거칠게 하지 말라고 퇴계가 남명의 간언을 읽고 한 말이 있다. 대비를 과부라고 직언해서 노여움을 살 게 무어 있느냐는 말이다. 그러나 강직한 성품은 돌려치기를 싫어하니 목숨이 걸렸을지언정 할말은 해야 하는 성미를 버리지 못한다. 남명의 성품을 올바르지 못하면 참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남명은 벗들 사이에서도 좀 뜸한 면이 없지 않았다.

▲예수께서는 "남을 판단하지 말아라"고 말씀하셨다. ⓒ박철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험을 잡아 자주 입에 올리면 가깝던 벗도 그 사이에 틈이 나고 만다. 이처럼 간언은 옳지 못함을 밝히는 데 필요하지만 잦으면 흠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디 털어 먼지 나지 않는 사람이 있을 것인가. 지금은 초야에 묻혀 사람들에게 사랑하는 법을 가르치는 사람을 만나기도 어렵고 설사 그러한 사람이 있다손 치더라도 세상에 실패한 패잔병처럼 여기려 든다. 그래서인지 권력 앞에서 간신이 되고 싶어 하는 사람도 많고 출세나 돈 앞에 간신이 되고 싶어 하는 사람들로 만원이다. 이러한 연유로 우리가 사는 세상은 말들이 많고 서로 삿대질을 하면서 네 밥의 콩이 내 밥의 콩보다 크다고 아우성을 치는 중이다.

어느 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남을 판단하지 말아라. 그러면 너희도 판단 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판단하는 대로 너희도 하느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고 남을 저울질하는 대로 너희도 저울질을 당할 것이다. 어찌하여 너는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제 눈 속에 들어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제 눈 속에 있는 들보도 보지 못하면서 어떻게 형제에게 ‘네 눈의 티를 빼내어 주겠다’고 하

겠느냐? 이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눈이 잘 보여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낼 수 있지 않겠느냐?”(마태 7:1­5)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어느새 남의 얘기를 하게 된다. 그것도 칭찬보다는 허물을 들추는 것이기 쉽다. 얼마 전에 그런 일이 있었는데 누군가의 허물을 얘기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는 순간 ‘아, 그에게 있다고 여겼던 허물이 실은 내게도 있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사람의 허물이 눈에 들어오면 그 눈을 내게 돌려 내 안을 들여다보아야겠다. 하지만 늘 그 사실을 잊고 혀를 놀리고 만다. 비방을 하는 것이다. '성바오로수도회'의 창립자 알베리오네 신부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 남을 비방한다는 것은 마치 걸레나 쓰레기를 모아 사람들 눈에 가장 잘 띄는 곳에 놓아 전시회를 여는 것과 같은 추한 결과를 만든다.”

▲내 안의 들보가 없어지는 날 내 형제 눈 속의 티도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리라. ⓒ박철

자신의 이중성을 알고 고백하는 사람

다른 사람의 결점에 눈을 감고 내 안의 부족한 점에 눈을 크게 뜨자. 들보만큼 큰 나의 부족함을 조금씩 줄여 나가자. 내 안의 들보가 없어지는 날 내 형제 눈 속의 티도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리라. 바울 사도는 “나는 내가 하는 일을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내가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로마  7:15)고 고백한다.

인생의 가장 큰 문제는 자신이 이중인격자임을 모르는 것이다. 잘못된 진단은 잘못된 처방을 하게 되어 있다. 그래서 급기야는 중병을 앓게 되고 죽음에까지 이르게 된다. 그러나 자신의 이중성을 알고 고백하는 사람은 위대한 사람이다. 자신이 환자임을 잘 알고 있고, 또 그러하기에 자신의 병을 고치려고 겸손한 열성을 보이고, 고쳐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살아 있는 동안 내가 할 말은
참 많은 것도 같고 적은 것도 같고
그러나 말이 없이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는 세상살이
매일매일 돌처럼 차고
단단한 결심을 해도
슬기로운 말의 주인이 되기는
얼마나 어려운 지 날마다
내가 말을 하고 살도록 허락하신 주여
하나의 말을 잘 탄생시키기 위해
먼저 잘 침묵하는 지혜를 깨우치게 하소서
참으로 아름다운 언어의 집을 짓기 위해
언제나 기도하는 마음으로
도를 닦는 마음으로 말을 하게 하소서
현대의 소음과 언어의 공해 속에서도
얼굴을 찡그리지 않고
겸손히 듣고 또 듣는
들어서 지혜를 깨우치는
삶의 구도자 되게 하소서
이해인 詩. 말을 위한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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