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의 관심 - 정말 예수가 부활했나

부활 사건은 오래 동안 논쟁거리였습니다. 그 가운데, 정말 예수가 죽은 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났는가 하는 사실의 진위여부를 따지는 데 참으로 많은 시간을 바쳤습니다. 이해할 만합니다. 특히 지난 몇 세기 동안 과학이 기승을 부리게 되자 모든 것을 그 과학의 잣대로 재봐야 비로소 직성이 풀린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과학의 검증을 받을 때 비로소 역사의 가치와 확실성을 인정받을 수 있었습니다. 믿음의 세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과학으로 검증 받은 믿음만이 믿음이 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만큼 과학의 위세가 당당하였습니다. 과학에 대한 시대의 '믿음'이었습니다.

신학자들도 과학의 소용돌이 속에 빠졌습니다. 물밀 듯이 닥쳐오는 무소불능의 과학 앞에 기독교의 전통 신앙은 무력하다 못해 완전히 내버려야 할 무가치한 구시대의 찌꺼기쯤으로 여겼습니다. 휘두르는 과학의 칼날에 지금까지 믿어온 신앙이 깡그리 잘려버릴 위협을 받고 있다고 했습니다. 기독교의 믿음을 지키려면 과학의 척도에 맞추는 길밖에 다른 방도가 없다고 여겼습니다. 인간의 인식 지평을 남김없이 정복하고 있는 그 의기양양한 과학의 눈으로 기독교를 들여다보기 시작했습니다. 기독교 신앙을 과학으로 재단하기 시작했습니다. 신학의 상황이었습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기록이 거의 모두가 근거가 없을뿐더러, 그 기록이 신화투성이라는 결론을 내리기에 이르렀습니다. 신화를 걷어내야 했습니다. 신화로 뒤덮여 있고 신화로 채색되어 있는 성경에서 신화를 다 걷어치우고, 당대의 과학에서 인정할 수 있는 사실만을 찾아 지키자고 했습니다. 그것만이 기독교 신앙의 '알맹이'라고 여겼습니다. 다른 것은 다 버려야 할 껍데기였습니다.

▲박영신 목사는 근대 과학주의를 넘어 예수 부활의 의미를 캐내야 한다고 설교한다. (사진제공 한시미션)

과학의 오만을 넘어 '의미'의 풀이로

그러나 이것은 잘못이었습니다. 믿음의 세계를 과학의 세계에 맡겨버린 '예속의 오류'였습니다. 2천년 전에 체험한 것을 기록해 둔 그 신비스러운 이야기 내용이 오늘의 과학으로 보아 전혀 이해될 수도 또 증명할 수도 없다고 하여 다 빼버린다면, 그것이야말로 과학의 오만이요 이 시대를 사는 현대인의 오만입니다. 과학이라는 이름을 앞에 내걸기만 하면 모든 것을 압도할 수 있다고 믿는 현대인이 저지른 어리석디 어리석은 짓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다시 사심'의 뜻을 체험한 사람들의 특별한 '체험 이야기'와 그 순수성을 짓밟는 행위입니다. 그들이 어떻게 해서 부활 사건을 그렇게 이해할 수밖에 없었는지, 그들의 깊은 체험을 이해하려 하기보다는 가볍게 내동댕이치는 우리의 오만입니다. 과학의 오만이며 시대의 오만입니다.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다시 사심의 사건을 한낱 2천년 전의 사건으로 축소함으로서, 이후의 역사에서 인간의 삶 가운데 작동했고 또 오늘 우리의 삶 가운데 살아 움직이는 그의 '역사하심'의 가능성에 문을 닫아두는 행위입니다. 오만이 불러온 아둔함입니다. 

차라리 겸허해야 합니다. 그 시대 사람들이 무엇을 경험했기에 그렇게 기록할 수밖에 없었는지, 그들이 기록한 그 '신비스러운 체험'에는 어떤 뜻이 담겨 있는지 깊이 헤아려봐야 합니다. 기록된 체험의 이야기, 그것을 그대로 두고 그들의 눈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의미 해석의 접근 방식이 요청됩니다. 있는 그대로, 적혀 있는 그대로 두고 그 안에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지, 2천년이 지난 오늘 과학의 지배 체제 밑에 사는 우리들에게 낯설어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 그 감춰진 밑바탕의 의미는 무엇인지, 그것을 캐보고 이해하려 해야 합니다.

만약 부활 사건의 진위여부를 '과학의 눈'으로 따지는 데만 관심을 모은다면, 부활 사건은 실험실 안에 갇혀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과는 무관한 채로 저 실험기기로만 가득 찬 외딴 현대식 건물의 실험실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의미 해석'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이 상황을 견디지 못합니다. 과학의 잣대로 사실을 검증하겠다며 실험대에 꽁꽁 묶어둔 그 부활 사건을 풀어내고자 합니다. 오늘의 우리 삶으로, 모든 삶의 영역으로 확장하고자 합니다.

2천년 전 여인들에게 나타나고, 제자들에게 나타난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을 칙칙한 실험실의 공간에 얽어 매놓은 것은 지극히 부자연스러웠습니다. 규격화된 과학의 검증 절차에 얽매여 있을 수 없는 그 '다시 사심'의 의미를, 인간의 좁다란 관심 세계에 갇혀 있을 수 없는 그 '다시 사심'의 뜻을 실험 공간으로부터 끌어내야 했습니다. 그 '다시 사심'을 다시 사심의 뜻에 어울리게 넓은 삶의 공간으로 풀어내고, 살아 움직여야 할 역사의 마당으로 널리 펼쳐야 했습니다. 그것이 자연스럽고 또 온당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뜻을 마음에 새기면서, 오늘 저는 성경에서 읽는 한 장면을 들어 여러분들과 함께 부활 사건의 뜻 한 가지를 나누고자 합니다.

기득권층의 화려한 삶 저편에 있는 예수

성경에는 두 장면이 대조를 이루며 그려져 있습니다. 예수를 처형해야 한다고 벌써부터 계획을 꾸며온 지배 세력의 모습과, 그 세력 앞에 그지없이 무능하고 무력하게 그려진 예수의 모습입니다. 악의에 차 있으면서도 제법 당당하게 보이는 그 시대의 지배 세력과, 그 앞에 볼품 없게 보이는 예수는 대조의 극치를 이룹니다.  

왜 그들은 예수를 죽이려 한 것입니까? 여러 이유를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핵심은 그들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을 한사코 지키고자 하는 데 예수와 그의 가르침이 방해물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여유를 누리며 아무 일 없다는 듯이 태평하게 살아가고자 하는 삶의 방식을 그들은 놓치려 하지 않았습니다. 포기하지 않으며 했습니다.

기득권 세력들끼리 어울려 적당히 타협도 하고, 술수를 부리기도 하고, 뒷전에서 모략을 꾸미기도 하고, 인간의 약점을 들어 교묘히 이용하고, 돈을 주면서 사람을 사고, 대중 선동의 기술도 쓸 줄 알았습니다. 말하자면 간교한 술책을 써 가면서 세상을 잘도 살아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당연히 물질의 여유가 있고 풍요로웠습니다. 화려하기조차 했습니다. 부족이란 것을 모르고 세상을 살았습니다. 남에게 부러움을 사기도 남에게 위세를 부리기도, 또 남들의 존앙을 받는다고도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하여 지배 세력은 자기들이 누리고 있는 생활 방식을 조금도 바꾸려 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자기들의 생활 방식, 자기들의 생각을 무조건 옳다고 믿었습니다. 누군가가 그것을 도전하고 그러한 생각과 생활 방식을 이어가는 데 계속 거스르면 아예 제거해 버리고자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근본에서 그들의 삶의 방식에, 그들의 세계관에 방해가 된다고 결론지었습니다. 그리고는 누구도 감히 동감하고 동정할 수 없게 그를 극형에 처하도록 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그들이 지키고자 하는 삶의 방식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거드름을 있는 그대로 다 부리면서 행세한다고 여기며 사는 사람들, 부족한 것을 모른 채 아주 풍요롭게 산다고 여기는 사람들, 그 앞에 예수는 초라하기 그지없었습니다. 통상의 풍요란 없고 모든 것이 부족한 듯 했습니다. 행세할 것은 아무 것도 없고 부릴 수 있는 거드름이란 숫제 없었습니다. 제사장과 바리세인과 그들에게 아첨하며 어울려 사는 사람들에게 업신여김을 받았습니다.

예수는 언제나 기득권층이 누리는 화려한 삶 저 편에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사는 데 최소한으로 필요한 것 이상 그는 아무 것도 갖지 않고 소비하지 않았습니다. 많이 가지고 누리는데 길들여진 삶의 방식을 지키기 위하여 술수를 부려야 할 아무런 이유를 갖지 않았습니다. 부족을 모르며 여유 있게 사는 사람들이 그 풍요로운 통상의 삶이 도전 받을 때 느끼기 마련인 그 따위 불안은, 처음부터 예수에게 없었습니다. 바로 그가 대제사장에게, 바리세인에게, 아니 기득권층 모두에게 위협이었습니다. 그의 존재 자체가 그들에게 도전이었습니다. 처형해야 할 위험하고도 위험한 인물이었습니다.  

오늘의 '부활 삶'

어쩌면 성경은 이 두 삶의 방식에서 나올 수밖에 없는 모순과 대립의 기록물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몰아낸 인간 중심의 삶, 인간의 완전성에 대한 의식·무의식간의 자기 확신, 그것을 예수 그리스도는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차라리 파괴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을 인간의 삶 그 중심에 모셔와야 했습니다. 인간의 완전성에 대한 완고한 생각과 견고한 타성을 허물어야 했습니다. 인간의 완전성을 최정점에 두고 그것을 모든 영광의 출발점이자 종착점으로 삼는 인간의 오만덩어리를 부셔야 했습니다. 그 너머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몸소 살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은 인간의 탐욕으로 얼룩진 인간 중심의 '현상태'를 죽음의 세상으로 규정하고, 그 현상태를 이기고 새로운 삶의 세계를 열어준 일대 '변화와 변형의 사건'입니다. 현상태 유지를 위해 온갖 잔꾀를 부리는 인간의 삶, 그 삶이 엮어 온 탐욕과 소비와 파괴의 문명, 그것은 죽음으로 치닫는 죽음의 삶이고 죽음의 세상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이러한 죽음의 삶, 죽음을 향해 질주하고 있는 죽음의 문명을 이기고 '삶의 삶'을 보여주었습니다. 부활 사건은 죽음의 역사를 이기고 다시 사는 삶의 역사이며 이러한 삶의 지평을 연 역사의 사건입니다.

부활 사건은 그 '죽음의 삶'과 '삶의 죽음'에서 다시 사는 삶, 죽음의 낭떠러지로 무모하게 달려가는 죽음의 세상과 그 세상을 넘어 새로운 삶을 펼쳐야 할 '새로 다시 사는 세상', 이 두 삶과 세상 사이에 벌어진 싸움의 결말을 보여주는 기독교의 가르침이자 믿음입니다.

부활 사건을 과학의 영역으로 끌고 들어가 2천년 전의 사건으로 규정하여 그 사건의 검증에 몰두하면서, 인간의 삶에, 아니 오늘을 사는 우리의 삶에 부활 사건이 어떤 뜻을 가지며 어떤 힘을 행사하고 있는 것인지를 헤아리지 않고 지나쳐버렸습니다. 과오를 범한 것입니다.

예수의 다시 사심은 그리스도 교회의 출발이자 그리스도인 된 사람의 믿음이 맞닿고 있는 믿음의 밑뿌리입니다. 그의 다시 사심은 우리에게 죽음 이후의 부활에 대한 소망이며 그 증표입니다. 이것은 소중한 믿음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덧붙일 것이 있습니다. 죽음 이후의 부활에 대한 소망에 기울어져 오늘을 사는 우리의 삶에, '오늘의 갈릴리 땅'에 부활 사건이 행사하고 요구하는 의미를 축소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죽음 다음에 다시 산다는 '죽음 이후의 소망'에 치중하는 나머지 하루 하루를 하나님 중심으로 그의 뜻 가운데서 살아가야 하는 일상의 삶을 등한할 수 없습니다. 하루 하루가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사신' 그 뜻을 기억하며 그 뜻으로 살아가야 하는 '다시 사심의 일상화'를 이뤄야 합니다.

▲박영신 목사.
유대교의 안식일과 달리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날을 '주님의 날'인 '주일'의 예배 날로 정한 것도 '다시 사심'의 기억과 일상화에 겨냥되어 있을 것입니다. 현재의 역사를 부활로 바라보는 것, 그것이 부활 신앙입니다. 부활 신앙은 현재 속에 하나님의 뜻을 구현하며 살아야 하는 삶의 원동력이자 모형입니다.

우리는 어느 쪽에 서 있습니까? 어떤 삶의 세계 속에 들어 있습니까? 인간 중심의 현상태를 유지하기 위하여 발버둥치는 죽음의 삶, 산 것 같으나 실상은 죽음으로 치닫고 있는 그러한 삶에 얽매여 있습니까? 아니면, 모든 것을 하나님 중심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다시 사신' 그 부활의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이 부활의 주일에 우리 모두 '죽음의 삶'을 이기는 부활의 은혜 받을 수 있기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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