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사람들을 본다. 날마다 아픈 사람들을 대하며 살아간다. 나는 그들의 아픔을 진찰하고, 평가하고, 그리고 때로는 낫게 해준다. 아픔이란 고통스러운 것이다. 그들의 얼굴에 나타난 표정에서 그 고통의 크기를 읽을 수 있다.

나는 고통의 원리를 안다. 고통의 경과도 안다. 어떻게 하면 고통을 줄일 수 있는지도 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의 고통 그 자체를 알지는 못한다. 다만 고통을 안다. 나도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도 아플 때가 있기 때문이다.

아니다. 나는 내 앞에서 고통을 호소하는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더 많은 고통을 경험해 왔다. 나는 건강하지 못한 체질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의사가 되고 경험을 쌓기 전, 고통이 나의 삶과 너무나 친숙했을 때, 나는 그것을 고통이라고 생각하지도 못했을 때도 있었다.

나는 항상 모든 것들을 긍정하려고 했었다. 그래서 때로는 아픔도 자연스러움으로 받아들이기도 했다. 그리고 고통을 줄일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때로 일부러 고통을 치료하지 않고 참기도 했다.

의사지만 내 몸도 아프다

지금도 나는 때때로 아프다. 나는 장이 좋지 않다. 한밤에 자다가 일어나 배가 뒤틀리는 아픔에 쩔쩔 매기도 한다. 온몸에서 마치 땀이 비가 내리듯이 흐르고, 손으로 배를 잡고 마루바닥에서 뒹굴고 있다. 약장에는 항상 상비용 약이 있지만 그곳까지 일어나 걸어갈 수조차도 없다. 결국 나는 아내를 깨우고 만다.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건네주는 약통을 잡아 나는 내가 환자들에게 지어주는 용량의 3-4배를 먹는다. 부작용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나는 해가 밝으면 출근을 해서 환자를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전까지는 어떻게든 나아야 한다. 그래서 해가 밝고 나는 웃는 얼굴로 다시 환자들의 고통을 치료한다. 때로는 옆구리가 아플 때가 있다. 그 통증은 은근히 시작된다. 둔탁한 고통이 서서히 시작되다 점차 심해져간다. 나는 결국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수련을 받는 기간 중에 나는 요관 결석으로 정말 참을 수 없이 심한 고통을 겪은 적이 몇 번 있다. 퇴근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통증이 심해져 옆구리를 잡고 한 손으로 운전을 해 다시 병원으로 돌아간 적도 있다. 결국 몰핀을 맞고서야 그 지독한 통증은 가라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 날 밤을 꼴깍 지새워야 했다. 몰핀의 부작용에 의한 구토 때문이었다.

작년 말에는 엉덩이에 난 종기가 나를 괴롭혔다. 진작 치료를 받았으면 될 것을 나 스스로가 치료를 해보겠다고 내 엉덩이에 메스를 댔다. 결국은 상처가 덧나서 전신마취를 하고 수술을 받아야만 했다. 너무 큰 종기라 수술을 하고도 한 달이 넘게 그 상처가 다 아물지가 않았다. 이제 그 상처는 아물고 그리 크지 않은 흉터만 남았다.

그런데 며칠 전부터 어깨에 극심한 통증이 오기 시작했다. 마치 살이 터질 것 같은 통증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병이란 병은 거의 다 앓아보았다. 그래서 나는 병을 앓는 사람들의 심정을 잘 안다. 그리고 그들에게 무엇이 고통스러운지를 안다. 의사로서의 나에게는 많이 아픈 것이 축복이라면 축복이다. 그런데 이제껏 내가 한번도 앓아보지 못한 병이 찾아온 것이다.

며칠 동안 새로운 통증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것은 결국 견갑골 근육의 과부하에 의한 근육통이었다. 교과서에는 잘 나오지도 않는 드문 병이었다. 대체의학 강좌를 들으러 다닐 때 귀동냥을 한 것이 언뜻 생각났다. 그 원리에 의해 내 몸을 진찰을 해 보았다. 기가 막히게 딱 맞아 떨어졌다. 아내에게 잘 설명을 해서 아픈 근육부위에 주사를 맞았다. 통증이 쉽사리 사라지지는 않지만 그런 대로 참을만한 정도가 되었다.

그런데 다음날 나와 꼭 같은 증상을 보이는 환자가 찾아왔다. 나는 속으로 박장대소를 했다. '이런 일이 생기려고 내가 그 고생을 했구나'. 다음날 찾아온 환자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많이 좋아졌어요" 하고 말했다. 아픔을 겪으면서 가르치는 법을 배웠다.

아픔은 내 선생이다. 그래서 나는 아픔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아픔을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어떤 날 어떤 고통이 찾아올지 모르지만 그것에서 무엇을 배울 수만 있다면 그다지 두렵지 않다.

그러나 아무런 가르침도 아무런 교훈도 배울 수 없는 아픔이라면 그 아픔은 피하고 싶다. 진실이다. 나는 아픔을 잘 참는 편이지만 때로 아픔이란 정말 참기 힘든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희망이 없을 때에는.

희망 없는 아픔을 겪는 이들을 위해

많은 사람들이 병에 의한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다른 사람들은 사회적 문제로 인한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영혼의 문제로 고통스러워하고 있다. 그들을 치료할 의사는 어디에 있는가. 세상에 아픔이 가득할 때 그들과 고통을 함께 하고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 줄 사람들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이 세상의 불의에 희한 고통을 치료할 사람들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누가 이 세상에 가득한 고통과 싸우고, 누가 이 세상의 아픔을 어루만질 것인가.

아픔은 그것에 맞서 싸우는 사람들에게 축복이다. 또 아픔을 앓는 사람들에게도 축복이 될 수 있다. 그 아픔이 해결될 수 있을 때에. 사람들의 눈물겨운 노력과 사람들의 사랑에 의해 그 아픔이 사라질 수 있다면.

그러나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아픔, 그들만의 아픔, 나와는 무관한 수많은 아픔들이 이 세상에는 널려있다. 그것은 버려진 아픔이다. 그 버려진 아픔이 과연 축복이 될 수 있을까? 그 의문이 내 마음을 아프게 한다. 그 끊이지 않는 고통소리가 나를 슬프게 한다. 그래서 나는 지금 아직도 아픈 어깨를 주물러가며 이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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