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는 없다, 그러나 우리가 가야할 길

멈추지 않는 전쟁과 폭력, 인류 가득히 들끓고 있는 전사들의 노래, 가슴 깊숙이 후벼오는 포탄 터지는 소리, 이미 죽은 어미 곁에서 눈물짓는 아이를 향해 날아드는 총탄, 평화 없는 조국을 위해 평화를 위해 자살 테러를 가맹한다던 어느 전사의 혈서. 신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전쟁, 전쟁을 부추기는 종교지도자들, 종교 간에 벌어지는 분쟁과 선전포고.

인류 가득히 번지고 있는 전쟁의 공포 속에 한반도 조그만 나라에서도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포탄을 끌어안고 있다. 군인이 있고 미군이 있어야 안심이 되는 나라, 자기 스스로 평화를 일굴 힘을 애초에 포기한 나라, 그 속에서 마음의 분쟁을 키우며 사는 나를 본다.

아무리 평화를 노래하고 외쳐도 평화, 평화는 없다. 인류에도, 내 나라에도, 내 안에도 평화는 없다. 지금까지 인류는 평화를 꿈꾸어 왔으나, 온전히 평화가 실현된 역사는 한번도 없었다. 수없이 많은 이들이 평화를 위해 번제물로 드려졌으나 한번도 평화는 없었다. 그러나 평화 없는 세상에서 우리는 여전히 평화를 노래해야 하고 앞으로도 쉼 없이 평화의 등불을 밝혀야 한다. 평화는 사람의 일이면서 하느님의 일이기 때문이다.

너희는 나의 벗이라

이 땅에 평화가 오지 않는 것은 내가 더 많이 가지려는 경쟁과 불평등 때문이다. 우리가 평화를 위한다면 평등의 삶을 살아야 한다. 내가 평등하게 살지 않으면서 평화를 위해 일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최근에는 미군의 장갑차가 여중생을 압사시킨 참으로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 우리를 더욱 분노하게 하는 일은 아무런 죄도 없는 꽃다운 소녀들을 죽여 놓고 사과 한 마디 하지 않는 미군의 오만방자함이다. 어쩌면 저들은 여전히 한국을 자신들의 속국으로 생각하는 모양이다.

한국과 미국의 갈등은 바로 불평등에서 기인한다. 그런 의미에서 미국이 희생하며 한국을 보호하고 지켜준다는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여전히 자국의 이익과 세계 지배의 일환으로 한국에 미군을 파병한 것이고, 또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남한과 북한이 서로 형제의 관계, 동등한 동무의 관계로 보지 않는 한, 남북 간에 진정한 평화는 오지 않는다. 평등이란 말은 그 사람의 있는 그대로를 인정해 주는데서 시작된다. 북한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지 않고 남한의 생각과 뜻대로 그들을 맞추려 하기 때문에 갈등이 생기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요한복음 15장에서 "너희는 나의 벗이라"고 하셨다. 예수께서 우리를 벗이라고 부르셨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우리를 친구요, 동무라고 인정하신 것이다. 벗의 관계는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 스승과 제자와의 관계보다도 더 높은 최고의 관계이다. 그래서 가장 이상적인 관계는 '친구 같은 아내', '친구 같은 아버지', '친구 같은 선생님'이 아니던가.

동무의 관계는 평등의 관계요, 사랑의 관계다. 누가 누구를 지배하고 굴림하고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인정해 주고 끌어안고 사랑해주며 자기 것을 주어도 아깝지 않은 사랑의 관계다. 이러한 친구의 관계에서, 평등의 관계에서만 나와 너, 국가와 국가, 인류의 평화가 이루어진다.

이 세상 모든 이들을, 죄인까지도 친구로 여기신 예수야말로 세상의 평화를 이루신 분이다. 주님은 마침내 친구인 우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내어놓으시지 않았던가. 그 분이 우리의 구세주, 메시야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이유는 주님은 우리를 친구로 여기셨기 때문에 기꺼이 당신의 목숨을 우리 위해 바치신 것이다. 그렇다. 예수처럼 모든 이들을 평등하고 동등한 친구로 여기며, 기꺼이 친구를 위해 자시 목숨을 내어놓을 수 있는 사람만이 평화를 이룰 수 있는 것이다.

평화로 오신 주님

기독교인이라면 마땅히 이 땅에 평화를 이루는 일에 헌신해야 한다. 우리 주님은 이 세상에 평화의 주님으로 오셨으며, 하느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 간의 진정한 화해와 평화를 위해 오셨고, 이 일을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하셨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세상에 파송하실 때에 "어느 집에 들어가거든 우선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시오"(누가 10:5-6)라고 평화의 인사를 하라고 말씀하셨다. 세상에 파송된 제자들이 제일 먼저 기원할 것은 바로 평화다. 가정의 평화, 마을의 평화, 나라의 평화, 인류의 평화, 그리고 내 마음의 평화.

또한 예수께서는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여러분에게 평화를"이라고 인사하셨다(누가 24:36, 요한 20:19, 20:21, 26). 이것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친히 베푸시는 평화를 뜻한다. 이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도 평화를 위해서요, 부활하신 후에도 온전히 평화를 위해서 오신 분인 것을 알 수가 있다.

우리가 예수의 이름으로 세상에 파송된 것은 온전히 하늘의 평화를 이루기 위함이다. 교세를 넓히고 예수라는 이름을 널리 알리기 위한 파송이 아니라, 하늘의 평화, 곧 예수께서 우리에게 부탁하신 그 평화를 이루기 위함이다. 마침내 바울은 "그 분이 우리의 평화이시다"(엡 2:14)고 고백했다. 바울은 예수와 평화를 동일시하고 있는 것이다. '평화를 위하여'는 곧 '주님을 위하여'이며, '주님을 위하여'는 곧 '평화를 위하여'인 것이다.

신약성서에는 평화라는 말이 99번이나 나온다. 이것은 평화라는 말이 곧 복음(행전 10:36-37)과 동의어로 쓰여졌음을 의미한다. 구원의 복음은 곧 평화의 복음이다. 그러기에 평화를 위해 일하는 것이야말로 예수의 일이요, 하늘의 일이다. 예수의 이름으로 전도하고 교회를 높게 지어도 평화를 위해 일하지 않으면 그것은 사람의 일일뿐이다. 예수의 이름으로 전쟁을 부추기면 그것이야말로 사탄의 짓이다.

오직 평화는 주님께 속하며, 주님의 사도는 곧 평화의 사도가 되어야 한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세상에 파견하시며 지시하신 여장 규범 중의 하나로서 남을 공격하는 것은 물론이고 자기방어까지도 전적으로 포기하라고 말씀하셨다. "길을 떠날 때에 자루도 속옷 두 벌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시오"(마태 10:10, 누가 9:3, 10:4)라고 말씀하신 것은 평화의 존재, 그 자체가 되어야 평화를 위해 일할 수 있음을 말씀하신 것이다

어쩌면 한국교회는 이미 너무 많은 것을 가져 평화를 위해 일할 자격을 상실했는지도 모른다. 아니, 이미 평화와는 거리가 먼 종교집단으로 전락되었다. 자기 교회, 자기 자리, 자기 지위, 자기 것들을 지켜야하기 때문에, 이미 평화를 위해 길을 떠나려 해도 떠날 수 없게 되었다.

평화, 하늘 나라의 삶

주님은 세상의 평화를 위해 파송된 제자들에게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될 것이다"(마 5:9)고 말씀하셨다. 평화를 이루는 삶은 곧 하늘 나라의 삶을 미리 사는 것이다. 이 땅에 하늘 나라를 이미 사는 은총은 바로 평화를 위해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그 평화는 구체적인 우리의 삶 속에 이루어져야 한다. 교회 안에서, 우리의 기도 속에서, 성서 속에서 이루어진 평화가 아니라, 인류공동체, 민족공동체, 마을공동체, 나와 너 사이, 내 안에서 이루어지는 구체적인 평화, 곧 생활 속의 평화이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평화를 위해 당부하신 말씀은 먼저 이웃과 화해하고 나서 하나님께 제사(예배)를 드릴 것(마태 5:23-24)을 가르쳐 주셨다. 이웃과의 수평적 관계와 하느님과의 수직적 관계는 분리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먼저 형제를 용서해야만 하느님의 용서를 받을 수 있다는 말씀(마태 6:14-15)과 매우 비슷하다. 이 평화는 하느님과 사람들 사이의 수직관계의 정립이며, 이는 사람과 사람간에 수평적 관계를 통해 구체화되는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의 수평적인 평화는 수직적인 하느님의 평화가 인간공동체 속에 성육신하여 하느님 나라, 곧 평화의 나라로 변혁하는 구원의 역사이다. 하느님과 나 사이의 평화, 나와 이웃과의 평화, 인류의 평화는 오직 자기를 희생하고 헌신하는 십자가를 통해 화해하고 평등의 관계가 맺어져 진정한 평화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채희동 목사

자기 것을 내어놓지 않고는 절대로 평화를 이룰 수 없다. 오직 십자가의 자기 희생을 통해서만 평화가 온다. 평화는 자기를 비워 온전히 종의 형체로 오신 주님을 따를 때에만 이루어진다. 예수의 이름으로 성전을 높이 쌓고 부를 축적하고 권력을 얻고 명예를 얻는 오늘의 교회는 이미 평화를 외칠 자격도 예수의 이름을 부를 자격도 없는 것이다. 자기 이익과 명예만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미국은 평화를 논할 자격이 없다. 십자가만이, 십자가의 자기 희생만이, 자기 비움만이 인류의 평화, 한 나라의 평화, 한 공동체의 평화, 내 안에 평화가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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