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99년, 실업극복을 위해 지역교회들과 함께 결연사업을 펼쳤다. 이를 위한 모임에서 지역교회 목회자들과 함께. (사진제공 해인교회)

요즘 많이 듣는 단어 중 하나가 ‘연대’다. ‘참여자치연대’ 같은 NGO가 흔한 말로 ‘떴기' 때문에, 연대활동과 전혀 무관한 단체까지도 유행처럼 연대라는 명칭을 사용할 정도다.

해인교회는 창립부터 지역사회, 교회와 연대하는 교회가 되기 위해 노력해왔다. 그동안 해인교회가 연대한 여러 교계단체 중에 가장 대표적인 곳은 ‘민중교회운동연합’(이하 민교)이다. 한 때 민교는 100여 교회가 넘는 회원을 가진 비교적 커다란 모임이었고, 그것도 전국에 분포되어 지역의 이름을 따 ‘○○민중교회운동연합’이라는 타이틀을 걸었던 적이 있다.

그러나 시대가 흘러 ‘민교’는 90년대 중반부터 쇠퇴하기 시작해 지금은 지역조직이 거의 다 없어지고 개별교회만 남아 민중교회목회자협의회나 생명선교연대라는 이름으로 개편했다. 그러나 여전히 인천지역에는 ‘인천민중교회운동연합’(이하 인천민교)이 남아있다.

인천민교는 1986년 만들어졌다. 당시는 인천·부천지역에만 200여 개가 넘는 회사에서 분쟁이 일고 있던 시기로, 교회들이 이에 비상한 관심을 갖고 협력했다. 그 때만 해도 연대운동을 위해 네 가지 기본틀이 있었는데 그것은 △교단보다 지역을 우위에 둔다 △당분간 비공개로 한다 △시간을 철저히 지킨다 △목회자 자질 향상을 위해 신학 철학 역사 사회과학을 공부한다였다.

이런 원칙만 보아도 알 수 있듯이, 그 시기는 혹독한 군사정권 아래서 그저 모이기 위해서도 보안이 필요할 정도로 연대운동에 어려움이 많았다. 목회자간에도 교단보다는 지역을, 그리고 일하는 목회자가 공동의 철학과 문제의식을 가지려는 열심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해인교회는 1986년에 창립되었으니, 출범 자체가 연대운동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비공개가 원칙이던 시대

내일을여는집 후원의 밤. 노래팀 '나도나도'가 함께 했다. (사진제공 해인교회)

그러나 지금은 그 당시와 달리, 연대운동이 거의 일상화되어 있고 특정 교회나 정치 성향에 따라 특화된 연대운동은 거의 없다. 그만큼 공개적이고 대중적으로 변화된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보니 연대운동은 유행처럼 번지고 있지만 그 관계가 매우 느슨한 편이다. 회비만 내면 가입이 되고, 특별한 강제조항도 없어 가입 탈퇴가 자유로운 편이다. 옛날처럼 어떤 단체를 받아들이기 위해 많은 토론이나 논쟁을 거치는 일은 거의 없고, 쉽게 가입해 활동하는 편이다. 자연 교우들도 연대운동에 무신경하거나 개인의 관심에 따라 교계단체보다 동호회나 시민단체에 가입하여 개별적인 활동을 더 즐기는 편이다.

해인교회는 '실직자쉼터' 및 '내일을 여는 집'을 만들어 활동하게 되면서 지역복지운동에 더 무게중심을 갖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전국실직노숙자대책종교시민단체협의회, 먹거리나누기 협의회, 인천참여자치연대 사회복지위원회 같은 시민사회단체와 연대활동을 하고 있다. 교회 선교사역을 중심으로 연대가 이루어지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이런 변화는 복지 외에 다른 사회문제를 등한시할 수 있다는 우려로 나타났다. 뿐만 아니라 선교내용상 정부와 협조하는 일들이 많아지면서 과거보다 비판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경우도 많아지게 됐다. 관심사가 다른 것도 있고 일의 양이 많아진 점도 있지만, 어쩌면 정부 눈치를 보고 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대부분의 교우들은 '국민의 정부' 이후부터 정부를 대항해 그렇게 투쟁적이지는 않다.

지난 해 12월 31일 서울 광화문에서 열린 반전평화 촛불집회에 교인들과 함께 참여했다. (사진제공 해인교회)

지난 해 4월, 미국의 이라크 침공으로 인한 파병문제가 일어났을 때 참으로 오랜만에 교우들과 회의를 거쳐 전쟁반대 입장을 정확하게 취할 수 있었다. 또한 교우들의 협력으로 나는 지역에서 ‘계양구반전평화운동본부’ 상임집행위원장을 맡아 활동하게 되었다. 지난해 12월 송년예배는 신도회를 중심으로 광화문 촛불집회에 나가 ‘반전평화운동본부’와 연대하는 것으로 대치됐고, 교회로 돌아와 경험나누기를 한 후 간절한 마음으로 평화를 기원했다.

최근에 와서는 행정·기업·시민사회가 함께 지역 아젠다를 만드는 ‘계양의제’에 관심을 높여가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교우들은 각자의 생활이 바쁘고 시민운동에 대한 경험이 적어 이 일에 적극적이지 못한 편이다. 오히려 '내일을 여는 집'을 통해 자원봉사를 한다든지, 여신도회연합회 등을 통한 교류 정도를 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 교우들에게 있어서 목회자의 연대활동이나 연대에 대한 개방 정도는 문제가 될 것이 없다. 한 때 연대활동을 하는 교회나 단체로부터 상처를 받았던 적이 있다. 그렇다고 해도 연대 자체가 무가치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상처는 다른 것이 아니다. 교회연합체나 시민단체가 생각보다 재정적으로 투명하지 않거나 민주적이지 못할 때가 있다는 것이다. 서로 너무 잘 아는 식구들 같은 관계다 보니, 재정보고를 할 때 자료가 법인처럼 철저하지 않거나 이에 대한 지적이 있어도 웃고 넘어 가는 식으로 절차상 진지하지 못할 때가 있다는 것이다. 이런 곳에 교우들과 함께 참석했다가 목회자의 수준을 지적 받은 적이 있어 너무 부끄러웠다.

연대를 해치는 공공의 적

해인교회 앞 아파트에서 무기장난감을 가져 온 아이들에게 화분을 주는 행사를 치렀다. 이는 반전평화운동의 일환으로 진행한 모임이다. (사진제공 해인교회)

최근 초유의 탄핵사태가 났을 때의 일이다. 내가 속한 교계단체의 책임자에게 이번 일에 대해 시국기도회라도 열어야 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사를 피력했지만, 이미 시민단체를 통해 지역에서 대응하고 있는 데 굳이 교계가 별도로 기도회까지 열 필요가 있겠냐며 즉각 무시했다. 이 과정에서 이런 단체가 과연 필요한가 하는 물음과 그런 정도의 생각을 갖고 대표는 왜 할까 하는 의구심마저 들어 속상했던 적이 있다.

물론 각 단체의 목적이 분명히 있지만, 임원들이 성실하지 못할 때, 단체가 사적인 모임에 그치거나 사유화되는 느낌마저 들 때가 있다. 특히 목사들의 이름 걸어놓기식 불성실한 행태는 우리 지역사회에서 시급히 사라져야 하는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유명세가 있는 이름을 적절한 동의와 민주적 절차 없이 마구 도용하는 사례는 소위 은혜롭게(?) 넘어 갈 일이 결코 아닌 듯 하다.

한 번은 가정폭력 대응책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한 여성단체에 연대성명서를 내는 일에 동의해 줄 것을 요청한 적이 있다. 그 단체장은 제안에 대해 개인적인 동의 의사를 밝히면서 공식적인 답변은 임원회의를 거쳐 신속하게 알려주겠다고 말했다. 작은 감동이었다. 단체의 동의를 구하는 절차를 일상화하고 있는 한 여성단체에 비해, 내가 속한 교계의 관행을 비교해 보면 부끄러울 따름이다. 단체장 기분에 따라 회식비가 마치 개인이 한 턱 내는 것처럼 사용된다거나, 단체장 의사에 따라 한 단체가 좌지우지되는 것은 이미 사유화의 길을 걷고 있다는 증거이다.

최근 지역에서 연대활동을 하면서 적잖은 혼란을 겪은 경험이 있다. 이런 일 때문에 시민들과 교우들이 시민단체에 대한 우려를 하면서 연대활동의 소중함을 잃는 것 같다. 반전사업을 제안한 한 단체가 있었다. 제안할 때만 해도 아주 좋은 뜻을 가지고 있어서, 교우들과 전체회의를 거쳐 참여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제안단체는 자신의 위상에 각별히 신경을 쓰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언젠가부터 반전평화운동을 지역보다는 중앙으로 집중하면서 지역조직을 방기했다. 직책을 맡은 사람도 불성실했고 분담금도 내지 않았다. 연대활동을 하면서 지나치게 한 단체의 위상이나 입지를 넓히려는 의도를 가진 사람들은 순수한 운동을 오염시킬 뿐만 아니라 시민들을 떠나게 한다.

탄핵문제로 지역에서 또 연대사업이 펼쳐졌다. 총선을 앞두고 있어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탄핵문제는 마치 선거전을 보는 듯했다. 아이들과 함께 집회에 나갔다. 당에서 나눠 준 선거복을 입고 있는 한 당원이 집회장 가운데서 담배를 피고 있었다. 아이들을 생각해서 담배를 꺼 달라고 했지만, 그 당원은 힐끗 쳐다보고는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서 여전히 담배를 물고 있었다. 민주시민으로서의 훈련과 소양이 부족한 탓이다. 오히려 이런 행태는 목회자 세계나 작은 교회에서 더 심각한 수준으로 나타날 때가 있다. 은혜로 문제를 어물쩍 넘어가는 일이 비일비재하고, 이것이 교계 위상을 더욱 떨어뜨리고 있다.

▲노동부와 내일을여는집이 결연식을 맺는 모습. (사진제공 해인교회)

굳이 성경에 나타나는 지체론을 거론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다양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우리 사회에서 연대의 소중함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권력에 대한 사적인 욕심과 정치적 이해가 연대에 끼여든다면 안 하느니만 못한 결과를 낳기도 한다. 이런 사욕을 배제하고 마음으로 연대할 때 공의로운 민주주의가 살아 숨쉴 수 있다. 바로 여기에 교회가 세상 어떤 단체보다 더 높은 강도로 연대운동의 원칙과 모범을 보여야 하는 이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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